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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비극의 작동 방식, <미키 17>
한 눈에 보는 AI 요약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사회의 폭력 구조 속 희생자를 조명하며, <미키 17>에서는 더욱 순수한 패배자로 변모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영화와 원작 소설의 차이를 통해 봉준호가 의도적으로 희생자의 개성을 축소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는 최근 작품에서 반복되는 '바보' 캐릭터 전략과 연결된다. 이러한 설정은 영화의 폭력성을 강조하지만, 현실성과 긴장감을 약화시킨다. 결국 그의 영화는 점점 더 현실과 동떨어지며 장르적 재미에 머무르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1. 봉준호 영화 속 희생자의 특징
    1. 봉준호 영화에는 사회 폭력의 희생자가 반복적으로 등장
    2. <미키 17>의 주인공 미키도 가장 먼저 죽는 역할을 맡음
  2. 영화와 원작 소설 간의 차이
    1. 소설 속 미키는 도박으로 빚을 지지만, 영화에서는 자영업 실패자로 변모
    2. 미키의 개성이 줄어들고 사회적 희생자로서의 모습이 강조됨
  3. 희생자의 변화와 '바보' 캐릭터
    1. 이전 작품에서는 동물과 아이가 희생자였으나, 최근엔 어수룩한 인물이 등장
    2. 이들은 폭력을 피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맞으며, 사회적 약자로 기능
  4. 봉준호 영화의 현실성과 폭력의 문제
    1. 희생자의 특수성이 강조되면서 영화의 현실성이 약화됨
    2. 폭력적 서사가 강조되지만, 현실적 긴장감은 감소
    3. 초기작 <플란다스의 개>의 윤주는 복합적 캐릭터로 더 생생하게 다가옴
  5. 봉준호 영화의 변화와 미래
    1. 최근 영화들이 점점 현실과 동떨어진 장르적 재미에 머물고 있음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준호의 차기작은 여전히 기대됨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는 늘 어둡고 지저분한 밑바닥에서 사회의 폭력을 모조리 받아내는 인물이 나온다. 이들은 사슬처럼 물고 물리는 폭력 구조의 맨 하부에서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고통받기 일쑤다. 가령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탈락한 채로 지하실에 숨어드는 남자(<기생충>(2019))와 거대한 열차의 부품이 되어버린 아이(<설국열차>(2013)), 간편하고 맛 좋은 식품이 되기 위해 보금자리를 떠나는 돼지(<옥자>(2017))는 본질적으로 같다. 최근 개봉한 <미키 17>에서는 미키 17(로버트 패틴슨)이 이런 위치에 있다. 죽을 만큼 위험한 곳에서 가장 먼저 죽는 것이 임무인 남자. 그는 인류 발전에 필요한 위험을 홀로 감당한다.

이런 인물을 마주할 때 여태 나를 압도한 건 폭력의 잔혹함이었다. 그래서 정작 그 인물을 눈여겨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들 사이를 관통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 그것이 최근 들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건 <미키 17>에 이르러서다. 이런 깨달음은 영화와 원작 소설 <미키 7>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차이를 감지하며 시작되었다.

영화 <미키 17>과 소설 <미키 7>은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주목할 것은 주인공 미키에 대한 설정이다. 소설에서 미키는 스포츠 도박을 하다가 큰 빚을 진다. 그는 친구 베르토(영화에서 티모(스티븐 연)로 등장)가 경기에서 패배한다는 쪽에 걸었다가 거액을 날린다. 미키는 “사고 칠 궁리”를 하는 “무료한 청춘”이었고,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생을 지옥으로 밀어넣는다. 한편 영화에서 미키는 ‘마카롱 가게’를 열었다가 실패한다. 이때 마카롱 가게는 <기생충>의 ‘대만 카스테라’와 조응하는데, 사회가 양산하는 실패한 자영업자의 대명사로 기능한다. 즉, 소설에서 영화로 바뀌며 미키의 개성과 얼룩은 줄어들고, 그는 사회가 낳은 순결한 패배자로 변모한다. 또한 소설에서 베르토는 이기적이지만 때로 도움이 되고 가끔 미안해하는 모습이다. 반면 영화 속 티모는 미키의 이름으로 사채를 쓰는 등 보다 약탈적이고, 그를 대하는 미키 17은 한결 어수룩하다. 봉준호는 사실상 서사 전개에 영향이 없는 설정들을 새로 쓰며 미키라는 인물을 재조립한다. 이 과정에서 미키는 착하고 아둔한, 폭력 구조의 순수한 ‘희생자’로 변모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새삼 머릿속에 <기생충>이 떠올랐다. 어째서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근세(박명훈)가 처한 상황에 비해, 그의 사연이 지나치게 왜소하다는 것을. 그의 불행은 대만 카스테라라는 고유명사로 약화되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여진다. 그런 면에서 영화 속 미키와 근세가 불행에 빠져드는 과정은 비슷하다. 인물의 개별적인 서사는 축약되고, 구조적인 폭력이 전면에 대두된다. 이들을 불행하게 만든 건 무자비한 사회와 I 맨 아래 놓인 그들의 위치다. 나는 여기에 봉준호의 영화가 고의로 누락 혹은 은폐하는 것들이 있다고 느낀다.

