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6일,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에선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이 총감독을 맡고 서성원 감독이 연출과 공동집필한 왓챠 오리지널 시리즈 <최종병기 앨리스>의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스탭들의 분주한 발걸음을 쫓아 촬영 중인 A스튜디오를 기웃거렸더니 마침 밥때. 허기를 자극하는 밥 냄새를 따라 걸음을 옮기니 스탭들이 식당에서 ‘영일만 밥차’ 사장님의 손맛과 인심으로 두둑하게 배를 채우는 중이었다. 식사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같은 1층에 위치한 B스튜디오에 들어섰더니 디즈니+의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감독 박인제·출연 류승룡, 한효주, 조인성, 차태현)의 세트 제작이 한창이었다. <무빙>은 내년 2월까지 이곳에 진을 칠 계획이라고 하는데, 이날은 목재 냄새와 간간이 들려오는 스탭들의 노동요 소리가 널찍한 스튜디오를 채웠다.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 곳곳에 사람들의 숨소리, 발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오늘도 한국영화·영상 제작 현장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원스톱 제작 시스템의 중심으로
부산영상위원회가 운영하는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가 올해로 개관 20주년을 맞았다. 2001년 11월17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상시 촬영이 가능한 실내 스튜디오가 부산 해운대구 해운대해변로에 문을 열었다.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는 남양주종합촬영소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조성된 영화 촬영 전문 스튜디오다. 2001년에 250평 규모의 A스튜디오가 먼저 문을 연 뒤 2004년 2월 대규모 스튜디오인 500평짜리 B스튜디오가 문을 열었다. A스튜디오의 첫 작품은 정윤수 감독의 SF블록버스터 <예스터데이>, B스튜디오의 개관작은 곽재용 감독이 연출하고 전지현, 장혁이 출연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이다. 이후 현재까지 20년간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에서 촬영된 작품은 총 187편으로, <태극기 휘날리며> <해운대> <국제시장> <택시운전사> <부산행> 등 1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도 5편이다.
B스튜디오의 경우 가로가 긴 직사각형 형태(58m×29m×10.5m)다. 이런 형태적 특징은 <부산행>의 기차, <해무>와 <연평해전>의 선박 등 긴 축을 활용해야 하는 세트 촬영에 용이한 장점이 있다. <부산행>의 김연호 프로듀서는 “당시 KTX 객차 두량을 제작했는데 두량을 이으면 그 길이가 40m가 넘었고, 그걸 수용할 수 있는 곳이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였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부산행>의 촬영이 끝난 뒤 부산영상위원회에선 공들여 제작한 기차 세트를 보존하기 위한 방법을 백방으로 모색했다. 기록과 보존의 차원에서도 유의미하지만 영화도시 부산의 관광업과도 충분히 연계 가능할 거란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영화가 개봉하기 전 <부산행>은 생소한 좀비물이었고, 이만큼의 세계적 성공을 예상한 기관이나 단체가 없어 결국 기차 세트를 폐기하고 말았다. <부산행>의 이런 안타까운 에피소드를 전해준 이승의부산영상위원회 전략기획팀장은 “영화 촬영과 관광이 연계되는 영화 기지 부산을 만들 방안을 적극 모색 중”이라 했다.
지난 20년간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는 부산영상위원회 원스톱 제작 시스템의 중심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실제로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가 조성된 배경에는 부산의 로케이션 촬영 유치에 대한 고민이 깔려 있었다. 로케이션과 스튜디오의 원활한 연계는 지금도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의 강점 중 하나다. 김윤재 부산영상위원회 스튜디오운영팀장은 “전국에서 최초로 로케이션 서비스를 시작한 곳이 부산영상위원회”이며, “스튜디오가 생기면서 효율적인 원스톱 지원이 가능해졌고, 체계화된 로케이션 지원 사업이 부산의 자랑이자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의 경쟁력”이라 말했다.
영화인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올해 봄부터 가을까지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에선 배우 이정재의 영화감독 데뷔작 <헌트>의 촬영이 진행됐다. <헌트>의 조재상 프로듀서는 말했다. “로케이션 촬영지로서 부산의 매력은 시대극을 찍을 수 있는 구도심과 고층 건물이 즐비한 현대적 공간이 함께 있다는 점이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헌트>의 경우 부산 로케이션이 많은 작품이었는데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에서) 세트 촬영을 길게 가져갈 수 있어 이점이 있었다.” <낙원의 밤> <마약왕> <남산의 부장들>을 부산에서 찍은 이용수 프로듀서는 세트 촬영을 할 땐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를 늘 1순위로 고려한다”면서 그 이유로 필요한 시설이 효율적인 동선 안에 잘 갖춰져 있는 점을 꼽았다.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만큼 시설이 잘돼 있는 곳이 많지 않다. 디테일하게는 화장실이나 식당의 위치까지, 촬영팀이 작업하기 편하게 시설이 갖춰져 있다.” 이용수 프로듀서는 또한 “함께 영화를 만들어간다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담당자들과 부산 시민들”이 부산에서 작업하고 싶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부산행> <지옥> 등 연상호 감독과 꾸준히 작업하고 있는 김연호 프로듀서는 “영화인들이 부산에서 영화를 찍는다고 하면 갖게 되는 어떤 기대감이 있”으며, “스튜디오가 도심에 위치해 있고 해운대 바닷가와도 가까워 배우 및 스탭들의 환경적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스무살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의 남은 과제는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는 현재 내년 6월까지 A, B스튜디오의 대여 신청이 완료된 상황이다. 부산영상위원회의 촬영지원 편수도 11월10일 기준 총 117편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이는 OTT 플랫폼의 증가로 제작되는 콘텐츠의 양이 늘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를 이용하는 OTT 작품의 비중도 증가하는 추세다. 조성희 감독의 <승리호>의 경우 메인 캐릭터 모션캡처 등 버추얼 프로덕션 제작지원을 받았고, 넷플릭스의 <수리남> <D.P.> <낙원의 밤>, 왓챠의 <최종병기 앨리스>, 디즈니+의 <무빙> 등이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를 이용했다.
김윤재 팀장은 “최근 OTT 작품의 스튜디오 이용 문의가 늘어나고 있고, 시리즈물 제작이 늘어나면서 전국적으로 스튜디오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2개의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부산영상위원회 입장에서도 스튜디오의 확장은 계속되는 고민이다. SF나 대형 시대극 등 시각효과(VFX) 의존도가 높은 작품들이 제작되면서 그에 따라 신규 버추얼 프로덕션 스튜디오와 대형 스튜디오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는 상황이다. 영화인들은 영화진흥위원회가 부산 기장 지역에 준비 중인 촬영소가 건립되고, 부산에 오픈세트 등이 확충되면 기존의 인프라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승의 팀장은 “로케이션, 실내 스튜디오, 오픈 스튜디오, 세 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부산은 아직 오픈세트가 없어 이가 하나 빠진 느낌”이라면서 “스튜디오가 확충되면 국내는 물론 아시아의 콘텐츠까지 충분히 소화하는 세계적인 영화 도시가 될 것”이라고 희망적인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제 스무살. 성인이 된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의 미래는 한국 영화영상 콘텐츠의 미래와 동떨어져 갈 수 없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지금, 실내 스튜디오의 확충과 오픈세트에 대한 요구 등은 부산영상위원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20년간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스튜디오의 미래 전략을 추진력 있게 실행해야 할 단계에 이른 것이다. 스무살이 된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의 변신과 도약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