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리코리쉬 피자' 속 사물과 시청각적 사랑의 구조
2022-03-02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거울 속으로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관계의 내용으로 본다면 희박해 보이지만, 사랑이라는 인식을 가능케 한 것들에 관해 생각했다.

<리코리쉬 피자>의 오프닝숏은 거울 이미지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그 자체로 특별하다고 할 수 없으나, 오프닝숏에서 인물이 내내 거울 속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앨범 촬영을 앞두고 학교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며 단장하는 개리(쿠퍼 호프먼)와 친구들이 보이는데, 카메라는 아이들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위치에서 거울 속 이미지만을 보여줄 뿐, 그 뒤에 놓인 실제의 몸은 철저히 배제한다. 누군가의 장난으로 바닥에서 물이 마구 솟구치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아이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도 아이들의 실제 몸은 카메라 위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소년들이 특정 조건에서만 보이는 신기루나 유령일 수 있다는 과장된 상상을 하게 된다. 그들이 마침내 거울 오른편으로 비치는 문 뒤로 사라질 때, 그들은 마치 거울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만 같다.

이 장면은 어떤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의외로 연결된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분노의 주먹>(1980)의 마지막 장면은 챔피언에서 변두리 술집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전락한 주인공 라모타(로버트 드니로)의 독백으로 이뤄진다. 이 독백은 오프닝 장면에서도 등장해 수미쌍관 구조를 이룬다. 처음에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마치 관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보였던 라모타의 대사는 마지막에 이르러 분장실 거울에 비친 형상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독백이 된다. 무대에 오르기 위해 분장실을 떠나는 그의 모습은 마치 거울 속에 사로잡힌 허구화된 그림자의 사라짐처럼 보인다. 시퀀스의 의미를 비교적 명확히 만드는 것이 가능한 <분노의 주먹>과는 달리, <리코리쉬 피자>의 오프닝숏만으로 그 의미를 가늠하기란 불가능하다. 심지어 아직 주요 인물이 누구인지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이어지는 시퀀스에서도 거울 장면이 다시 등장한다. 유니폼을 입은 알라나(알라나 하임)가 작은 거울을 손에 든 채 교정을 걷는다. 무리와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가면서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학생들을 향해 “빗 줄까요?”라고 묻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단 한 사람, 개리만이 그에게 반응한다. 상대방의 손에 들린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며 기꺼이 머리를 빗던 소년은 여자에게 자신의 커리어를 읊으며 능글맞지만, 밉지 않게 대화를 이어간다. 그가 몇몇 작품에 아역배우로 출연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거울을 본다는 것은 배우라는 직업을 반영한 행위로 이해되기도 한다. 주목할 것은 거울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을 포착하는 방식이다. 알라나의 얼굴과 작은 손거울 속 개리의 얼굴을 한 화면에 포착하면서 마치 알라나의 얼굴 옆에 개리의 얼굴이 작게 솟아난 것처럼 보인다. 자기 반영성의 도구 혹은 자기 분화의 표식으로 흔히 쓰인 영화 속 거울은 두 사람을 통해 관계의 사물로 뒤바뀐다. 거울을 통해 나란히 붙은 얼굴 이미지를 통해 두 사람은 알아채지 못한 사이 공동 운명에 처한다.

1. 만지지 마시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은 전작에서도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통해 관계를 명시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산페르난도 밸리를 배경으로 한 다른 영화 <매그놀리아>에서 개구리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기 직전, 영화는 자동차 거울에 비친 짐(존 C. 라일리)의 얼굴을 자동차 유리에 비친 도시 풍경과 함께 포착한다. 도시 풍경 위에 덧붙은 사람의 이목구비는 도시와 공동 운명에 처한 사람들의 삶이라는 영화의 주제를 압축하는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또한 액션과 리액션의 구분을 흐릿하게 만드는 시도로도 보인다. 영화 속 인물은 개구리 비라는 자극에 대한 반응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개구리 비라는 이상 현상을 예감하거나 불러오는 촉매이기도 하다. <매그놀리아>에서 도시를 배경으로 자극-반응 실험을 넓게 펼쳤다면, <리코리쉬 피자>에서 그것의 배경은 두 사람의 관계로 축소된다. 영화는 액션과 그에 대한 반응을 같은 표면에 위치시키면서 관계를 논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힘을 빼기 쉬운 힘겨루기에 관한 문제를 가볍게 점프한다. 영화가 두명의 주인공을 다루는 데 있어 완벽한 균형감을 선보인다는 사실은 이런 사소한 장면을 통해 보증된다.