미키 17과 근세가 공유하는 가장 크고 수상한 공통점이 뭘까. 그들이 눈에 띄게 유약하고 어수룩하다는 점이다. 봉준호는 최근 <씨네21>과 인터뷰에서 미키를 두고 “바보까지는 아닌데”라고 표현했지만, 얼핏 나온 그 호칭은 그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어떤 특질을 꿰뚫는다(이후부터 언급하는 ‘바보’는 멸칭이 아니며 특정 캐릭터를 지칭하기 위해 쓴다). 좀 이상한 질문이지만, 이들은 왜 바보로 등장하는 것일까?

미키 17과 근세는 봉준호의 영화에서 ‘희생자’로 분류된다. 폭력적 구조에 시달리는 이들 말이다. 이전 작품에서 희생자는 대부분 동물 혹은 아이였다. <옥자>의 옥자, <괴물>(2006)의 현서(고아성)와 <설국열차>의 티미 등이다. 그런데 <기생충>에 이르러 경향이 바뀌고, 그 자리에 바보가 슬그머니 등장한다. 그들은 폭력을 영리하게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맞으며, 이 사회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투명하게 비춰 보인다. 우리는 그들이 어수룩하다는 점을 알기에, 그들 위로 쏟아지는 무자비한 폭력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고 또 관망한다. 바보는 봉준호의 영화가 동물, 미성년자를 대신하여 최근에 택하는 전략이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를 상징하는 동시에, 폭력적인 서사를 지지하는 중심축으로 작동한다. 봉준호가 보여주고픈 전망에 닿기 위해서, 미키 17과 근세는 바보여야 한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설정의 특수성이다. 사실 미키 17과 근세는 보편적이지 않다. 익스펜더블에 자원하고, 지하실에서 나올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들이 내뿜는 특유의 측은함과 사랑스러움은 이런 특수성을 가리며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이런 특수성은 봉준호 영화의 전반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폭력의 첫 단추가 특수하므로, 이어지는 전개도 조금씩 현실성이 떨어진다. 아둔한 캐릭터가 반복적으로 나오는 걸 비판하는 게 아니다. 그런 설정에 기댄 채로 극단적인 폭력을 손쉽게 펼쳐 보이는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어두운 우화쯤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세계를 상정하더라도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인물의 결단과 비극의 작동 방식은 지극히 현실적이어야 한다. 관객을 뒤흔드는 영화의 생명력은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플란다스의 개>(2000)로 데뷔한 이래 봉준호는 꾸준히 폭력적인 세계의 서늘한 초상을 응시해왔다. 그 자장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보며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래서 <살인의 추억>(2003)은 서럽고 <마더>(2009)는 어지럽다. 그리고 최근 그의 영화 속 폭력의 강도는 점차 세지고 있다. 인간은 기생충이 되다 못해 반복해서 죽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영화들은 살갗에 아픈 감각을 남기는 대신 화려한 스크린에 머무른다. 그 영화 속 폭력은 생생한 통증으로 전환되지 못한 채, 흥미롭고 자극적인 장르로 굳어졌다. 어째서인가? 그것은 봉준호의 영화가 점점 더 현실과 동떨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폭력에 세밀하게 반응하며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는 현실의 인간, 여기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대신 자리를 채우는 것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어리바리한 캐릭터다. 이런 맥락에서 떠오르는 인물은 역설적으로 봉준호가 가장 이전에 만들었던 장편영화, <플란다스의 개>의 윤주(이성재)다. 그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며 육중한 구조 아래 놓여 있지만 순진하지 않고 복잡하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봉준호의 작품을 통틀어 가장 생생하며 활력 있게 다가온다.

비록 평가는 나뉘지만 <미키 17>은 전세계에서 환영받는 분위기다. 이런 열광의 중심에 선 봉준호를 볼 때 내가 느끼는 심경은, 탁월한 이야기꾼이 몰려드는 관중 앞에서 점점 더 몸에 힘에 주는 모습을 볼 때 느끼는 안타까움과 비슷하다. 위에 언급한 것들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봉준호는 여전히 봉준호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차기작은 다른 의미에서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