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전주국제영화제]
JeonjuIFF #2호 [기획] 태흥영화사, 메타픽션 유니버스!
2022-04-29
글 : 오진우 (평론가)
전주국제영화제의 ‘충무로 전설의 명가 태흥영화사’ 섹션과 고 이태원 태흥영화사 전 대표

영화 제작자인 자신을 선주(船主)라 비유한 한 남자가 있다. 태흥영화사의 고 이태원 전 대표다. 그는 자신의 영화 인생을 술회하는 <중앙일보>의 연재 시리즈 ‘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에서 “선장은 물론 감독이다. 제작자로서 나는 촬영에 들어가면 감독에게 전권을 넘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원칙하에 그는 회사를 설립한 1984년부터 2004년까지 20년간 총 36척의 배를 띄웠다. 그 배들 중 몇척은 다른 곳에서 온 배들과 함께 큰 파도를 만들어 부산에 도착한다.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이 파도를 일컬어 ‘코리안 뉴웨이브’라 명명했고 전세계에 한국영화의 흐름을 조명했다. 2022년 여전히 그 파도는 유효할까?

마스터에 대한 예우, 신인에 대한 지지

영화 제작자인 자신을 선주(船主)라 비유한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대표다. 그는 자신의 영화 인생을 술회하는 중앙일보의 연재 시리즈 <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에서 “선장은 물론 감독이다. 제작자로서 나는 촬영에 들어가면 감독에게 전권을 넘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원칙하에 그는 회사를 설립한 1984년부터 2004년까지 20년간 총 36척의 배를 띄었다. 그 배들 중 몇 척은 다른 곳에서 온 배들과 함께 큰 파도를 만들어 부산에 도착한다.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이 파도를 일컬어 “코리안 뉴웨이브”라 명명했고 전 세계에 한국 영화의 흐름을 조명했다. 2022년 여전히 그 파도는 유효할까?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작년에 별세한 이태원 대표를 추모하며 ‘충무로 전설의 명가 태흥영화사’란 제목의 회고전이 열린다. 회고전에는 총 8편이 상영되는데 신·구의 조합을 이룬 셀렉션이다. 크게는 임권택, 이두용, 배창호라는 당대 최고 감독들과 이명세, 장선우, 김홍준, 송능한, 김유진이란 당시 신인 감독들로 분류할 수 있다. 이 둘을 잇는 것은 충무로 도제 시스템이었다. 이 제작 시스템에서 신인 감독들은 데뷔 전 누군가의 조감독을 맡거나, 누군가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감독 데뷔의 초석을 닦았다. 이 과정을 지켜본 이태원 대표는 신인 감독들을 지속해서 발굴했고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마스터들에 대한 예우와 신인들에 대한 지지를 균형이 있게 가져온 태흥영화사는 상업성과 작품성을 두루 갖춘 보기 드문 형태의 영화사로 거듭난다. 태흥영화사는 설립 초기부터 해외 진출을 꿈꿨는데 임권택의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1989년 제16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강수연이 연기상을 받은 이후로 계속 유수의 국제영화제에 문을 두들겨 왔다. 세기가 바뀌고 2002년 임권택은 <취화선>으로 제5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으며 한국 영화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다.

이번 회고전은 다시 3개의 테마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예술가의 전기 영화가 있다. 시인 이상을 그린 <금홍아 금홍아>와 조선 말기 화가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취화선>이 그것이다. 두 영화 모두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겪는 예술가의 모습을 담아낸다. 세상과 불화를 겪는 주인공 옆에서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상(김갑수)에겐 화백 구본웅(김수철)이, 장승업(최민식)에겐 개화파 선비 김병문(안성기)이 있다. 두 주인공이 삶에 희망을 품었던 출발점에 예술적 영감의 존재인 뮤즈로서 존재하는 여성들이 아닌 이들이 있었다.

