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김기영의 <양산도>(1955)의 유실된 마지막 장면에는 무덤이 갈라지고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두 주인공이 승천하는 모습이 묘사된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지만, 그렇게 무덤은 기록되지 않고 사라져버린 영화의 표상과 연관을 맺는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이름 없는 무덤의 옆자리에 또 다른 영화적 무덤을 세우는 기획처럼 느껴진다. 삶의 심지를 불태우는 강렬한 무덤이 스크린에 세워진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무덤의 영화다. 김상현 성우의 목소리가 안내하는 도입부의 끝자락에서 관객은 펜스에 가로막혀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무덤과 ‘꽃분이’라고 적힌 비석을 마주한다. 낫을 든 남자가 다가와 무덤 주변의 잡초를 정리하는데, 그가 누구이고 무덤의 주인과 어떤 관계인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 무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구체적인 연고가 밝혀지지 않는 데다 그 자체로는 특별한 위상을 차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익명의 무덤에 다가서는 영화의 절차를 외면할 수 없다. 지난 세기의 수많은 서부극이 시도했듯이, 혹은 웨스턴의 풍경을 전유해 빈민가 하층민의 기록에 위엄과 품위를 투사한 페드로 코스타의 작업이 보여주는 것처럼 무덤과 묘비를 비추는 것은 인간 공동체를 조망하는 영화의 주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인간의 흔적이 깃든 장소와 그 땅을 오가던 집단적 군중을 가리키는 물리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카메라에 드러난 무덤은 장소에 깃든 그런 시간의 지층을 암시한다. 영화의 내레이션이 말하는 것처럼 “이곳의 진짜 주인은 이 무덤들”이다.
장면이 바뀌면 영화는 등을 돌리고 누운 한 사람의 몸을 비춘다. 가로로 넓게 뻗은 시네마스코프 화면 한가운데를 차지한 잠든 신체가 둥근 무덤의 형상처럼 스크린에 나타난다. ‘뺏벌’이라 불리는 의정부 미군 기지촌 마을에서 미군 위안부로 40년 넘게 살아온 박인순이라는 인물이다. 폐허가 돼버린 기지촌은 재개발 계획으로 인해 철거를 앞두고 있고, 그녀는 폐지를 주우러 매일 그 골목을 돌아다닌다. 무덤을 비추던 카메라는 박인순에게로 시선을 옮겨간다. 마치 정해진 순서처럼, 무덤에서 걸어 나온 자를 따라가듯이.
이름 없는 것들
이 영화의 공동 연출자인 김동령과 박경태는 기지촌 일대와 그 장소의 기억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영상에 담아온 신실한 기록자다. 박인순이 출연자로 나온 그들의 전작(<거미의 땅> <나와 부엉이>)과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 주기적으로 삽입되는 DV 캠코더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두 사람은 오랜 기간 박인순의 곁에 있었고, 이 인물의 굳건한 신체와 표정을 카메라에 기록해왔다. 하지만 그들의 다큐멘터리는 단순히 한 인물을 증언하는 기록으로 향하지 않는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가리키는 대상은 일관된 체계로 정리되는 개인의 생애사가 아니라 역사의 거대한 공백 지점이다. 카메라는 박인순과 기지촌의 기억을 담아내지만, 그러나 기억을 목격하고 증언을 경청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영화는 그 기억의 틈새로 불가능한 기억의 결합을 투사한다. 아버지에게 버려진 뒤 이름과 나이도 모른 채 죽은 여자의 신원을 빌려 살아간 박인순의 기억과 재개발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이름 없는 뼈다귀들의 역사를 결합하는 것이다.
