[INTERVIEW]
'라스트 나잇 인 소호' 정정훈 촬영감독 "필름으로 하는 촬영을 몸이 다 기억하고 있더라"
2021-12-16
글 : 김성훈
<라스트 나잇 인 소호> 촬영현장의 정정훈 촬영감독과 에드거 라이트 감독(왼쪽부터).

이방인의 눈에 비친 런던 소호는 어떤 모습일까. 현재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에서 정정훈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화려함과 어두운 이면을 동시에 간직한 1960년대 소호와 무질서의 매력을 갖춘 현재의 소호를 현란하게 오가며 엘리(토마신 맥켄지)와 샌디(애니아 테일러조이) 두 여성의 사연을 신들린 듯 펼쳐낸다. 이 영화는 필름이 사라진 디지털 시대에서 35mm 필름으로 작업했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아날로그 작업이다. 정정훈 촬영감독이 필름으로 작업한 것은 한국영화로는 <부당거래>(감독 류승완, 2010), 할리우드영화로는 <스토커>(감독 박찬욱, 2013) 이후 처음이다. 디즈니+의 새 <스타워즈> 시리즈인 <오비완 케노비>(감독 데보라 차우) 촬영을 마치자마자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프리퀄인 영화 <웡카>(감독 폴 킹)의 런던 촬영장에 합류한 정정훈 촬영감독을 줌으로 만나 <라스트 나잇 인 소호> 촬영기를 들었다.

에드거 라이트 감독과의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가씨>의 촬영을 따로 언급할 만큼 에드거 라이트는 박찬욱 감독님의 열렬한 팬이다. 박찬욱 감독님이 ‘언젠가 에드거와 일하게 될 거’라고 농담 삼아 얘기하신 적 있다. 나 또한 에드거의 영화를 다 챙겨볼 만큼 좋아해서 함께 작업하는 데 큰 고민이 없었다.

에드거 라이트의 오랜 파트너는 전작 세편(<베이비 드라이버> <지구가 끝장 나는 날>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을 함께 작업한 촬영감독 빌 포프(<정글북>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촬영)가 있지 않나.

빌 포프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함께 작업하지 못하게 돼 에드거 라이트 사단에 합류할 수 있었다. 부담이 됐던 건 이 영화가 에드거의 전작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는 사실이었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이야기의 어떤 점에서 매료됐나.

에드거는 “영국적인 이야기”라며 “1960년대 소호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게 흥미로울 것 같다”라고 말해주었지만,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꼭 그렇지도 않았다. 어디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였고, 보편적인 메시지를 가진 영화라 큰 어려움 없이 접근할 수 있었다. 완성된 영화는 에드거가 원했던 무드가 시나리오보다 훨씬 잘 표현된 것 같아 안도했다.

이 영화는 35mm 필름으로 찍었는데 이야기의 어떤 점 때문에 필름이 적합했나.

에드거 라이트는 자신의 모든 영화를 필름으로 촬영할 만큼 영화적인 것을 선호한다. 유동 인구가 많아 조명을 세팅하기 쉽지 않은 실제 소호의 밤 거리 정도만 디지털로 찍었고, 그외 모든 장면은 필름으로 촬영했다.

<스토커> 이후 8년 만의 필름 작업이 아닌가.

그래서 두려운 점도 있었다. 그간 디지털에 익숙해졌는데 오랜만에 필름으로 찍으니 현상할 때 잘 찍혔을까 하는 걱정도 생기더라. 하지만 테스트 촬영을 하면서 다행스럽게도 몸이 필름 작업을 다 기억하고 있었고, 디지털보다 훨씬 나한테 잘 맞는다는 사실을 다시 느꼈다. 디지털처럼 필름 같은 룩을 만들 필요가 없었고, 필름 돌아가는 소리를 간만에 들으니 좋았다.

유독 밤 장면이 많은 이야기인데 빛은 어떤 컨셉으로 설계했나.

