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패러렐 마더스'가 죽음을 잊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방식
2022-04-20
글 : 박정원 (영화평론가)
어머니는 울지 않는다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지닌 애도와 위로의 힘이 꽤 고맙게 느껴졌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패러렐 마더스>는 주인공 야니스(페넬로페 크루스)가 고향의 집단 무덤을 발굴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마침내 발굴에 성공하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다. 그 과정 중간에 자리한 ‘뒤바뀐 아이’ 클리셰는 알모도바르식 서스펜스를 위한 장르적 장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풍긴다. 그럼에도 알모도바르는 기어이 (집단 무덤 발굴 서사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아이가 바뀐 야니스와 아나(밀레나 스밋)의 관계를 쌓아나간다. 영화는 두 어머니가 아기를 갖게 된 사연을 의도적으로 축약한 뒤 두 어머니를 마주치게 만든다. 예컨대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니스와 아르투로(이스라엘 엘레할데)가 은막을 닮은 하얀 커튼이 나부끼는 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꿈결처럼 지나가면, 어느새 야니스는 출산이 임박한 임신부가 되어 병실에 있다. 그곳에서 야니스는 어린 임신부 아나를 만난다.

죽음을 목도하는 알모도바르의 어머니들

아나가 야니스의 딸뻘에 가까운 나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아나가 야니스의 드러나지 않은 과거나 어린 시절을 표상하는 존재라고 짐작해볼 수도 있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난다. 영화의 제목이 지시하듯 40대 사진작가 야니스와 10대 학생 아나는 일반적으로 쉽사리 맞닿을 일이 없는 평행선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아나와 야니스라는 두 인물을 출산이라는 극적 사건으로 묶어 이야기를 작동시킨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두개의 평행선(인물)이 공통된 하나의 직선(사건)과 교통할 때, <패러렐 마더스>라는 영화적 세계가 탄생한다. 출산이라는 사건으로 만나게 된 야니스와 아나는 모종의 공통점에서 비롯된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한다. 이를테면 예기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두 사람은 각자의 이유로 아기의 아버지 없이 출산을 준비 중이다. 또한 야니스의 어머니는 요절했기 때문에, 아나의 어머니는 이혼과 커리어로 인해 부재했기 때문에 야니스와 아나의 삶에서 어머니의 자리는 비워져 있다. 그러니까 ‘어머니 없는’ 두 여자는 지금 ‘어머니 되기’를 앞두고 있다.

잠시 시선을 돌려보자면, <줄리에타>에서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를 떠났던 딸은, 어머니가 되어 아들의 죽음을 겪은 뒤 비로소 자신의 어머니에게 재회의 편지를 보내온다. 이렇듯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미처 준비되지 않은 자들의 불운과 비극인 동시에 이따금 다른 삶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곤 했다. 한편으로 그의 영화에서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의 굴레에 속박되는 일이기도 했다. 알모도바르의 어머니들은 원치 않아도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하곤 했다. <줄리에타>는 물론이고 <하이 힐>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귀향>의 어머니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음의 자장 안을 맴돌았다. 말하자면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탄생과 죽음은 태아와 모체의 관계처럼 불가분리적으로 공존한다(이는 그의 영화 속 어머니와 자녀의 서로에 대한 사랑과 증오의 관계와도 조응한다). 그러므로 <패러렐 마더스>에서 출산 이후 연락이 끊겼던 야니스와 아나가 다시 조우하게 되는 시점이 그들의 딸인 아니타의 죽음 이후라는 것은 지극히 알모도바르다운 선택이다. 아니타의 죽음을 전해 들은 뒤 진실을 밝히는 것에 주저하는 야니스의 윤리적 딜레마를 그려내기 위한 설정으로서도 흥미롭지만, 기어코 죽음을 겪음으로써 야니스와 아나가 알모도바르의 앞선 어머니들과 상통하게 된다는 점 또한 의미심장하다.

