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촬영상, 의상상, 프로덕션 디자인상 등 4개 부문 노미네이트 소식과 함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신작 <나이트메어 앨리>가 찾아왔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이후 4년 만이다. 영화는 1946년 출간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를 마주하는 관객은 당황할 법하다. 이번 작품은 감독의 전작을 봐온 관객의 기대를 어느 정도 배반한다. 괴생명체나 판타지 요소가 없고, 잔혹 동화로서의 결은 전무하며, 그 대신 예리하고 참혹한 현실이 버티고 서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관심의 초점이 기이한 존재에서 인간으로 약간 옮겨갔을 뿐 그의 세계는 변함이 없다. 길어진 러닝타임, 건조하다 못해 메말라 비틀어진 풍경은 낯선 충격을 안겨준다. 이 글이 <나이트메어 앨리>에 무리 없이 입장하는 데 긴요한 안전판이 되기를 바란다.
<나이트메어 앨리> 속 카니발 서커스 단원의 면면을 보자. 왜소증, 전기를 견디는 소녀, 점성술사 여인, 괴력의 소유자, 닭의 목을 물어뜯는 사나이, 독심술사까지. 하나같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에서는 크게 낯설지 않은 인물들이다. <퍼시픽 림>(2013)은 감독의 선호로 똘똘 뭉친 영화였다. 일본 괴수물과 변신 로봇에 마음을 빼앗긴 아이의 심정으로 영화 전체를 관통해 취향을 부끄러워하는 일 없이 맘껏 펼쳐 보였다. 하지만 이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예외적 사건으로 봐야 할지 모른다. 되돌아보면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2006)에서 이질적 존재는 반인반수를 연상케 하는 판과, 곤충으로 모습을 위장하는 작은 요정들과, 손바닥에 눈을 심어 얼굴에 갖다 대는 괴물뿐이었다. 이외에는 스페인 내전 와중에 딸 오필리아와 자신의 안위를 염려해 정부군 대위의 아들을 임신한, 어쩌면 평범한 인간인 엄마가 있다. 정부군에 반기를 든 저항군과 그들을 돕는 조력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분히 현실에 뿌리를 둔 실체들이다. 인간과 사랑에 빠진 파충류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에서도 주되게 비치는 건 그의 연인 엘라이자(샐리 호킨스)와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이다. 냉전이라는 시대의 공기도 주인공 중 하나였다. 요컨대 감독이 품은, 괴기함을 향한 애호는 그저 거들 뿐 그의 세계는 어떤 영화보다 더 정극에 가까울지 모른다.
프로이트의 환자들
<나이트메어 앨리>도 같은 길을 간다. 카니발 단원들이 등장하는 만큼 영화는 이른바 기인으로 평가될 인물들의 기행을 과시하듯 전시할 것으로 넘겨짚을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은 그러지 않는다. 단원들의 기예에 많은 시간을 들여 주시하기는커녕 최소한으로 다룬다는 느낌이다. 그보다 주인공 스탠턴(브래들리 쿠퍼)이 지닌 욕망이 나아가는 길을 성실하게 쫓아가고 있다고 보는 게 더 합당하다. 그 길목에는 감독의 전작들을 염두에 둔다면 기대할 법한 판타지가 놓여 있을 것 같지만 이마저도 그렇지 않다. 그 자리는 반복돼 나타나는 트라우마의 증상으로서의 잔영이 메우고 있다. 다시 말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이번 작품은 어느 때보다 현실에 더 안착한 인상이다. 이 점은 원작 소설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원작자 윌리엄 린지 그레셤의 소설은 카드마술사 스탠턴과 주변 인물들 속에 비집고 들어앉은, 파멸을 향해 가는 야욕이 더욱 자세히 그려진다. 특히 돈과 성, 살해에 관한 변태적 집착이 눈에 띈다. 거기에 더해 비판적 사고 없이 종교를 신봉하는 무지몽매한 세태와 천박한 자본주의로 도배된 시대가 인간성을 해치는 광경을 풍자한다. 그런 점에서 원작은 사회파 소설에 가깝다. <나이트메어 앨리>는 원작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 가운데 잔가지는 쳐내고 스탠턴을 추동하고 폭주하도록 하는 심리묘사에 더 관심을 둔다. 이번 작품에서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도입부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사랑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와 그 모두를 파괴하려던 괴물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가 주인공인 셈이다.