부재하는 기록과 대상을 스크린에 도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망각을 넘어서는 영화의 의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박인순은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멈추지 않고 자신이 겪은 끔찍한 체험을 말하고, 그것을 그려낸 그림들을 소개하는데 들쑥날쑥한 증언과 낯선 형상의 그림으로는 정당한 기억의 이미지를 구획하기 쉽지 않다. 그녀의 말과 그림은 카메라를 든 자들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박인순이라는 개인의 삶과 기지촌에 머물다 떠나간 이름 없는 여성들을 관류하는 침묵의 역사는 귀신과 저승사자들이 벌이는 연극적 제의로 재구성된다. 이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국가배상 소송을 위한 실태조사를 하러 박인순을 찾아온 교수와 미술 작가의 이야기가 앞부분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절반에는 기지촌을 맴도는 귀신들과 그들을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저승사자들의 이야기가 덧붙는다. 영화는 그렇게 현실의 신체와 아카이브 기록을, 다큐멘터리의 대상과 추상화된 제의를 교직하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을 드러내려는 표상에의 접근을 감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라는 작업은, 사라지고 누락된 자들의 이야기를 불러들이는 영화적 귀신 들림의 사례라고 부를 수 있다.
이름 없는 무덤과 수습되지 않은 뼈다귀들. 이는 ‘지루하게 반복’되었다고 이야기되는 기지촌에서의 말소의 흔적을 증명한다. 기지촌 여성들은 현실에서 비참하게 죽었고, 그 시신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고 야산에 버려졌다. 망자의 이름을 부르고 장례를 치러 저승에 보내는 절차가 사라진 자리엔 거주할 곳을 찾지 못한 귀신들이 나돈다.
새로운 전시를 준비하는 젊은 미술 작가는 카메라를 들고 기지촌 거리와 그 외곽을 배회한다. 그녀는 기지촌 골목과 박인순의 구술을 “장소와 기억에 관한 재밌는 작업”의 일환으로 접근하고, 버려진 장소인 ‘뉴웨이브 클럽’을 발견하고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폐허의 경이로움”을 느끼며 “다른 작가가 이곳을 발견하기 전에 작업을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 장소에 남겨진 것은 ‘재밌는 작업’도, ‘시간이 멈춘 듯한 경이로움’도 아니다. 그곳에 발을 들인 미술 작가의 카메라를 맞이하는 것은 시간을 거슬러 도래하는 귀신의 출현이다. 천연덕스럽게 문턱을 넘어 걸어나오는 꽃분이 귀신은 기존의 형식을 폭파하고 전과 다른 영화로 안내한다. 닫힌 문을 열고 귀신이 나타나자, 세명의 탐색자(영화감독, 대학교수, 미술 작가)가 세명의 저승사자로 뒤집혀 교체되는 것이다(김아해 배우는 미술 작가와 저승사자 중 한명으로 1인2역을 한다).
귀신이 모습을 드러내 화면 안으로 침범하자, 미술 작가는 그 바깥으로 도망친다. 갑작스럽게 픽션의 성질이 전환되는 것처럼 보인다. 흔히 쓰이는 표현대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나든다고 지적하는 것은 쉬운 말이다. 하지만 이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범주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무책임한 말이기도 하다. 변중희와 김아해 배우가 교수와 미술 작가로 출연하는 영화의 전반부는 부분적으로 다큐멘터리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지만 연출된 픽션의 장면임을 숨기지 않는다. 이 픽션은 박인순의 말과 그림에, 기지촌의 무덤과 뼈다귀에 접근하지 못하는 실패의 기록으로 끝난다. 그래서 죽은 자들과 저승사자들이 떠도는 두 번째 픽션의 형식이 틈입한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의 구성은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넘나든다기보다는 박인순이 고수해온 삶의 양식에 부합하는 픽션의 형태를 모색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덤 같은 모습으로 몸을 웅크려 잠들고, 카메라 앞에서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그 경험만큼이나 기이한 그림으로 표현하는 한 사람의 표현방식에 대응하는 영화적 형식을 고안하는 것이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 클럽에 나타난 꽃분이 귀신들이 한장의 사진을 들여다볼 때이다. 그것은 미군 병사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한 윤금이의 현장 사진이다. 하얀 가루로 얼굴 일부가 가려진 채 벌거벗겨져 끔찍하게 난도질당한 여성의 신체가 사진에 담겨 있다. 이 신체는 물리적으로 살해되었고, 또한 살인 사건을 다루는 담론장 내부에서는 ‘민족의 순결한 딸’이라는 터무니없는 명명이 들러붙어 정당한 이름과 얼굴을 박탈당하는 이중의 훼손에 직면했다. 이 영화는 윤금이의 벌거벗은 신체가 담긴 사진 이미지를 금지하지 않고 직면케 한다. 훼손된 신체의 이미지 위로 속삭이는 귀신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면서 말이다.
