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드디어 감독이 되어 돌아왔다. 환갑을 2년 앞둔 나이에 장편 연출 데뷔작 <뜨거운 피>를 세상에 내놓은 천명관 감독은 소설가이자 시나리오작가로 오랫동안 감독 데뷔를 준비해온 충무로 칠전팔기의 주인공이다. 1990년대에 시나리오작가로 충무로에 처음 발을 들인 이후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각색, <북경반점> <총잡이> <이웃집 남자> 등의 각본, <고령화가족>의 원작 소설을 쓰기도 했던 그는 지금껏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김언수 작가의 <뜨거운 피>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감독 데뷔를 하게 되었다. 더불어 2019년에 촬영을 마쳤음에도 코로나19로 개봉이 2년여 밀리면서 한국영화 역사상 최고령 신인감독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이 모든 상황이 천명관이란 사람,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와 어울려 보인다. <씨네21>이 작가 시절의 그를 마지막으로 인터뷰했던 때는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출간했던 2016년이었다. 그때를 기억하고 있던 그는 <뜨거운 피> 언론시사회 현장에 인터뷰용 의상을 한벌 들고 왔다. “수년 전에 그리스의 옷가게에서 득템한 셔츠인데 언젠가 감독 데뷔하면 꼭 이 셔츠를 입고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문예지도 안 불러주는 나를 소설 출간할 때마다 만나주는 <씨네21>”을 향한 고마움과 감독 데뷔의 기쁨을 모두 담은 셔츠 같았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이스턴 프라미스> 포스터가 큼직하게 프린트된 셔츠를 입고 누아르 장르를 향한 오마주라며 손까지 똑같이 포개 촬영에 임하는 그의 모습에서 첫 영화를 세상에 내놓은 신인감독의 설렘이 오롯이 전해졌다. 김언수 작가가 <뜨거운 피>를 집필하기 이전부터 소설에 관여해왔고 또 영화화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그는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 시나리오작가, 소설가, 그리고 드디어 영화감독이라고 불리게 됐다. 오랫동안 연출 데뷔를 준비해왔던 터라 첫 영화를 대중에 선보이는 마음이 남다를 것 같다.
= 그동안은 영화인이 아니면서 <씨네21>과 여러 차례 인터뷰를 했다면 이제는 진짜 내 영화를 가지고 인터뷰하게 되니 긴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지는 느낌이다. 역시 인생은 알 수 없는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든다. 30대 때 충무로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내가 어려 보인다는 거였다. 왠지 감독 같지 않고 문학 하는 작가 같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런데 몇년 후에 정말 작가가 됐다. ‘어, 영화인들이 보는 눈이 있나?’ 싶었다. 한창 연출하고 싶어 하던 당시에는 내가 왜 감독을 못하고 있는지 그 실패 요인을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에서 찾아보곤 했다. 그런데 최근에 모 잡지 촬영을 할 때 관계자 한명이 나에게 누가 봐도 감독처럼 보인다는 거다. 내 나이 환갑이 다 되어서야 감독 같아 보인다는 말을 듣다니. 이제야 감독할 때가 된 건가 싶기도 했다. 감독을 처음 꿈꾼 때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다.
- 개봉 시기를 조율하던 때에 코로나19가 터지면서 2년이나 개봉이 밀렸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나.
= 말 그대로 절차탁마의 시간이었다. 소설로 치면 퇴고의 과정을 거쳤다. 계속 갈고닦았다는 말인데, 괴로운 시간이었다. 빨리 개봉하고 끝내야 홀가분한데…. 2년 전에 개봉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버전의 영화를 선보였을 수도 있다. 무엇이 나은지는 알 수 없다.
- 카카오 페이지를 통해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연재했을 때가 2016년이다. 그때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뜨거운 피>의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고 알렸었다.
=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는 내가 30대 때부터 직접 연출을 하고 싶어 구상했던 이야기다. 연재 이후 원고를 정리하려고 그리스에서 석달 정도 체류 중이었는데 김언수 작가로부터 <뜨거운 피> 초고가 완성됐다는 연락이 왔다. 나보고 연출을 맡아달라면서. 이 영화의 제작자와 김언수 작가, 나 셋이서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고 소설이 쓰이는 과정에서도 작가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김언수 작가에게 ‘희수’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라고 권한 것도 나였고.
- 천명관 작가를 감독으로 이끈 무언가가 <뜨거운 피>에 담겨 있을 것 같다. 소설에서 무엇을 보았나.