현재와 1960년대를 관통하는 매개체가 조명이었고, 조명을 설정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엘리 방 밖에 달린 프랑스 식당 네온사인 간판이 붉은색, 파란색, 흰색으로 변화하고, 빨간색이 됐을 때 엘리가 1960년대로 넘어간다는 설정이 시나리오에 있었다. 관건은 배우의 연기부터 카메라 움직임, 조명이 사운드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카메라가 돌아갈 때 사운드를 틀어 그 리듬에 맞춰 찍었고, 빛의 잔상이 오래 남는 텅스텐 대신에 빛이 곧바로 바뀌는 LED 조명을 선택했다. 조명의 변화를 신호 삼아 엘리가 1960년대로 걸어가는 장면은 연기, 조명, 카메라 등 모든 요소가 정교하게 계산된 연출이다.

카페 드 파리의 메인 홀은 공간이 꽤 넓던데 애너모픽렌즈를 사용했나.

맞다. 특히 그 공간은 넓어서 그만큼 조명도 많이 세팅됐다. 그 시퀀스뿐만 아니라 현재 시퀀스 또한 애너모픽렌즈를 투입했다. 필름은 예전부터 한국에서도 많이 썼던 코닥 250D(코닥 비전3 250D 5207)를 낮 장면에, 500T(코닥 비전3 500T 5219)를 밤 장면에 투입했다. 250D는 고감도라 낮에 적합했고, 500 텅스텐은 조명을 부드럽게 설계해야 하는 밤 장면에 적합했다. 여름에 찍었지만 런던은 해가 빨리 지기 때문에 밤 장면을 찍을 시간이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30분까지 8시간가량밖에 없었다.

런던 소호는 어떤 공간으로 다가왔나. 로케이션 촬영을 한 덕분에 영화 속 소호는 매우 생생하더라.

이 영화는 전작 <커런트 워>(2019)에 이어 런던에서 찍은 두 번째 영화다. 처음 런던에 갔을 때 접한 소호는 너무 복잡해 통제가 불가능한 동네처럼 느껴졌다. 누구도 통제하려고 하지 않고.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로케이션 헌팅을 다니면서 소호를 다시 보았는데 소호만의 매력이 있더라. 특히 공사 중임을 알리는 표지판에 달린 붉은색 조명이 무척 강렬했던 기억이 난다.

엘리가 사는 하숙집은 건물 밖에 달린 식당 네온사인 간판 때문에 빨간색, 푸른색, 흰색이 계속 깜빡이는 공간이자 1960년대 소호로 넘어가는 중요한 장치다.

영화 속 1960년대와 현재 공간이 어떤 차이점이 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내 입장에선 큰 차이가 없었다. 침대, 가구 배치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지만 사실 과거와 현재의 그 공간은 크게 다른 점이 없다. 다만 현재의 엘리 집은 좀더 자연스러운 태양광으로 설계됐다. 창밖의 식당 네온사인 간판과 화장대에 달린 거울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고리였다.

엘리가 1960년대 소호로 넘어가 샌디의 사연에 깊숙이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거울을 활용하는 아이디어가 인상적이었다.

전작에서 거울 반사를 활용한 장면을 많이 찍었고, 선호하는 편이다. 이번 영화 또한 이야기의 특성상 거울 반사가 많았는데 에드거 라이트 감독은 시각효과(VFX) 작업을 원하지 않았다. 엘리가 카페 드 파리의 긴 계단을 내려와 지배인을 만나는 영화의 초반부에서 엘리 뒤에 배치된 거울에 샌디가 따라 움직이는 장면은 VFX로 만든 장면 같지만 실제로는 똑같은 구조와 모양의 세트 두개를 나란히 만들어 찍었다. 지배인을 연기한 배우 또한 쌍둥이를 캐스팅했다. 엘리, 샌디, 쌍둥이 지배인 등 총 4명의 배우가 쌍둥이 세트에서 실제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똑같이 움직여 찍은 것이다. 쌍둥이 세트임을 감쪽같이 감추기 위해 조명이 다른 세트로 침범하지 않는 게 중요해서 세심하게 빛을 잘라냈다.

1960년대 소호의 대표적인 공간인 카페 드 파리는 매우 화려하던데 빛 설계를 어떻게 했나.

