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블랙팀의 수장 야차(설경구)와 그를 감시하는 파견 검사 지훈(박해수)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사방에서 주도면밀하게 <야차>의 액션을 이끄는 스파이들이 있으니 바로 선임 요원 희원(이엘)과 성격파 재규(송재림), 막내 정대(박진영)다. <콜> <모럴센스>에 이어 <야차>로 넷플릭스 영화의 미더운 얼굴이 된 이엘은 거창한 대사 없이도 베테랑 원칙주의자 요원의 세계관을 단숨에 설득시키는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한편 거칠게 기른 수염에 기름칠한 꽁지 머리, 걸쭉한 사투리로 무장한 요원 재규는 이미 액션에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던 배우 송재림에게 아직 미개척지가 있었음을 일깨운다. 어깻죽지에 칼날을 슥 닦아내고 맹렬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그에게선 자기 취향에 꼭 맞는 작품을 만난 배우의 흥분마저 느껴진다. 한편 내로라하는 선배들과 함께 첫 상업영화에 도전한 아이돌 그룹 GOT7 출신의 박진영은 반려동물 뱀순이와 절묘한 호흡을 보여주며 영화의 숨통을 틔운다.
- 각자 <야차>에 합류하게 된 과정을 말해달라.
이엘 데뷔 초부터 액션영화 하고 싶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지만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러다 촬영차 포르투갈에 있을 때였는데 새벽 4시쯤 매니저가 다급히 메시지로 시나리오 하나를 보냈으니 빨리 읽어보라는 거다. 리스본의 침대에서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벌떡 일어났다. 희원이 총을 쏘고 뛰어내리고 하는 순간마다 함께 몸이 움직였다.
송재림 오래전부터 마초적인 영화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누아르 장르, 그리고 <분노의 질주> 같은 하드한 액션영화를 정말 좋아하는데 <야차>는 그간 내가 맡았던 캐릭터 중 취향 면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다. 개인적인 욕망을 해소할 수 있었던 영화다.
박진영 내겐 이 프로젝트의 일원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영화를 많이 찍어보지도 않았고 첫 상업영화이기도 하니까. 감독님과의 첫 미팅 때 무조건 하고 싶다고, 꼭 시켜달라고 어필했다. 그 진심을 봐주신 것 같다. 감독님이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 정대를 연기해달라고 주문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 첫 촬영날에 대규모 액션 신을 진행한 것으로 안다. 아무리 사전 훈련과 리허설을 했다지만 1회차치고는 굉장히 강도 높은 현장 풍경을 상상하게 된다.
박진영 나 자신이 마치 로봇처럼 느껴졌다. 뻣뻣한 팔다리를 다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긴장했다. 다행인 건 그런 내 상태가 무색할 정도로 선배님들이 현장의 분위기를 편하게 풀어주셔서 반나절이 지나고 바로 적응할 수 있었다.
이엘 처음 다 같이 모여서 찍는 신이 대만 현지 촬영이었고, 굉장히 큰 총격전이었다. 그러니 경력 있는 배우도 긴장할 만한 상황이었다. ‘지금 내가 긴장되는 만큼 상대도 긴장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다들 티를 내지 않는 게 느껴졌고, 서로 잘 다독여주는 현장이었다.
송재림 긴장한 사람은 긴장한 사람을 알아본다. 그럴 때 분위기를 유쾌하게 풀어가기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 약간 갈구는 거다. 그때 우리 셋 다 총을 들고서 제발 서로에게 쏘지만 말자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일동 웃음) 이렇게 웃음 한번만 터지면 된다.
- 세 사람의 캐릭터 대비도 극명하다. 우선 선임 요원 희원은 말수가 적고 노련한 행동대장 격이다.
이엘 희원은 각 잡힌 원칙주의자다. MBTI로 치면 아마도 ISTJ가 아닐까. 실제로 ‘매뉴얼’을 언급하는 대사도 있다. 검사인 지훈의 개입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동시에 민간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그를 가장 챙기기도 한다. 나, 인간 김지현(이엘의 본명.-편집자)은 그보다 많이 헐렁한 사람이라 희원을 연기할 땐 스스로를 타이트하게 조이려 했다. 비유하자면 약간 진돗개 같은 사람이랄까.
- 재규는 외양 면에서도 확실히 눈길이 간다. 길게 기른 머리를 묶고 수염을 기른 모습에서 배우가 지닌 이국적인 일면이 확 살아나더라.
송재림 촬영 당시 머리가 약간 길긴 했지만 묶을 정도는 아니어서 뒷머리는 붙였다. 수염은 감독님의 제안을 받고 직접 길렀다. 그때만 하더라도 약 2년 전이니까 지금보다 좀더 앳되고 곱상할 때라(웃음) 외모적으로 컨셉을 주는 게 필요하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거기다 센 부산 사투리까지 소화해야 했으니 내게는 여러모로 도전이었다. 사투리가 총기 액션보다 더 어려웠다. 감독님이 부산 분이라 문장 단위로 코칭을 해주시는데 나중엔 노이로제 걸릴 지경이었다. (박)진영 배우가 서울 사람처럼 보이지만 경상도 남자라 다행히 도움을 좀 받았다.