= 소위 한국의 건달, 조폭영화의 역사가 오래됐지만 내심 못마땅한 게 있었다. 인물들의 먹고사는 문제가 잘 보이지 않았다. 거대 조직이 등장하지만 양복 차려입고 승용차 몰고 다니면서 하는 일, 그러니까 돈의 흐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돈 버는 일이 이들의 전부일 수 있을 만큼 중요한데 말이다. 과거에도 자주 했던 말이지만 돈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야말로 진짜 어른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김언수 작가의 <뜨거운 피>에는 그게 있었다. 누군가는 빨래 공장을, 포장마차를 운영하면서 어디에 돈을 내고 누가 뭘 관리하는지 등 아주 디테일한 이야기에 믿음이 갔다.
- 김언수 작가에게 희수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라고 권했다는 건 무슨 말인가.
= 어느 날 김언수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부산 건달들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그가 자란 부산 완월동 주변의 이야기였다. 영화와 소설의 배경인 구암이 모티브로 삼고 있는 송도, 감천항, 서면, 남포동, 영도쪽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다. 한번은 김언수 작가가 나를 데리고 <뜨거운 피> 투어를 시켜준 적도 있다. 구암을 둘러싸고 신항만이 건설되면서 거대 세력인 남 회장 무리의 라인이 막혀버리고, 그가 구암의 항구를 먹어버리려 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곁들여서 들려줬다. 소설 속 구암의 항구는 감천항이 모티브로, 실제로 그런 곳들을 다녔다.
- 누아르영화에서 장소는 또 하나의 캐릭터로 작용한다. 한국 건달영화 계보에서 항구도시의 역할도 중요한데 극중 배경인 가상의 공간 구암을 어떻게 보여주고 싶었나.
= 아주 험블한 이미지, 녹슨 쇳덩어리 같은 이미지를 떠올렸다. 실제로 포구에 가보면 거대한 녹슨 닻을 쉽게 볼 수 있지 않나. 그게 구암이라고 생각했다. 출렁이는 파도와 굵은 밧줄의 이미지. 영화가 시작하면 희수가 차를 몰고 가는데 고래를 잡은 어부들의 모습, 포장마차에서 주인아주머니가 걸어나와 희수에게 무언가 부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장면들의 배경에서 구암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사실 그보다 전경 전체를 보여주는 신이 더 있었지만 편집 과정에서 많이 덜어냈다. 뭘 얻으려고 하면 잃는 게 있고 그렇더라.
- 실제 촬영도 부산 서구를 중심으로 했나.
= 1990년대 사회상이 남아 있는 도시, 공간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한국의 도시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굉장히 빨리 변하다 보니 도로 표지판부터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로케이션 촬영지를 찾는 데 애먹었고 부산 서구를 비롯해 김해, 진해, 기장, 울산, 포항 심지어 목포까지 다양한 바닷가 도시를 오가며 촬영했다.
- 원작 소설은 “구암의 건달들은 아무도 양복을 입지 않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문장만으로 구암이란 공간, 그곳에서 사는 건달들의 캐릭터가 한눈에 그려진다. 의복은 건달들의 경제적 상황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도 담아낸다. 읍소하는 두목, 손 영감이 추구하는 건달의 자세도 담고 있다. 이 문장이 영화에서 어떻게 묘사될까 궁금했는데 정반대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즉, 영화의 첫 장면은 희수가 양복을 입은 채 배 위에 올라탄 모습이다. 의도한 배치인가.
= 시나리오상에선 희수가 누런 점퍼를 입고 등장하는 모습이 첫 장면이었다. 지금처럼 영화의 결말부에 해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희수가 양복을 입기 이전의 모습으로 시작해서 시간순으로 장면을 배치하고 싶었으나 편집 과정에서 김창주 편집감독이 지금의 오프닝 신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편집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오프닝에 만족해했다. 시나리오상의 오프닝보다 몰입감이 더 생기고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설의 첫 문장이 지닌 힘도 중요하다. 그 문장이 탄생하는 데 나 역시 상당 부분 일조했는데 영화 안에 그 문장의 의미, 건달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잘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 소설에서 묘사하는 희수와 영화가 그리는 희수, 즉 정우 배우가 연기하는 희수 캐릭터가 미묘하게 달라 보인다. 희수에 대한 해석, 견해가 작가와 감독이 다를 수 있는데 영화에 담고 싶었던 희수는 어떤 인물인가.
= 소설 속 희수는 작가의 어떤 고백적 자아 같은 느낌이 강하다. 내면적이고 쓸쓸하고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문학적인 인물이다. 영화에서 묘사하는 희수는 행위가 도드라지는 인물은 아니다. 욕심 없이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맡기는 인물이다. 아련한 추억을 곱씹으며 사는 인물로 바뀌었다. 희수 역을 맡은 정우는 원작 소설을 일부러 읽지 않았다.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슬프면 눈물 흘리는 스트레이트한 캐릭터를 보여줬다. 한편으로는 명랑해 보이는 기운까지 느껴지는 정우의 희수가 훨씬 영화적인 캐릭터라고 느꼈다.
