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형국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우리가 진실이라 믿는 역사 속에도 목소리가 담기지 않은 사람들은 아주 많다는 사실을 마법처럼 알려주는 영화였다.
대구 경북대학교 인근 대현동 주택가에는 무슬림 유학생과 가족 약 150명이 거주하고 있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건너온 이들 대부분은 석박사 과정의 고학력자들이다. 기계공학 박사인 하룬 칸씨도 그중 한명이다. 한국 교수들이 ‘닥터 칸’이라고 부른다. 이슬람 교리에 따라 하루 4번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사원을 짓기로 했다. 닥터 칸이 “테러리스트”란 소리를 들은 게 이때부터다. “한국은 우리에게 친절한 나라였어요. 사원 공사를 시작한 뒤부터 범죄자 집단이니 냄새가 난다느니 하는 플래카드 문구를 제 딸들이 봐야 했습니다. 정말 가슴 아파요.” 이슬람 사원을 반대하는 한국인 주민들은 동네가 슬럼화하고 범죄가 많아질 거란 이유를 내세우며 공사 진입로를 가로막았다. 1심 법원이 “공사 중지 처분은 위법”이라며 무슬림측의 손을 들어줬지만, 주민들의 항소로 공사는 2년째 중단 상태다. 골목을 지나는 한국인들을 붙들고 의견을 물었다(필자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방송기자다.-편집자). “아무래도 한국인들도 아니고, 쫌 그렇지예.” 무엇이 좀 그렇다는 건지 재차 물었다. “기냥 뭐, 같은 나라 사람이 아이니까….” 어떤 주민은 “집값 때문”이라며 비교적 솔직한 답을 들려주기도 했는데, 좀더 많은 이들의 답은 이랬다. “내는 할 말이 없으예.”
상식적이어서 듣지 못한 목소리
할 말 없는 이들에게 주목할 필요를 느꼈다. 그중에는 이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쪽 편 들지 않았다가 동네에서 비난당하면 골치 아파.’ 반대측 입장이 워낙 격렬하다보니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대화로 해결해보자’와 같은 합리적인 목소리는 한국 주민쪽에서 나오기 어렵다. 할 말이 없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언론은 양쪽 끝에서 분출되는 목소리만 전한다. 무슬림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입장을 가진 언론도 이건 마찬가지다. <뉴욕타임스>는 심지어 ‘한국의 보수적인 도시에서 모스크 분쟁이 일어났다’며, 대구에 대한 선입견이 담긴 문장을 앞세웠다. 갈등이 격할수록 ‘합리적이어서 침묵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사태의 실체가 어디쯤 있는지는 서 있는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 기술도 마찬가지다. 그간 우리가 진실이라 믿어온 역사 속에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는 얼마나 들어 있을까.
‘1960년대 말 아일랜드 종교 분쟁의 틈바구니에 놓인 한 어린이의 이야기’라는 <벨파스트>의 기본 정보만 들은 나는 아일랜드 편에 속한 천주교도 집안의 꼬마를 짐작했다. ‘피의 일요일’ 사태를 다룬 <블러디 선데이>(감독 폴 그린그래스)를 떠올리지 않기도 어려운 일이기는 했다. 9살 버디(주드 힐)네 가족은 북아일랜드에 사는 개신교도다. 흑백논리로 나누자면 중세 이전부터 천주교 중심의 아일랜드를 집요하게 침략해온 ‘잉글랜드 편’이다. 그들은 아마도 수백년 전부터 잉글랜드측이 아일랜드에 이주시킨 개신교도들의 후예일 것이다. 개신교도들은 그렇게 아일랜드 북부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감독 켄 로치)에 나오는 투쟁 과정에서 아일랜드는 1921년 독립했지만 북아일랜드 6개 주는 그래서 영국령으로 남았다. 그곳의 개신교 강경파들은 정치·경제적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집안 종교가 개신교일 뿐 그저 상식을 갖고 살아가는 다수 주민들에게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며 폭력의 일원이 될 것을 강요했다. 진부함을 무릅쓰고 빗대자면 버디네 가족은 이 영화의 흑백 화면 속에 빛을 내는 수많은 회색으로서 경계인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일랜드 대립의 역사에서 좀처럼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들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분쟁, 그리고 정치 양극화의 갈등 속에서 어쩌면 더 많은 이들의 목소리는 묻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힐빌리의 노래>(감독 론 하워드)가 가치 있었던 건, 도대체 백인 하층민들은 왜 트럼프를 지지하는지에 대해 그들의 한가운데서 목소리를 낸 원작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벨파스트>가 다가서려는 자리가 바로 그곳이다. 당시 세계를 휘감던 흑백논리, 즉 냉전의 결과물이기도 했던 달 착륙 이벤트에서 달을 가로지르는 로켓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버디의 말에 할아버지(키어런 하인즈)가 대꾸한다. “그때 로켓이 달 뒤쪽에 가 있어서 그래. 앞쪽에 왔을 때는 네가 밥먹느라 못 본 거야.”