두 번째 테마는 바로 희망이다. 희망은 반대급부인 절망을 수반하거나 기반으로 한다. 배창호의 <기쁜 우리 젊은 날>은 영민(안성기)과 혜린(황신혜)이 돌고 돌아 결국 재회하여 결혼하는 로맨틱 코미디다. 신혼의 기쁨도 잠시 혜린은 임신 중독 증세로 출산 직후 안타깝게 죽는다. 영화는 영민과 딸이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으로 희망 있게 마무리한다. 이두용의 <장남>에선 인상적인 두 개의 이미지가 교차하며 희망은 절망으로 뒤바뀐다. 하나는 아파트 외부에 연결된 쇠줄에 매달려 내려오는 어머니의 관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 형제가 다 같이 모여 살 집이다. 목조 골격만 올라가 있는 미완의 집이 쓸쓸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대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족 형태가 현대 사회에선 불가능한 것이 되었음을 내려오는 관과 올라가지 못하는 집을 교차하며 표현한다. 김홍준의 <장미빛 인생>도 <장남>과 마찬가지 수직적 교차를 선보인다. 지하에 위치한 만화방을 운영하는 마담(최명길)은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녀는 만화방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옥상에 올라가 희망을 꿈꾼다. 영화의 마지막에 깡패 동팔(최재성)이 노동운동가인 마담의 동생 기영(차광수)을 구하기 위해 마담을 잡고 가짜 인질극을 벌이다 총에 맞고 죽는다. 이후 카메라는 옥상에서 좌에서 우로 패닝하며 석양을 비춘다. 보이스 오버로 88올림픽을 대비해 서머타임 제도가 시작되니 하우 6시를 기해 일제히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리라는 안내 멘트가 나온다. 1987년의 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해 넣은 보이스 오버이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음을, 다시 말해 동팔을 다시 살릴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석양을 보면서 불가능을 희망한다.

이 글에선 3번째 테마를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것은 태흥영화사가 남긴 성취 중에서 여전히 움직이는 파도, 즉 현재의 스크린에 옮겨지고 있는 미학적 성취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그 당시 신인 감독들의 작품에서 감지된다. 이명세의 <개그맨>, 장선우의 <경마장 가는 길>, 송능한의 <세기말>에서 보이는 메타픽션의 가능성이 그것이다. 메타픽션은 픽션의 연출적 장치를 독자에게 의도적으로 드러냄으로써 허구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다. 유구한 예술의 역사 속에서 메타픽션은 새로운 것이 아니겠지만, 당시 한국 영화계에선 찾아보기 드문 형식이었다. 신인 감독들이 이러한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태원 대표의 ‘감(感)’ 덕분이었다. 그는 영화는 과학이 아니라 감이라 믿었던 사람이다. 감은 수많은 실패를 통해서 터득된다. 그의 감은 실패의 두려움에 맞서야 하는 신인 감독들의 영화 세계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된다. 지금은 보기 힘든 낭만의 시대로 가보자.

<개그맨>

우선 이명세의 <개그맨>은 야간업소에서 활동 중인 삼류 개그맨 이종세(안성기)의 영화를 꿈의 형식을 빌려 풀어낸 작품이다. 이명세 감독의 데뷔 전 사수였던 배창호 감독이 연기자로 데뷔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영화는 꿈과 같다’라는 말에 걸맞다. 핵심은 개그맨 이종세가 이발소 의자 앉아 눈을 붙이며 꿈으로 접속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눈을 뜬 상태에서 시작하고 끝을 낸다. 관객은 개그맨 이종세와 함께 그가 꿈꾸는 영화를 같이 본 셈이다. 하지만 그의 삶에선 영화는 현실화되지 못한 채 가능태로서만 존재하는 이미지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백일몽이다. 이명세는 데뷔작에서 꿈을 활용하여 영화의 본질을 탐구하는 메타시네마를 만들었다. 이후 그는 2007년 <M>에서 다시 한번 꿈을 활용하여 전보다 더 복잡하고 세련된 형태의 메타시네마를 만들어낸다.

