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오마주' 신수원 감독×이정은 배우를 만나다
2022-06-04
글 : 이자연
사진 : 백종헌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들
이정은, 신수원(왼쪽부터).

지완(이정은)은 세 번째 영화마저 흥행에 고배를 마신 감독이다. 어느 날 우연히 영화 복원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1962년에 영화 <여판사>를 연출한, 영화사의 두 번째 여성감독 홍재원(김호정)을 알게 된다.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으로서의 모습과 자신이 되고 싶은 감독상(像) 사이에서 고민하는 두 사람은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오마주>는 11년 전, 홍재원의 모티브가 된 홍은원 감독의 존재를 알게 되며 깊은 위로를 받았던 신수원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김지완:홍재원=신수원:홍은원’이라는 하나의 등식처럼 영화 안팎으로 두 관계는 연결된다. 영화 <오마주> 역시 혼자인 줄 알았던 이들에게 조용한 응원이 될 것이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어떤 힘을 얻는가? 짧은 질문을 통해 서로를 연결해보고 싶었다.

<오마주>
<오마주>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극중 지완의 모습이 신수원 감독의 모습과 판박이처럼 똑같아서 놀랐다.

이정은_ 의상팀 김유선 실장님이 영화에 맞춰 의상을 준비해줬다. 착장 후 감독님도 “관객이 나인 줄 알면 어떡하지?” 하며 놀라더라. (웃음) 그게 또 재미있는 장치가 될 것 같아서 그대로 진행하게 됐다.

신수원_ 평소에 정은씨는 안경을 쓴다. 그런 이미지로 나온 작품이 많지 않아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고, 지완이와도 잘 맞았다. 처음엔 놀랐는데 나중엔 안경 피팅할 때 “제 것도 써보실래요?” 하면서 적극적으로 돕기도 했다. (웃음)

지완은 영화 속 두 여자에게 이입한다. 여성 불모지인 60년대 영화판에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 홍재원 감독, 그리고 차 안에서 죽은 미상의 여자. 따지고 보면 일면식도 없는 이들에게 왜 지완은 자신을 투영한 걸까.

이정은_ 사회생활하며 가장 힘 빠지고 육체적으로 어려울 때 비로소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부재가 보인다. 지완 또한 그걸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비어 있는 이웃집을 보면서 옆집 여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는 개인적 투영을 했다면, 홍재원 감독을 볼 때는 이제는 잊힌 자리를 떠올리며 직업적 투영을 한 거다. 그 두 가지 축이 만나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자신의 옆과 앞을 바라보는 지완의 시선이 또 영화 밖의 관객에게 동질감으로 연결될 것 같다.

신수원_ 2011년 MBC <여자만세>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여성감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55년에 <미망인>을 찍은 최초 여성감독인 박남옥과 62년에 <여판사>를 만든 홍은원 감독이었다.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자기만의 길을 꿋꿋이 걸어간 여성들을 알았을 때 신기하면서 동시에 위안이 되더라. 그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홍은원 감독이 작중 홍재원의 모티브가 되었다. 지완은 훨씬 전에 자신과 같은 길을 걸은 사람을 보면서, 또 편집기사로부터 “끝까지 살아남아”라는 말을 들으면서 오히려 자신을 느낀 것이다. 데칼코마니처럼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다.

50, 60년대 대중에 잘 알려진 여성감독은 박남옥 감독 외에 거의 없었다. 이렇게 여성감독의 정보 공백을 채워나가는 게 관객이나 영화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신수원_ 어려움을 뚫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굉장히 용감한 분들이다. 내 앞에 누가 있는지 아는 것과 그 사실 자체를 모르는 건 큰 차이가 있다. 그런 영화들이 종종 있다. 연출과 촬영을 하면서 나 스스로 그 안에 젖어들고 시나브로 변하게 되는 것들. 나도 그렇게 영향을 받았다. 잊힘이라는 공허함 속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정보 공백을 메우면서 그 공허함도 조금씩 채워졌다.

이정은_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일이 익숙해지면 지원 세력이 떨어져서 온전히 나만 남게 될 때가 있는데, 그러면 갑자기 모든 게 쓸모없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삶에서 버릴 게 없다는 것을 앞서 나간 이들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 우리가 다시 산다고 해도 또 그렇게 걸을 거잖나.

신수원_ 그런데 참 이상하다. 홍은원 감독은 세 작품이나 했는데도 왜 남아 있는 자료가 없는 걸까? <여판사>는 2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때 당시로는 대박인 셈인데. 이런 물음 속에 느꼈던 복잡한 감정을 지완과 지완 주변의 설정에 담으려 노력했다.