감독의 영화에서 거울을 활용한 이미지가 늘 중요했던 건 아니다. 이를테면 <팬텀 스레드>에서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다소 기능적으로 쓰였다. 일행과 식사 중이던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두 여성 팬이 찾아와 말을 거는 장면에서 그들은 거울 속에 비친 상으로만 화면 한구석에 등장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얼굴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다. 그들은 오직 “당신의 드레스를 입고 죽고 싶다”는 과장된 찬사를 전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거울 장면이 <리코리쉬 피자>에도 등장한다. 물론 거울 속 작은 이미지로 드러나는 인물이 단역이 아니라 주인공 알라나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정치인 왝스(베니 사프디)의 선거사무소에서 활동하게 된 알라나는 늦은 시간 왝스의 호출을 받고 달려가는데, 데이트를 기대하며 도착한 식당에는 왝스와 그의 동성 애인이 함께 있다. 알라나는 파파라치에게 동성 애인과의 관계를 들키지 않기 위한 알리바이였다. 마주 앉은 왝스와 동성 애인 사이에서 거울로 된 벽을 마주 보고 앉은 알라나는 거의 거울에 비친 얼굴로만 드러난다. 거울 이미지는 왝스의 연애사에서 소외된 알라나의 상태를 시각화한다.

거울은 특정 장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두 주인공의 관계를 비추는 가장 핵심적인 사물이다. 두 사람의 얼굴은 전혀 닮지 않았으나, 상대방을 마주하고 있을 때면 마치 서로에게 거울처럼 느껴진다. 감독의 전작에서 대조적인 인물들이 서로 데칼코마니를 이루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데어 윌 비 블러드>의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선데이(폴 다노), <마스터>의 프레디(호아킨 피닉스)와 랭커스터(필립 시모어 호프먼)는 반목하거나 협력하거나 쌍을 이뤘다. 여기에 <팬텀 스레드>의 레이놀즈와 알마(비키 크립스)의 관계를 덧붙일 수 있다. 감독의 영화 속에서 관계를 설명할 때, 비정상적인 광기가 더 큰 무게를 차지하곤 했으나 점차 사랑이라는 주제가 분명히 대두되고 있으며 <리코리쉬 피자>는 이러한 경향의 정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달리는 후반 시퀀스는 마치 두 사람이 서로의 거울인 것처럼 정확한 대칭을 이룬다. 그들이 거울이라면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선택받기보다 스스로 비출 대상을 선택하는 역동적인 거울이라 해야 할 거다. 마침내 서로를 발견하고 질주하는 측면숏 위로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달렸던 순간들이 몽타주된다. 마침내 서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온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 이들은 화면 바깥으로 사라진다. 카메라는 이들이 부딪혀 넘어진 모습을 비추는 대신 사라진 자리에 남은 영화관 앞 매표소 점원의 어리둥절한 리액션만을 담는다.

절정의 순간을 생략한 것은 단순히 로맨틱 코미디의 수법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리코리쉬 피자>에서 두 주인공의 접촉은 종종 유예되거나 생략된다. 개리는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려 알라나의 벗은 상반신을 마주하지만, 만지는 것은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알라나와 물침대에 나란히 누운 장면에서 개리는 알라나의 손끝을 조심스럽게 터치하지만, 자신의 옆에 누운 알라나의 몸을 만지지는 못한다. 물론 이것은 설익은 청춘 로맨스의 클리셰다. 그러나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 보는 관계의 맥락에서 두 사람의 접촉은 필연적으로 미끄러져야 하는 어떤 것처럼 보인다.

2. 고장난 전화기

두 사람의 접촉이 유예되거나 때로는 불가능해 보인다는 가정을 받아들일 때, 이것은 약점이기보다는 가능성처럼 보인다. 접촉 불가능의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사물은 물침대다. 개리가 열의를 보인 사업 아이템인 물침대 판촉이 성공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체험보다는 상상이다. 물침대 체험관을 오픈할 여유가 없던 개리는 라디오 광고를 활용하는 한편, 어머니가 운영하는 사무실에서 전화 판촉을 시도한다. 비접촉식 판촉은 물침대 판매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다. 물침대는 한번 누워보는 체험으로 족할 뿐, 냉정하게 말해 그것을 굳이 집으로 들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옷이 축축하게 젖은 채로 일어나는 대신 산뜻하게 일어나는 상상, 바다 위에 누운 것 같은 상상을 자극하며 판매의 동력으로 삼는다. 덧붙여 알라나가 개리를 의식하며 남성 손님을 향해 유혹적으로 마케팅을 펼치는 장면은 직접적으로 <펀치 드렁크 러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전화기는 성공적인 사업을 위한 조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운드를 실험하기 위한 매개로 보인다. 유선 전화를 이용한 통화 장면에서 전화기로 송출되는 사운드의 질감이 유독 두드러진다. 영화는 이미지에서만이 아니라 음질에서도 아날로그적인 것을 구현하려 시도한다. 전화로 들리는 목소리는 마치 과거 영상 속에 등장한 실제 유선 전화 음성을 떼어다 붙인 것처럼 이질감을 준다. 이와 같은 음향효과는 뮤지컬 장면에서도 두드러진다. 개리가 다른 아역배우들과 대가족으로 출연한 영화 속 한 장면을 스튜디오에서 재연하는 TV쇼 장면에서 배우들의 노랫소리는 라이브가 아닌 녹음한 음성, 특히 디지털 기록이 아닌 테이프나 레코드와 같은 아날로그 매체에 의한 질감을 연상시킨다. 뮤지컬 장면에서 노랫소리가 전체 장면을 장악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음량이 낮고 아련하게 들려온다는 점 역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다.