한편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어머니, 모성은 곧 자궁이다. 태아를 품은 자궁, 나아가 모녀가 느닷없이 떠나가거나 돌아오는 집, 가족들이 모여 있는 고향은 비극적 운명의 멜로드라마를 담아내는 최적의 장소였다. <패러렐 마더스>에서 야니스와 아나는 각자의 자궁에서 열달 동안 품었던 아니타와 세실리아를 낳는다. 그러나 불길하게도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던 두 아기는 신생아 관찰실이라는 인공적 자궁에서 마주치게 되고, 뒤바뀐다. 시간이 흘러 야니스에게 딸의 정체를 확인시켜주는 것은 유전자 검사다. 영화는 유전자 검사를 위해 야니스와 세실리아, 아나의 입안을 면봉으로 긁어내는 행위를 여러 차례 포착한다. 이 일련의 행위는 이후 집단 무덤 발굴 과정에서 유해를 쓸어 내는 인류학자의 조심스러운 붓질과 겹친다. 인공적 자궁 내에서 뒤바뀌었을 아이의 유전자를 확인하기 위한 절박한 움직임이, 역사라는 자궁이 오랫동안 품고 있던 유해라는 태아를 발굴하는 간절한 움직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엔딩 시퀀스에 등장하는 무덤에서 웅크린 채 누워 있는 조상들의 환영은, 요람사(搖籃死)한 아니타의 생략된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영화 속 무덤과 요람은 생사의 애처로운 순환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문다. 어제와 오늘에 이어 내일도, 허망한 죽음은 지속될 것이다.

알모도바르는 야니스의 입을 통해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상처를 응시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야니스와의 잠자리 이후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된 아나가 야니스와 아르투로의 관계를 언급하며 비아냥댄다. “자기가 무덤에 집착하니 남자가 그걸 이용하는 거네. 미래를 바라봐야지. 안 그럼 괜히 옛 상처나 건드린다고.” 이는 강간당한 딸에게 상처를 들쑤시지 말라고 했던 아나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태도이며, 아나 또한 그 지적에 수긍한다. 야니스가 아나에게 말한다. “네 가족 중 아무도 나라의 진실을 말 안 했나본데, 10만명 이상이 실종돼 구덩이에 파묻혔어. 손주나 증손주들은 그분들을 파내서 제대로 묻어드리려는 거고. 엄마와 할머니께 그러겠다 약속했으니까. 약속을 지킬 때까지 전쟁은 안 끝나.” 처음으로 감정적 충돌을 겪은 야니스와 아나의 이같은 말다툼 이후 고통스러운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나가 아닌 야니스다. 그간 세실리아가 아나의 친딸임을 밝히지 못했던 야니스는 스스로의 말을 통해 죽음과 상처를 외면하려 했던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음을 되새긴다. 그러므로 다음 장면에서 야니스가 아나를 컴퓨터 앞으로 데리고 가 유전자 검사 결과를 보여주며 고백하는 것은 ‘뒤바뀐 아이’의 진실을 밝히고 친모를 찾아주는 윤리적 행위인 동시에, 자신이 외면하려 했던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는 용기 있는 결단이다.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서야 비로소 야니스는 고향의 무덤을 다시 찾아간다.

애도와 연대

영화의 결말부, 잔인한 역사 속에서 가족을 잃었던 여성들은 가족의 유해를 보기 위해 길을 걸어가는데 그들 중 누구도 울지 않는다. 그들의 그 담대한 걸음엔 수십여년 전 어느 새벽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도 가족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 고향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던 어느 아버지들의 자존심과 품위가 새겨져 있는 것 같다. 프랑코 시대에 대한 외면은 그것을 잊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70대 감독은 <패러렐 마더스>를 통해 결코 죽음을 잊지 않았음을, 잊어서는 안됨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또한 그의 영화에 깃든 유령들이 소리내 울지 않고도 애도와 연대를 보여주는 방식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니 <귀향>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자신을 그리워했던 딸에게 ‘유령은 울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알모도바르의 어머니는 기적처럼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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