박진영 진해입니다. (웃음)
- 막내 정대는 순진해 보이지만 은근히 빙글거리면서 혼자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송재림 정대는 사실 선배들을 만만하게 여기는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박진영 어찌보면 그것도 아직 순진해서 그런 것일 수도. (웃음) 지훈에게 꽤나 친절한 편이었지만 블랙팀의 아지트가 폭발해 키우던 반려동물 뱀순이가 죽었을 땐 가장 먼저 폭발해 달려들기도 한다. 아직 감정적이고,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는 순수함이 있다. “블랙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란 대사가 정대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 오랜만에 홍콩 액션물을 떠올리게 하는 스타일리시한 스파이영화가 나왔다. 배우들이 바라본 <야차>의 매력은.
송재림 감독님이 터프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여리다. <야차>도 잘 보면 블랙팀 팀원들이 다들 너무 착하다. 액션이 화려한 데 반해 잔인한 장면이 하나도 없다. 예를 들어 재규는 연출자에 따라 훨씬 잔인하고 악랄하게 연출될 수 있는 캐릭터 아닌가. 촬영 중에 감독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우리 영화엔 나쁜 놈들이 많은데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잔인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라고. (웃음) 감독님이 본인은 유해한 표현을 좋아하지 않고, 그런 것으로 영화의 이미지나 스토리가 부각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분명히 짚으시더라.
이엘 그래서일까? 액션도 정면승부 위주다. 몰래 치거나 뒤에서 비열하게 공격하는 것 없이 전부 직진!
- 셋 중 리더 격인 희원이 젠더 중립적인 캐릭터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상대적으로 여성 캐릭터의 수가 부족한 액션영화에서는 컨벤션처럼 여성 인물의 성적 매력이 부각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엘 시나리오 단계 때부터 감독님이 그렇게 써두었고, 나도 믿음이 갔다. 캐릭터의 포지션 자체도 중요했다고 본다. 만약 희원이 셋 중 나이가 어린 축에 속했다면 젠더 표현에 있어 대상화될 여지도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나는 <야차>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다.
- 분장도 눈에 띄더라. 등장하는 모든 배우 중 촬영용 분장을 가장 덜어낸 인물이 이엘 배우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엘 일반 남자 분장 메이크업을 받았고 그마저도 약하게 했다. 파운데이션 한겹, 눈썹 살짝, 셰이딩하고 끝.
박진영 수염을 가리기 위해 오히려 내가 더 두껍게 했을걸?
송재림 난 머리 묶을 때 잔머리 가리려고 스프레이를 엄청 썼지. 이엘 배우는 립밤도 안 발랐다. 나중에 진짜 건조해서 입술 찢어질 때나 조금 발랐던가.
이엘 그러다보니 따로 분장팀의 손길도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나중엔 내가 직접 다 했다.
송재림 누나 집에 일찍 가고 싶어서 그랬지?
이엘 (웃음) 아니야!
- 고대했던 첫 액션 장르(이엘), 첫 상업영화(박진영), 그리고 항상 동경해왔던 장르와 캐릭터의 실현(송재림)이란 측면에서 <야차>는 세 배우에게 모두 적절한 자기만족과 성취감을 안겨준 것 같다. 이엘 배우는 곧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 공개도 앞두고 있는데, 두 작품에서 캐릭터가 상당히 달라 보여 재미있다.
이엘 조금 불안하긴 하다. <야차>에서 남자배우들과 같은 분장을 받고 액션 연기를 한 게 새로운 도전이었던 것처럼 <나의 해방일지>에선 세상에 이런 푼수가 또 없다. 모두 새로운 시도이고 두 작품간의 괴리도 커서 약간 걱정도 되고 무서운 시기인데, 그래도 마음을 정리하자면 행복하다. 열심히 준비해온 작품들이 연달아 세상에 나온다는 기쁨에 우선 집중하려 한다.
- 송재림 배우는 30대 중반을 지나면서 맡는 배역의 스펙트럼에 관해서도 새롭게 고민할 듯하다.
송재림 다가올 40대에 내가 어떤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을까 내다보게 된다. 사실 지금 좀 헷갈리는 시기다. 하고 싶은 것, 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전략적으로 해야만 하는 것들 사이에서 어떤 기준을 세우고 선택할 것인지 고민이 많다. 작업한 영화들이 개봉이 밀리면서 여러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시기도 함께 늦춰진 감이 있다. 씨는 뿌려뒀는데 아직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서 마음이 약간 ‘쿠크다스’ 같다. (이엘, 박진영 아아!) 앞으로의 10년을 생각하면 지금 머무르지 말고 치열하게 다져야 하는데, 그동안 달려온 것만으로 약간 지치는 감도 있고. 하하, 어쩐지 이따가 술 마시며 뒤풀이 자리에서 해야 할 이야기 같네. 이를테면 내가 이제 와서 유튜브를 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고. 그저 꾸준히 해왔던 것처럼만 하고 싶은데 세상이 빨리 바뀌어서 잘 따라가는 것만도 벅차다. 바람이 있다면 지금의 취향을 잘 유지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야차>를 만난 게 다행이다.
- 박진영 배우에게 <야차>는 영화하는 동료들을 만들어준 중요한 작품으로 기억될까.
박진영 선배들이 연기하고 현장에서 움직이는 모습 하나하나를 눈에 담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많이 엿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우리가 인터뷰하는 순간도 그렇다. 방금 재림 선배의 말을 들으면서 알게 모르게 위로받았다. 선배도 이렇게 불안하다면 지금 나의 불안도 괜찮겠구나, 그렇게 허락받은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