영화가 패션과 사물, 역사적 사건 등을 통해 1970년대의 이미지를 비교적 잘 구현한다고 여겨지지만, 여기에 1970년대식 사운드의 질감을 덧붙였을 때 그것은 이미지에 맞아떨어지는 대신 서걱거리는 이물감을 남긴다. 그것은 흡사 싱크가 잘 맞지 않는 조악한 립싱크 무대처럼 보인다. 사운드와 이미지 사이에서 오는 혼란감은 존 카사베티스의 데뷔작 <그림자들>(1959)을 느슨하게 연상시킨다. <그림자들>에서 인물의 대화가 들려올 때, 사운드는 이미지와 맞춰지지 않아 혼란을 준다. 거리에서 친구들이 만나는 장면에서 들려오는 대사를 비롯한 사운드는 인물들의 입 모양이나 행동과 싱크가 맞지 않아 그들이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는 <그림자들>이 저예산으로 제작된 독립영화이기 때문에 사운드와 이미지가 완벽히 동기화를 이룰 수 없었던 탓이었겠으나, 오히려 그로 인한 혼란이 개성과 훌륭함의 조건이기도 했다. <리코리쉬 피자>가 재현 대상으로 삼는 것은 고증에 의한 물품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물건들에 의해 가능했던 한계를 재현하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사운드와 이미지를 통해 야기된 혼란 옆에는 캐릭터들이 만드는 무음의 순간이 자리한다. 알라나가 또래 배우 랜스(스카일러 지손도)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한 개리가 알라나의 집으로 랜스인 척 전화를 건다. 개리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애쓰다가 전화를 끊는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가장 가깝게 위치한 것처럼 느껴진다. 알라나는 침묵 속에서도 그것이 개리임을 알아챈다. 개리가 갑자기 나타난 경찰에 연행되어 경찰서 복도 의자에 한쪽 팔이 묶인 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쳤을 때, 알라나는 뒤따라 경찰서로 달려온다. 안과 밖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건물 앞에서 건물 유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사람은 대사가 아닌 몸짓으로 대화한다. 표정과 몸짓을 다해 그에게 나오라고 외치는 알라나와 갑작스럽게 풀려나게 된 개리의 어리둥절한 몸짓은 실제 거리가 가까운 것과는 달리 서로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끼게 한다.

3. 엇갈린 시간

영화는 2부로 나뉘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분명한 결절점을 지닌다. 잭 홀든을 연기한 숀 펜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다. 물침대 판매 기념관 오픈 행사에서 물방울무늬가 그려진 연보라색 비키니 의상을 입고 판촉을 했던 알라나는 개리가 또래 여자 친구와 어울리며 자신을 소원하게 대하자, 그에 대한 보복처럼 길에서 모르는 남자와 키스를 나누고는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대로 귀가한다. 알라나의 모습에 경악해 방문을 두드리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알라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던지는데, 그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장면이 서서히 전화되기 시작한다. 특히 사운드의 페이드인이 이뤄지면서 정체 모를 남자의 목소리가 화면을 장악한다. 목소리의 주인은 숀 펜으로, 이것이 그의 첫 등장 장면이다. 알라나가 잭 홀든의 상대역을 뽑는 오디션에 참여해 서로 대사를 주고받는 상황은 맥락 없이 갑자기 등장하며, 처음에는 오디션 대사라는 사실마저 드러나지 않았다.

페이드숏은 시간의 경과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마저도 불분명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개리와 어울리던 알라나가 그보다 훨씬 나이 든 남자와 함께 등장할 때, 마치 소년이 잠깐 사이에 노인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알라나는 소년과 나이 든 남자 사이를 오가며 좀처럼 자신의 시간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왝스는 상대방과 사랑의 시간대를 맞추지 못하던 알라나가 비로소 제대로 찾은 상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동성애자로 두 사람의 결합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라나와 개리가 서로를 향해 달릴 때, 그것은 어긋난 시간을 거슬러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팬텀 스레드>에서 알마가 죽어가는 레이놀즈와의 관계를 떠올리며 ‘그가 죽더라도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라도 만날 것’이라 자신한 것처럼 알라나와 개리 역시 지속적인 유예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관계처럼 보인다. 유예되었던 두 사람의 접촉은 키스를 통해 비로소 성사되며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사랑해, 개리”라고 속삭이는 알라나의 목소리를 마지막에 덧붙인다. 이것은 싱크가 맞지 않는 목소리다. 알라나가 개리에게 들려주는 말이지만, 그것은 이미지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나아가 다른 시간대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처럼 들린다. 영화 속에서 보여준 두 사람의 끈질긴 관계가 사랑과는 무관해 보여도 결국 사랑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엇갈림과 유예라는 미끄러짐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랑의 내용이나 실체를 보여주지 않고도 사랑을 보았다고 인식(혹은 착각)하게 하는 중요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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