이 장면은 꺼림칙한 이미지를 금기하는 데서 도덕적 만족을 얻는 피상적인 진단을 거부하고 이미지에 내재된 표상의 권리를 회복한다. 죽은 자의 신체는, 그것이 찍힌 사진 이미지는 금지되지 않고 우리 눈앞에 되돌아왔다. 다른 것이 아닌 사지에 피를 두르고 난도질당한 끔찍한 시체의 형상 그대로. 부정적인 이미지도, 올바른 이미지도 아닌 그저 하나의 이미지로 되돌아온 것이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이 잔혹한 이미지를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잔혹한 이미지를 마주해야만, 감독에게 “영화에서 남편의 목을 잘라 머리를 끌고 가고 싶다”고 건의한 박인순의 상상적 이미지가 성립된다고 역설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이미 실현된 잔혹한 역사의 옆에 실현되지 않은 가상의 역사를 병치시킨다. 두개의 절단된 시체를 나란히 배치하는 결합을 통해 영화는 비참한 역사가 되돌아온 자리에서 잠재된, 현실에 불려오지 못한, 기억되지 않은 역사의 시간을 꿈꾼다.
잠들지 않는 몸
저승사자들은 박인순을 보고 꿈을 꿀까봐 잠들지 않는 여자라고 말한다. 꿈에서는 아마도 과거의 끔찍한 체험이 찾아올 것이다. 자기 생애를 이야기하는 박인순의 구술은 합리적이고 정연한 언어로 개인이 입은 폭력의 피해를 규정하는 대학교수에 의해 일관성 없고 앞뒤가 맞지 않는 중구난방의 기억으로 취급되지만, 꿈속에서 끊임없이 솟구치는 기억의 이미지는 분명히 박인순의 현실을 계속해서 붙잡고 잠 못 들게 한다. 박인순의 꿈은 현실만큼 물리적이고, 삶보다 죽음의 질감에 가까이 있다.
영화의 후반부가 죽은 자들이 떠도는 공포영화의 외양으로 펼쳐지는 까닭도 이와 멀지 않다. 망자를 데려가는 저승사자의 이야기는 이름 없이 사라져간 기지촌 여성들의 ‘집단적인 악몽’(로빈 우드)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호러나 판타지 장르의 표현으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언급한 것처럼, 잠들지 않는 박인순에게 현실은 악몽과 같은 밀도를 갖는다. 기지촌을 배회하는 죽은 자들은 현실의 잔여물이다. 폐허 같은 골목과 버려진 클럽에서 귀신과 저승사자들은 쓰레기가 된 사진과 물건에 부여된 만큼의 중력을 획득한다. 이는 또한 혼자 영화관에 가는 걸 좋아하던 박인순이(어둠 속에서라면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되찾은 거대한 암실이기도 하다.