- 누아르 장르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것 같다.
= 내게 누아르란, 뭣도 아닌 인간들이 뭘 좀 해보려다가 결국 뭐가 되어버리는 이야기다. 늘 누군가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내가 좋아하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나 <칼리토>, 아벨 페라라 감독의 <악질경찰> 같은 영화들이 전부 그러하다. 승리극이 아니라 결국은 모두가 떠나고 모든 것이 허깨비처럼 무의미해지고 쓸쓸해지는 이야기. 나는 인간 승리에는 관심이 없다.
- 한편의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단순하게 바라보면 혼자 일하는 것이다. 영화는 결코 혼자 일할 수가 없다. 시나리오를 오랫동안 써왔지만 연출자로서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해보니 어떤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감독의 역할이 자신과 잘 맞던가.
= 나이는 많지만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헤매거나 당황할 때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쓰기는 점 하나 찍는 것까지도 온전하게 혼자 결정하는 작업인데 영화는 전혀 달랐다. 정해진 스케줄 안에서 촬영은 진행되어야 하고 내가 모든 걸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딘가를 향해 흘러가게 되더라. 어떤 때는 많은 걸 내려놓게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뜻하지 않게 생각지 않았던 것을 얻을 때도 있었다. 연출자의 계획대로 모든 게 진행될 수 없는 상황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줄 때 희열을 느꼈다. 장 르누아르 감독이 “촬영장 문을 항상 열어두라”고 말한 의미를 좀 알 것 같았다.
- 그동안 써온 소설을 살펴보면 이소룡이 되고 싶었던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영화화되기도 했던 <고령화가족>의 백수건달과 망한 영화감독, 희화화의 대상이 되는 인천 뒷골목의 조폭 무리가 등장하는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등을 통해 시대의 남자, 혹은 남성성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마침 <뜨거운 피>의 주인공 희수도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지만 그 선택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한다. 계속해서 남성성에 관해 탐구하는 이유가 있나.
= 사실 <뜨거운 피> 이야기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판타지에 가깝다. 사내들끼리 서로 칼질하고 왕이 되려는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공허해 보인다. 남성성을 이야기하니 떠오른 게 있다. 시나리오로 쓰려고 생각해둔 아이템 중에 <귀여워야 산다>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평범한 가장이 귀여워지려고 애쓰는 이야기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이혼당하고 알코올중독자가 돼 죽음을 맞은 친구에게서 “너는 꼭 귀여워져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이 필사적으로 귀여워지려고 애쓰는 코미디영화를 구상 중이다. 요즘의 남성성은 어쩌면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속 남자들이 <뜨거운 피>의 남자들보다 지금 시대와 더 잘 맞지 않나 싶다. 바보 같은 남자들의 이야기이지 않나. 허세, 남성성이란 게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모자란가에 관한 이야기니까. 세상이 변했음을 많이 느낀다.
- 지난 2년 동안 극장산업도 다양한 변화를 맞고 있다. OTT 플랫폼을 통한 드라마도 각광받고 있는데 드라마 연출 제의가 들어오면 할 의향이 있나.
= 물론이다. 2시간 안에 이야기를 풀어내야 하는 영화는 제작비 대비 목표 관객수가 뚜렷하니 대중 지향적이 될 수밖에 없더라. 컨셉이나 주제도 그에 맞는 사이즈가 정해져 있는 듯하고. 반면 드라마로 풀어내는 것이 더 좋은 이야기도 있다. 다양한 인물들을 풀어낼 수도 있고. 훌륭한 이야기꾼들이 드라마로 가기도 하지 않나. 오히려 지금이 기회일 수 있다.
- 바로 이어 차기작 준비를 하나.
=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는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발전시키는 중인데 20명 넘는 인물들이 등장하다 보니 시나리오로 옮기기가 만만치 않다. 그리고 데뷔작으로 만들려고 써뒀던 <코리안 갱스터>도 계속 작업 중이다.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동두천 기지촌을 둘러싼 두 남자의 이야기인데,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쓰는 건 진작에 다 썼고 어떻게 작품을 세팅하느냐의 문제를 풀어야 하는 단계다.
- <고래>의 영상화 작업은 계속 진행 중인가.
=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다른 제작사에서 드라마로 준비 중이다. <고래>를 내가 붙잡고 있다가는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 나는 엄두가 안 나는 작업이니 시간 많고 에너지가 강한 젊은 작가나 연출자가 나서주면 좋겠다. 그나저나 어느 문예지도 내가 신간을 낼 때 인터뷰를 청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씨네21>만이 나를 불러주는데 “그동안 잘 지냈어? 그동안 뭐 했어?”라고 물어봐주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 다음 작품도 찍게 된다면 다시 만나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