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스테인 고르데르의 저작 <소피의 세계>를 예상한 관객은 당혹스러울지도 모른다. 이제한 감독의 장편 데뷔작 <소피의 세계>는 해당 소설에서 제목만 빌려왔다. 대신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부터 <도망친 여자>까지 꽤 긴 시간 홍상수 감독 영화의 스탭으로 참여했던 이제한 감독은 그러한 경력에서 비롯된 영향을 구태여 숨기지 않는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의 세계 역시 홍상수의 근작들이 지닌 느긋하고 소박한 자세를 품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소피의 세계>는 2020년 가을날, 주인공 소피(아나 루지에로)가 서울을 방문해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눈 짧은 며칠간의 여정을 담는다. 간소한 시놉시스의 이면에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각 인물이 달리 경험하는 시차, 개별 에피소드 사이로 틈입하며 아귀를 맞춰나가는 이야기의 단서들이 엿보인다. 영화가 시작하면 수영(김새벽)이 거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본다. 그의 보이스 오버가 덧입혀지면서, 지지난해 수영의 집을 방문했던 소피가 그때의 일들을 블로그에 적어놓았다는 정보가 제시된다. “그녀가 뭐라고 썼는지 궁금해 하나씩 읽어보기로 했다”라는 대사와 함께 2년 전 그날들이 떠오른다.
블로그의 시간을 따라 2020년 10월로 돌아간 영화는 첫 장면에서 수영이 앉았던 테이블로 걸어와 앉는 소피를 비춘다. 며칠간 방을 내어준 수영과 그의 남편 종구(곽민규)에게 좋은 인상을 받은 소피는 헌책방에서 일하는 주호(김우겸)라는 남자를 찾으려는 한편, 오랜만에 만난 친구 조(문혜인)와 옛 시절을 추억하며 북촌의 이곳저곳을 탐방한다. 영화는 이따금 괴롭고 또 이따금 즐거운 범상한 일상을 좇으며, 찾기를 포기하려는 찰나 맞닥뜨리게 되는 소소한 희망을 두둔한다. 형식적으로 소피의 당시와 수영의 지금을 병렬하는 영화는 각자의 주관적인 기억과 경험이 미치지 못했던 흔적들을 뒤늦게 포섭하는 체험의 일기를 적어 내려간다. 예컨대 산책 도중 핸드폰을 깜빡해 다시 집으로 돌아간 소피는 우연히 방에서 부부가 오열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왜 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도 마음이 아플 정도였다. 이유가 있겠지. 누구나 힘들 때가 있으니까”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우는 순간을 그저 내버려둔다. 소피가 그날 집에 들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수영은 블로그를 읽으며 그날 종구와 울게 된 정황을 복기한다. 난데없는 상황을 목격하고도 짐짓 그들의 현장을 방해하지 않은 소피의 배려를 수영이 이제야 깨달은 것처럼, 소피의 기록은 지금의 수영에게로 접속해 가려졌던 과거를 소환하거나 현재의 정동을 보충한다.
그러나 <소피의 세계>는 인물들의 시간을 교차하거나 엉키도록 만드는 등 형식적으로 복잡한 모험을 꾀하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판형과 색깔의 책들을 한 책장에 가지런히 꽂듯, 각 에피소드를 단정하게 이어 붙이는 투명한 영화에 가깝다.
<소피의 세계>를 이루는 여러 레이어 중 집에 관한 화두는 특히 유념해볼 만하다. 영화에서 자주 언급되는 수영 부부의 집은 이야기의 주요 무대이자 많은 이들이 드나드는 공간이다. 수영과 종구는 급하게 집을 빼야 하는 데서 생긴 오해 때문에 다투고, 부부가 외출한 사이 홀로 남은 소피는 신경질적인 집주인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더욱이 이 집은 심지어 배역 이름마저 같은, <도망친 여자> 속 수영(송선미)의 집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두 수영이 인왕산이 내다보이는 창문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 집을 거점으로 모종의 다중우주가 생성되고 있는 것만 같다는 인상도 든다. 작금의 한국 독립영화를 이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배우들의 출연에도 눈이 간다. 김새벽, 곽민규가 열렬히 싸우면서도 서로를 지극히 아끼는 귀여운 부부를 연기했으며, 서영화, 문혜인, 신석호, 김우겸 등도 이 세계에 동참해 근사한 앙상블을 선보인다.
CHECK POINT
배우 아나 루지에로
주인공 소피 역을 맡은 아나 루지에로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캐스팅되었다. 루지에로가 한국 노래를 부르는 클립을 보게 된 이제한 감독은 곧장 미팅 약속을 잡았다. 그가 노래하는 모습은 영화에도 짤막하게 등장한다.
마스크
‘코로나 시국’을 자연스럽게 반영한 작품들이 늘어난 요즘, <소피의 세계>의 인물들 또한 마스크를 착용하고 등장한다. 낯선 이를 만날 때의 불안과 설렘을 동시에 지닌 기호로서 마스크는 여행자의 감각과도 상통하는 오브제다.
홍상수가 떠오르는 장소들
<도망친 여자> 수영의 집뿐만 아니라 <북촌방향>이 떠오르는 북촌의 풍경들, <풀잎들>에 등장했던 ‘카페 이드라’ 또한 많은 시네필에게 의심의 여지없이 홍상수의 영화들을 환기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