고통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과거에 지워지지 않는 체험이 벌어졌던 장소에서 대항적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벌거벗겨져 난도질당한 시체의 사진을 찍고, 시체가 사라진 폐허에 와서 다시 사진을 찍는 저들의 기록을 우리의 것으로 되돌려받는 것이다. 박인순은 튼튼한 두 다리로 골목을 걸어다니다 저승사자와 귀신들이 머무는 클럽에 찾아온다. 버려진 사물들과 낡은 사진으로 가득하던 클럽은 귀신과 저승사자와 실존 인물이 뒤얽혀 당구를 치고 춤추고 노래하는 영상의 혼란이 폭발하는 현장으로 거듭난다. 카메라는 이 되살아난 광경을 수평 이동하는 트래킹으로 훑으며 한 테이크에 담아낸다. 이는 앞서 미술 작가가 이곳에 찾아왔을 때 멈춰 있던 사물과 벽면에 붙은 사진들을 보여주던 것과 같은 움직임이다. 사람과 화폐를 교환하는 기지촌 골목의 규칙을 빌려 훼손되고 방치된 사물의 이미지를 유희적 활력의 기록으로 뒤바꾸는 전술이 펼쳐진다. 그런 점에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이름 없이 버려진 사진, 또는 기지촌을 흥밋거리의 대상으로 촬영하는 카메라와 대비되는 영상의 정당함을 탈환하려는 기획이다. 이 기획의 절정은 말할 것도 없이, 남편과의 첫 만남을 그의 머리를 잘라내는 순간으로 전환하는 박인순의 연출이다.
두 연출자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발터 베냐민에 따르면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경험을 나눠주는 기술이다. 이야기는 한 사람의 작가가 구상하는 소설과도 다르고,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는 소식과도 그 성질을 달리한다. 이야기는 복수의 이야기꾼들이 주고받는 (목)소리의 나눔으로 이어지고 또 연결된다. 이야기는 그러므로 어느 한 개인에 귀속되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공통의 경험으로 사라지지 않고 전승된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의 귀신과 저승사자들이 벌이는 재연과 연극적 퍼포먼스에도 이야기를 공유하려는 목소리와 속삭임들로 즐비하다. 세명의 저승사자들이 기지촌 여기저기서 들은 것을 뒤섞어 만들어내는 진부한 이야기, 자기들을 훔쳐보는 시선을 피해 속삭이는 ‘꽃분이’ 귀신들의 귓속말, 영화 전체를 감싸는 서로 다른 내레이터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교통하며 화면을 어지럽힌다. 이러한 목소리들은 인물과 장소가 사라진 뒤에도 숏에 맴도는 감각으로 잔존한다. 베냐민이 파스칼을 인용하며 말한 것처럼 “누구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만큼 빈곤하게 죽지는 않는다".
벌어진 입
이미지의 권리를 탈환하려는 장대한 기획의 끝에 박인순이 자기 죽음에, 자신의 무덤에 도달하려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과격한 결합과 표현을 감행하던 영화는 마지막으로 현실에 침입한 죽음의 이미지를 되돌려 죽음에 침입하는 현실의 이미지를 구현하려 든다. 그렇게 저승사자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의 잘린 머리를 끌고(나머지 뼈와 살은 고아 먹었다고 한다) 기지촌 골목을 배회하던 두 다리를 이끌고 저승으로 향한다.
죽음으로 향하는 문턱에서 박인순은 저승사자와 맞닥뜨린다. 오랜 시간 침묵으로 일관하던 박인순이 마침내 입을 열고 소리를 내뱉는다. 벌어진 그녀의 입이 깊고 어두운 ‘구멍’으로 스크린에 새겨진다. 그 구멍으로부터 발작적인 비웃음과 고통스러운 신음과 비명을 오가는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름 없는 뼈다귀들과 수많은 ‘꽃분이’들의 목소리가, 모든 이들의 역사가 박인순의 입에 들어오고 나간다. 그렇게 영화는 프레임을 초과해 금기된 음성들을 스크린에 불러들인다. 그곳은 도입부의 ‘꽃분이’라 적힌 비석처럼 정해진 이름이 없어 죽은 자들 모두가 침투하고 사라질 권리를 얻은 또 다른 무덤과도 같다. 공존할 수 없는 수많은 망자의 기억이 기지촌 여성들의 “지루하고 반복되는 이야기”를 폭파하려는 박인순의 입안으로 모여든다. 갈 곳을 잃어버린 무명의 망자들을 불러들이고 흩뿌리는 장소, 영화가 구축한 스크린의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