이 공간은 붉은 카펫으로 도배되어 있다는 것 외에 제약이 없어서 하고 싶은 대로 빛을 설계했다. 카페 드 파리는 런던에 실제로 있는 공간이지만 우리는 세트를 따로 지어 찍었다. 붉고 따뜻한 텅스텐광을 주 광원 삼아 설계했고, 서사가 전개되면서 붉은 톤의 빛이 보랏빛으로 변화하는 게 컨셉이었다. 보랏빛은 엘리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술집 투칸 시퀀스와도 연결되는 색감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스탭이 에드거 라이트와 오랫동안 함께 작업했던 사람들이라 준비가 잘되어 있었다.

엘리가 샌디에게 매료되면서 헤어스타일, 화장, 의상 등 외양이 서서히 변화하는 모습이 흥미진진했다. 그 변화를 시각적으로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나.

샌디가 입던 흰색 코트 말고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흰색 의상은 밤 장면에는 괜찮지만 낮에는 반사율이 너무 높아 다른 색으로 바꾸면 안되겠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필름 작업이라 흰색을 처리하는 데 크게 힘들진 않았다. 디지털 작업을 오래 하다 보니 흰색에 예민해진 것이다.

학교 도서관, 강의실 같은 현재 장면은 과거와 상반된 컨셉으로 디자인했을 것 같다.

1960년대 시퀀스는 판타지가 있는 공간이다 보니 현재는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조명을 되도록 적게 세팅하려고 노력했고, 그렇다고 콘트라스트를 너무 강하게 주는 것도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 디테일하게 설계했다.

엘리가 유령을 보는 대학 도서관 장면이 서스펜스가 넘치는 건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컨셉으로 찍어서인 것 같다.

VFX 작업이 하나도 안 들어간 장면인데 유령이 등장한다고 해도 특별히 다른 조명을 쓰지 않고 현실과 똑같은 방식으로 설계했다.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구분하는 게 모호한 컨셉으로 표현하려면 조명을 일관되게 설계하는 게 중요했다.

디즈니+의 새 <스타워즈> 시리즈인 <오비완 케노비> 촬영을 끝내자마자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프리퀄인 <웡카>를 촬영하고 있다.

그간 운이 좋았던 것 같다. 한국에서 활동할 때 나를 두고 ‘실력보다는 말로 찍는 촬영감독’이라 ‘미국에 가면 말이 먹히지 않을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할리우드영화 현장에서 농담을 많이 하는 편인데 동료들이 ‘왜 그렇게 농담을 많이 하냐’고 물어보면 ‘아직 실력이 없기 때문에 농담이라도 잘해서 감독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고 대답하곤 한다. (웃음) 지금은 통역을 안 쓴 지 한참 됐다. 그렇다고 영어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일이나 영화 얘기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할리우드에서 활동해보니 거의 모든 감독이 촬영감독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통역을 거치는 걸 싫어하더라. 감독과 직접 소통하면서 영어 실력도 덩달아 늘었는데 아직은 영어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런던에서 찍고 있는 <웡카>에 대해 들려달라.

<웡카>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프리퀄 버전이라는 사실 외에 어떤 이야기인지 잘 몰랐다. 원래는 시머스 맥가비 촬영감독(<위대한 쇼맨>(2017), <녹터널 애니멀스>(2017) 등 촬영)이 진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와서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못하게 됐다고 얘기하더라. 얼떨결에 런던 촬영장에 합류해 한달째 찍고 있는데 프리프로덕션을 거치지 않아 걱정이 많았지만 나름 현장에 잘 적응하고 있다.

배우 티모시 샬라메와 작업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한국에서도 화제가 됐다. (웃음)

티모시 샬라메와 함께 작업한다는 내용의 <씨네21> 기사를 보고 한국에 있는 조카가 연락해올 만큼 티모시가 인기가 많더라. (웃음) 이번에 처음 만난 티모시 샬라메는 매우 적극적이고 성실한 배우다. 현장에서 나를 잘 챙겨준다. <웡카>는 지금까지 찍은 작품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유럽의 한 도시의 광장을 세트로 지었으니까. 어쨌거나 열심히 할 테니 많이 기대해달라.

사용한 카메라 아리플렉스 435(필름), 파나비전 파나플렉스 밀레니엄 XL2(필름), 아리 알렉사 미니(디지털)

즐겨 쓴 렌즈 파나비전 C-, G-, T- 시리즈, ATZ와 AWZ2 렌즈, 파나비전 프리모 C-, G-, T- 시리즈

화면비 2.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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