돌봄이 핵심이다
흑과 백은 양쪽 끝의 하나지만 회색들은 그 사이의 무한이다. 이를 증명하듯 <벨파스트>의 시선은 주요 인물 모두에게 고루 깊다. 버디의 아빠(제이미 도넌)는 강경파의 폭동에 위태로운 가족을 둔 채 2주 단위로 런던을 오가야 돈을 벌 수 있다. 할머니(주디 덴치)는 그런 아들이 누구보다 걱정될 테지만 내색하지 않고 손자들 먹일 커틀릿을 만든다. 할아버지는 한때 광부로 일하며 폐 질환을 얻어 살아가지만 오늘도 손자의 연애 상담에 정성이다. 버디가 짝사랑하는 캐서린(올리브 테넌트)도 부모와 함께 신변에 위협을 느낄 테지만 버디의 마음을 헤아리고 친구가 돼주는 의젓한 9살이다. 자신도 모르게 화염병을 옮기는 데 동원되기도 한 형(루이스 매카스키)은 소파에 기대 눈을 붙인 사이 엄마에게 사과하는 아빠의 말을 듣지만 자는 척한다. 동네 누나(라라 맥도넬)는 치기 어린 마음으로 폭력 시위에 동참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을 때쯤 홀로 두렵겠지만, 이 동네엔 그를 안고 위로해줄 어른들이 있음을 관객은 안다. 스치듯 지나칠 때마저 인물들을 섬세하게 배려하는 <벨파스트>의 카메라는, 9살 버디가 어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보고 듣는 중이었음을 촘촘히 알린다. 그런 이 이야기의 중심에 엄마(커트리나 밸프)가 있다.
극장을 나서는데 한 관객이 동행에게 말을 던진다. “엄마가 너무 예쁜 거 아냐?” 예쁜 거 맞다. 감독에게도, 버디에게도, 엄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버디가 자주 보던 서부영화의 주인공처럼 돌조각 하나로 권총에 맞서 이길 수 있는 늠름한 영웅이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영화는 버디의 판타지에만 사로잡히지 않는다. 아빠는 종종 경마로 돈을 잃고 엄마 몰래 세금을 체납하는 사람임을 버디는 안다. 엄마는 세무서에서 우편물이 날아올 때마다 안색이 굳어지고, 아빠와 장거리 통화를 할 때면 복장이 터져 수화기를 내려놓고 흐느낀다. <미나리>의 제이콥(스티븐 연)처럼 아빠는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캐나다나 호주로 떠나자고 보챈다. 하지만 이역만리에서 아는 이웃 하나 없이 아이들을 키울 수나 있을지 뾰족한 수는 그에게 없다. 월세를 독촉하는 아저씨가 찾아오면 엄마는 버디를 잡아끌어 테이블 밑에 몸을 숨겨야 하지만 아빠는 집에 없다. 버디가 동네 누나의 꼬드김에 넘어가 초콜릿을 훔친 일로 경찰이 찾아온 날, 온전히 자신의 응대만으로 사태를 무마시켜야 하는 엄마는 힘겹게 지어낸 웃음을 경찰이 문 밖으로 나가는 그 순간까지 가까스로 유지한다.