꿈이 픽션을 드러내는 하나의 연출적 장치라면, <세기말>에선 시나리오 작가 두섭(김갑수)이 등장하기에 글 쓰는 행위가 픽션을 드러내는 장치로 등장할 것 같다. 하지만 송능한은 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두섭은 카메라 구도를 잡는 제스처를 선보이며 자신이 구상한 영화를 허공에 영사한다. 그 영화의 제목은 ‘20세기’다. 두섭은 전에 쓰던 멜로드라마가 세기말 컴퓨터 바이러스 때문에 사라지면서 자신이 원했던 ‘20세기’를 쓰기 시작한다. 밤새 글을 쓰고 아침이 되자 두섭은 TV에서 한 살인사건 뉴스를 본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챕터가 바뀌고 두섭의 ‘20세기’를 보여주는 것처럼 연출한다. 그것보다는 두섭이 본 뉴스(현실)가 두섭이 쓰는 영화(허구)보다 앞섬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대사에서 알 수 있다. 그는 “한국 땅에선 영화는 절대로 현실을 못 따라가. 뒷북만 치게 돼 있다고. 그저 따라가는 시늉이라도 열심히 해보자 이거지.”라고 말한다. <세기말>은 메타픽션을 활용하지만 작동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현실이 허구를 능가한다는 감독의 주장을 견지하기 위해 영화 속 현실과 두섭이 쓰는 영화는 섞이지 않는다.

<세기말>

여전히 일렁이는 파도

<경마장 가는 길>

반면에 현실과 허구를 뒤섞어 모호한 영화적 영토로 만드는 작품이 장선우의 <경마장 가는 길>이다. 90년대 중반 등장한 홍상수의 영화 세계를 예고하는 이 영화는 메타픽션의 진수를 보여준다. 영화엔 일종의 왕복 운동만 존재한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R(문성근)은 고향 대구를 내려갔다가 J(강수연)를 보기 위해 서울에 자주 올라온다. 이러한 물리적 이동과 더불어 둘은 모텔에서의 섹스와 다방에서의 대화를 통해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주고받는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제목에 나온 것처럼 경마장이 아니다. 경마장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R이 경마장으로 걸어가는 방법을 중얼거릴 뿐이다. 제목은 미끼고 이들은 목적지가 없다. 서울 시내를 빙빙 돌 뿐이다. 영화는 정처 없이 흘러가는 둘의 에너지를 정박시킬 곳을 R의 빈 공책으로 정한다. 고향 가는 버스 안에서 R이 공책을 펼치기 전까지 영화는 시공간을 뒤섞어 버리는 몽타주를 선보인다. 그 뒤틀림 속에서 영화는 나선형으로 나아가며 오묘한 감흥을 선사한다.

이러한 메타픽션은 여전히 스크린에서 일렁인다. 특히 한국 독립영화 진영에서 심심치 않게 봐왔던 형식이다. 모든 영화를 열거할 수는 없고 영화에 대한 영화인 메타시네마로 국한해서 살펴보자. 장건재의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흑백과 컬러로 구분한 두 세계가 묘한 교집합을 이루며 회색 지대를 만드는 작품이다. 임정환의 <국경의 왕>도 마찬가지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명확하게 가를 수 없는 세계를 유머러스하게 구축한다. 박홍민의 <그대 너머에>는 극중 시나리오 작가로 나오는 주인공이 써 내려가는 영화, 기억 그리고 꿈이 뒤섞인 세계를 만든다. 그 안에서 관객은 영화에 등장하는 개미처럼 출구가 없는 골목길을 헤맨다.

메타픽션을 활용한 영화의 매력은 관객이 현실과 허구가 뒤섞인 불가분의 영역에서 마음껏 헤매고자 할 때 발산된다. 현재 이 분야의 권위자라면 코리안 뉴웨이브 이후에 등장한 홍상수 감독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구축하는데 이를 중요한 영화적 형식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신작 <소설가의 영화>에서도 메타픽션을 활용하여 보이는 것 너머의 이미지를 탐구한다. 이렇듯 현재의 영화들과 접점이 생긴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과거의 영화가 아니다. 이번 태흥영화사 회고전을 통해 과거를 추억함과 동시에 현재와의 연결고리를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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