영화는 스탠턴의 등장으로 시작하고 스탠턴의 얼굴로 끝이 난다. 영화의 시작, 누군가를 살해하고 은폐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묻어주는 것인지 확연히 드러나지 않은 채 스탠턴은 시체를 집 바닥에 묻고서 그 위에 불을 붙인다. 장면은 버스 차창에 기댄 스탠턴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애초 목적했다고 보기 어려운 곳에서 하차한 그는 마침 개장한 카니발 서커스의 공간으로 흘러들어간다. 거기서 점성술사 여인 지나(토니 콜렛)와 그의 남편 피트(데이비드 스트러세언)를 만나면서 그의 평생 생존 기술이 될 독심술을 접하게 된다. 또 사랑하는 연인이자 독심술 공연의 파트너인 전기를 견디는 소녀 몰리(루니 마라)와 운명처럼 가까워진다. 스탠턴과 몰리는 카니발을 떠나 부부로서 전국을 돌며 독심술 공연을 한다. 그들의 공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강령술로 진화한다. 말이 강령이지 사랑하는 존재를 상실한 사람들의 아픔을 이용하여 돈을 편취하는 일에 불과하다. 몰리는 타인의 아픈 기억을 건드리는 이 일이 늘 마음에 걸린다. 욕심은 언제나 화를 초래한다. 카니발에서 한 시즌을 겪어내며 벌어들이는 것보다 둘이서 공연하는 게 더 나은 수입을 보장할 것 같고, 강령술 사기로 더 큰돈을 벌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한번으로 모든 걸 끝내겠다는 스탠턴의 말은 이미 파국을 예고한다. 사기꾼인 스탠턴의 면모는 브래들리 쿠퍼의 전작 <아메리칸 허슬>(2013) 속 FBI 요원 디미를 떠올리게 한다. <나이트메어 앨리>의 이야기도 사기꾼이 성장하고 몰락하는 구도를 그대로 따른다.
범용한 서사임에도 이 영화가 감독의 기호와 부합하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유년 시절 트라우마에서 비롯한 정신적 상흔이다. 원작도 그렇지만 영화도 프로이트의 견해에 충실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프로이트의 환자 같다. 당연하게도 스탠턴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화신이다. 그는 아버지를 증오했고, 점성술사 여인 지나의 남편이자 알코올중독자인 피트에게 실수로 메틸알코올을 건네 죽음에 이르게 한다. 심리학자 릴리스(케이트 블란쳇)에게 스탠턴이 털어놓는 얘기를 듣다 보면 어머니와 바람을 피운 남성과, 아버지와, 피트는 적개와 살인 충동을 자극하는 상징적 친부들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은 스탠턴의 시점에서 세 남성이 ‘죽은 남자의 몸에 핀 검버섯’ 같은 수염을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쓴다. 프로이트는 말실수는 실수가 아니라 욕망의 정확한 발현이라고 했다. 변주하면 스탠턴이 메틸알코올을 피트에게 건넨 것도 실수가 아니라 친부 살해 욕망을 정직하게 실천한 것일 테다. 같은 맥락에서 릴리스나 지나는 어머니와 등치되고, 그녀들과 성교하는 건 어머니를 품으려는 욕망을 충족하는 일이다. 또 이 점이 스탠턴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인이 된다.