버디의 정서를 따라 종종 경쾌하게 처리되는 엄마의 장면들은, 남성들이 주도한 폭력의 인류사 속에 가정과 마을과 사회를 유지하는 토대는 다름 아닌 육아와 돌봄에 있다는 점을 분명한 어조로 전한다. 코로나19로 인한 봉쇄 속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감독에게, 벨파스트의 봉쇄된 골목은 돌봄의 확장 공간이며 현대의 우리가 잃고 있는 그무엇이다. 아빠는 정원 딸린 집에서 아이들이 축구도 할 수 있다며 런던행을 제안하지만 엄마는 온 동네가 다 놀이터이고 이웃 모두 아이들을 예뻐하고 돌봐주는 이 골목을 떠나기 어렵다. 극 종반 한바탕 폭동에서 몸을 피한 가족이 집 안에 모인 장면. 거울을 보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물었다는 엄마의 클로즈업 숏과 세 남자를 쪼르르 앉혀놓은 반응 숏은 이 모든 흑백의 사태 속에서 ‘성찰하는 자’의 위상을 엄마에게 부여한다.
‘아이리시 펀’ 스타일
영화를 안 본 독자라면 꽤나 우울한 작품으로 오해할 수 있겠다. <벨파스트>는 아일랜드 특유의 긍정과 흥으로 가득한 영화다. 버디 엄마의 저 고단함이 화면과 화면이 아닌 화면 사이에서만 느껴질 때, 이 영화를 지지할 수 있을지 잠시 의심했다. 아름답지만 뜻밖에도 빠른 속도로 지나쳐가는 몽타주 시퀀스들을 볼 때도 비슷한 의문이 들었다. 이 영화의 숏수를 그대로 둔 채 상영시간 98분을 110분쯤으로 늘렸더라면 각 장면들의 가치가 더 뚜렷이 보이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오스카 촬영상 후보였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카메라가 장황함과 과묵함의 정중앙점에 있다면, <벨파스트>의 그것은 장황함쪽에 가까워 보이는 대목도 있다. 이 모든 의심을 <벨파스트>는 논리가 아닌 정서로 설득해낸다. 아일랜드인의 콜레스테롤 수치가 1위라는 이모의 잔소리에 “우리가 1등 하는 게 하나쯤 있어도 좋잖아?”라는 이모부의 넉살 같은 것들로 말이다. 종반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불가항력적인 인생사의 진리를 또 한번 깨우친 버디가, 이어지는 장면에서 <Everlasting Love>를 멋들어지게 부르며 춤추는 부모를 바라볼 때 설득당하지 않을 관객은 많지 않아 보인다. 나는 그래서 <벨파스트> 전반에 걸쳐 배어 있는 흥을 ‘아이리시 펀’(Irish fun)이라 이름 붙인 다음 이 영화의 편집 속도 또한 ‘아이리시 펀 스피드’라 여기고는 함께 즐기기로 마음을 고쳤다.
이 영화의 긍정적 정감이 한층 두드러지는 이유는 배경이 비극이기 때문이다. 북미권 매체의 리뷰를 보면, 정확히 9살 아이의 시선만큼만 보여주는 작품이므로 역사적 사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취지의 글도 보인다. 내 생각은 다르다. 마지막 장면을 보자. 할머니는 남고, 버디 가족은 떠난다. 우리는 반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고개를 떨군 할머니의 표정을 상상한다. 그러고는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 그리고 사라진(번역 자막은 ‘행방불명된’) 모든 이들을 위해’라는 자막을 본다. 그렇게 영화가 끝난 후 1998년 벨파스트 협정까지 30년간 3700여명이 숨졌다. 할머니는 어떻게 됐을까. 동네 누나는, 캐서린은, 곱창 샌드위치 먹겠냐고 농담하던 아저씨는 그곳에 남아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전쟁과 폭력과 반목의 아픔을 충분히 아는 한국 관객에게 이 결말의 시점은 예사롭지 않다. 예컨대 한 소년이 1980년 5월17일 광주를 떠나며 끝맺는 영화가 있다면 우리는 극장 문을 나설 때 어떤 감정에 휩싸일까. 그렇게 상영시간 동안 적절한 경쾌함 속에서 버디의 동심에 합류해온 관객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가슴속 버팀목 하나가 무너지는 듯한 회한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재해 속에 내리쬐는 햇살이 종종 잔인하듯 비극의 역사 속에 9살 소년의 눈에 비친 ‘아이리시 펀’은 그래서 슬프다. 1998년 이후에도 갖은 ‘협정’이며 ‘합의’가 있었지만 북아일랜드의 갈등상은 2022년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영국 정부와 유럽연합 사이의 무역 분쟁 속에 북아일랜드의 새우등이 터질 위기다. 오프닝과 엔딩에서 컬러로 비추는 벨파스트 무역항을 보는 현지인들의 마음은, 특히나 브렉시트 이후여서 편하기가 어렵다.