리가 스탠턴과 동행하는 악수를 둔 건 그녀도 정서적 곤란을 지녔기 때문이다. 몰리에게 죽은 아버지는 단지 상실이라는 아픔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보호하는 세상의 유일한 존재였던 탓에 아버지의 빈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은 몰리에게 절대적 존재가 될 우려가 컸다. 마침 스탠턴이 독심술로 경찰을 물리쳐 몰리를 구하는 일을 계기로 몰리는 그의 심리적 인질이 된다. 2년이 지나 스탠턴이 몰리에게 흥미를 잃고 그녀를 귀찮게 여기며 하대하는 게 버릇이 됐어도 그녀는 스탠턴에게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릴리스라고 정신이 온전할 리 없다. 상담사로서 스탠턴의 심정을 헤아리는 위치에 서 있지만 감추었던 내면을 그에게 간파당하기도 한다. 그가 독심술로 판단한 그녀의 처지는 외동딸로 길러진 후에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외롭게 버티고 있는 삶이다. 그녀의 백 속에 든 물건은 연약한 속내를 감추려는 의지의 표명이자 스스로 강하다는 다짐을 흩트리지 않기 위해 지니는 부적과 같으며 영화 후반부 스탠턴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부유하는 기인의 형상
프로이트의 환자들 같은 인물들을 이유로 <나이트메어 앨리>를 프로이트로 독해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1946년에 나온 소설에 차용된, 지금은 사회과학이라기보다 일종의 사상 정도로 취급받는 프로이트 해석을 감독이 재차 강조하려 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 이번 작품에서 그가 택한 괴수의 부류가, 또 괴수를 이루는 내외부의 형상이 프로이트식의 인물로 그려졌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물들의 부도덕한 면을 보면 불쾌한 감정이 들 테지만 한편으로 그들을 통해 달콤한 욕망을 은밀히 동경하는 우리의 종잡을 수 없는 심연 속 광기를 재현하는 것에 가깝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전 작품들에서 스페인 내전이나 냉전으로 대변된 시대의 공포가 반인반수, 손바닥 눈 괴물, 파충류 등의 기형으로 투영됐다면, <나이트메어 앨리>에서는 스탠턴을 필두로 릴리스와 몰리, 그리고 강령술에 기꺼이 참여하는 사람들의 스산한 심리가 기인을 형상화한다.
따라서 이번 작품이 전에 없이 현실에 직접 가닿고, 판타지 없는 정극의 꼴을 갖췄다 하더라도 감독이 만든 세계의 연장선으로서 본질은 변함이 없다고 할 만하다. 영화의 마지막, 기꺼이 기인이 되기를 종용하는 또 다른 카니발의 단장 앞에서 허탈하거나 체념한 듯한 웃음과 함께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걸요”(I was born for it)라고 답하는 스탠턴의 말은, 이 세상은 악마가 사는 지옥이고,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키워낸 기인의 형상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어떤 영화는 기인의 형상을 혐오하거나 기피하게끔 유도해 현실의 부조리를 직시하도록 이끌고, 다른 영화는 우리야말로 기인이라고 역설하며, 때때로 영화 속 기인의 형상이 우리를 매혹하려 손짓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는 이 모두에 해당한다. 관객인 우리는 그가 창조한 기인의 형상에 끌리지 않을 때가 없고, 납득 못하는 일도 없다. 기인을 꺼리면서도 기인이 되고 싶어 하며, 기인의 형상을 훔쳐보다 어느새 기인이 되어 있다. 그러니 영화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스탠턴이 겪은 정도의 삶의 굴곡을 거치지 않는 한 우리는 스스로 기인이라 인정하는 일이 좀처럼 없기에 그렇다.
<나이트메어 앨리>의 비하인드 스토리
닮은꼴인 두 사람
원작 소설의 작가 윌리엄 린지 그레셤의 삶은 영화 속 스탠턴과 묘하게 닮았다. 그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평생 알코올중독과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나름 힘든 시기를 이겨내려고 여러모로 노력한 흔적도 있다. 정신분석, 마르크시즘, 기독교, 심령술 등에 심취했던 건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고 이는 소설에도 반영됐다. 1946년 <나이트메어 앨리>가 출간되고 부와 명성을 얻으며 성공하는 듯했지만, 끝내 심적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1962년 소설 집필을 위해 자주 방문했던 맨해튼의 한 호텔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두 번째 영화화
소설은 1947년에 이미 한 차례 영화화된 적이 있다. 국내에는 ‘악몽의 골목’ 또는 ‘악몽의 뒤안길’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액션배우 타이론 파워가 주연을 맡았고, 미국 클래식 누아르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