오스카 각본상의 이유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 <벌새>(감독 김보라)의 어휘를 빌리자면 버디는 극중 두 차례에 걸쳐 ‘뽀리’를 친다. 훔친 물건들은 난감하다. 가게에서 엉겁결에 훔쳐 나온 ‘터키시 딜라이트’는 누구도 먹고 싶어 하지 않는 과자다. 폭동의 틈바구니에서 들고 나온 효소세제는 엄마의 격노를 산다. 이들 처치 곤란 상황은 버디에게 개신교냐 천주교냐 하는 문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어려운 걱정거리다. 세무서 우편물탓에 엄마 얼굴이 어두워질 때, 주부의 고민을 해결해줄 것만 같은 방송 광고에 등장한 제품이 효소세제였다. 훔친 세제 상자는 온 가족이 모인 테이블 위에 놓여 버디에게 말을 건넨다. ‘이 세상에는 착한 편이냐 나쁜 편이냐를 가르는 문제보다 훨씬 복잡하고 풀기 힘든 숙제가 많아.’ 이 장면이 앞서 언급한 ‘성찰하는 자’로서 엄마가 독백하는 대목이란 점은 몹시 중요하다.
극 초반 교회 목사의 엄포를 들은 버디는 Y자 모양의 커다란 갈랫길을 그린 다음 ‘좋은 길’과 ‘나쁜 길’을 표시해보지만, 현실에서 그가 다니는 길은 담장 사이 창살을 벌려 만든 아이들만의 지름길이다. 역시 각각 두 차례씩 반복되는 갈랫길 그림 장면과 구부러진 창살 장면은, 버디의 절도 장면들과 함께 세상을 인위적으로 양분한 다음 택일을 강요하는 어른들의 행태를 점잖게 타이른다. <하이 눈>의 삽입곡 <Do not forsake me>(나를 버리지 말아요)가 언제 반복되는지 보자.
엄마가 아빠와 통화하며 다툰 뒤 한 차례 흘러나온 이 노래는 아빠가 강경파 아저씨를 물리친 다음 가족과 동네 누나가 한데 모여 부둥켜 안을 때 다시 흐른다. 노래는 두 장면을 이으며 아빠의 공과(功過)를 껴안는다. 이것이 케네스 브래나 감독이 가족에게 팔을 벌리는 방식이며, 이를 거쳐 나온 각본이 반복과 교직을 통해 밀도 높은 온기를 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역시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 <로마>(감독 알폰소 쿠아론)에서 돌봄 노동자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도 경계인이다. 주요 인물들과 한 집에 살지만 한 가족이 아니다. 이 작품의 영화 속 영화 <마루니드>는 클레오의 제한된 움직임과는 대조되는, 우주 공간에서 틀 없이 유영하는 운동 이미지를 보여줬다. 그렇게 감독의 어린 시절을 되살리는 동시에 ‘제행무상’이라는 영화의 거대한 철학과 만난다. <벨파스트>의 영화 속 영화들은 흑과 백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세계로부터 벗어난 총천연색의 세상이다. 가족은 <치티 치티 뱅뱅>을 보며 4DX 객석에 앉은 양 몸을 기울이고 놀라고 노래한다. 심지어 연극 <크리스마스 캐럴>을 볼 때도 무대는 컬러다. 이처럼 버디가 전달받는 낯선 자극은, 평소 고정된 인식세계로부터의 탈출을 경험하게 해줌으로써 지금껏 언급한 영화의 주제와 만난다. 그렇게 인물의 평소 인식과 행동 반경, 그에 따른 움직임, 그로부터 확장되는 현실 비판 같은 것들을 이미지화한다. 감독의 기억이 옮겨지고 이것을 마법 같은 감각으로 화면에 되살린 각본에 대해 두고두고 논의가 이어졌으면 한다. 이 글을 마쳐갈 즈음 오스카는 <벨파스트>에 각본상을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