<여판사>를 보니 62년에 제작됐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대사가 진취적이다. “여자가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가정 파괴의 위험성이 100% 부수된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우리가 많은 여성의 지위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어?” 등등. 당대를 뛰어넘는 대사를 들으면 같은 감독으로서 어떤 자극을 받나.

신수원_ 그 시절의 여성감독이 이런 소재로 영화를 찍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놀랍다. 결말은 타협적이긴 하다. 그래도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드문 작품이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시대였기에 대부분의 여성 캐릭터가 소모적이고 순종적인 인물로 그려지곤 했는데, <여판사>에서는 직업인으로서의 여성을 그려내 진보적이었다. 영화인으로서 이런 상상력은 늘 반갑다.

영화 속에 쓰였던 영사기는 부품의 일부만 남아 있어 작동이 안되는데도 비용이 더 드는 걸 감수해서 공수했다고.

신수원_ 필름에 대한 로망 때문이었다. 내가 어렸을 적엔 16mm 필름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모두 한 방향을 바라보는 분위기가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그 느낌을 꼭 구현하고 싶어 원주의 폐관된 극장을 찾았는데 주요 부품이 없어 제대로 작동이 안되더라.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에 유일하게 움직이는 필름에선 생명성이 느껴진다. 그게 중요했다. CG로 넣어볼까도 했지만 그걸로 대체할 수 없었다. 결국 비용을 들여 개인수집가 안재호 사장님을 찾아 어떻게든 대여했다.

지완이 <여판사> 영상 복원 작업을 의뢰받았을 때 맨 처음 한 말은 “돈 많이 주고 의미 없는 일은 없냐?”였다. 경제적 자립이 필요한 지완이 처음엔 프로젝트를 부업으로 받아들였는데 그런 것치고 굉장히 열심히 임한다.

이정은_ 감독에겐 본업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하는 게 가장 좋을 거다. 다른 일을 부업으로 삼으면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진 것 같은 느낌이 밀려오니 지완도 처음엔 뜨뜻미지근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지완의 직업 정신이 드러난다. 필름이 너무 낡아서 “필름 상태가 지저분하네요?”라고 한마디 툭 던지는데, 원본 소장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감독의 힘이 발휘된다. 그냥 대충하고 끝낼 수도 있었지만 굳이 사라진 부분을 찾아 채워넣고,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수면 아래 감춰진 열정을 말이 아니라 발로 뛰면서 발휘하는 인물이다.

신수원_ 일부러 정은씨를 계속 걷게 했다. 이 사람이 걸어다니면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도록. 지완은 홍 감독의 지워진 자취를 보면서 어쩌면 자신도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걸 감지했을 거다. 그게 아마도 다시 지완이 일어나고 싶은, 일어나려 하는 동력이 됐을 것이다. 유실된 필름을 어떻게든 채우고 싶은 갈망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전작 <레인보우>(2010)의 주인공 지완이 10년이 지나 <오마주>의 지완으로 거듭난 듯하다. 여전히 가족으로부터 영화 재미없다는 핀잔을 듣고, 살림하라는 잔소리를 듣는다. 10년 동안 지완의 가족이 지완을 바라보는 시선에 변한 게 없는 걸까.

신수원_ 홍은원 감독은 세 번째 영화가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다음 작품이 없었다. 가족이 악의를 가졌다기보다는 홍은원 감독이 직업인으로서 당시 어떤 불안을 느꼈을지 지완을 통해 들어보고 싶어 일부러 설정한 부분이었다. 사실 모든 감독은 불안하다. 지완 또한 세 작품을 만들었지만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아 상황이 위태롭다. 사무실도 빼야 하고, 돈도 필요하고. 당시 홍은원 감독의 감정과 현실을 지완을 통해 추측하려 했다. 또 한국에서 으레 워킹맘들이 겪을 일들을 지완에게 부여한 것이기도 하다. 노동 시장에 직접 뛰어들어 일하는 중년 여성이 얼마나 많은가. 벌이가 필요해 자기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지만 여전히 살림은 자신의 몫이고 자녀도 신경 써야 하는 여느 여성들을 대변하고 싶었다.

이정은 배우는 지금까지 캐릭터성이 뚜렷하고 어떤 개념을 상징하는 역할을 자주 맡았다. <오 나의 귀신님>의 서빙고, <미성년>의 방파제 아줌마, <기생충>의 문광까지. 반면 <오마주>의 지완은 상대적으로 평범하고 차분하다. 이런 차이는 어떻게 느껴졌나.

이정은_ 사실 그런 역할도 다 평범하다고 생각하면서 했다. (웃음) 그런데 그렇게 보였다면 인물을 극화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한 듯하다. 조연은 장면을 활발하게 만들거나 이야기를 강화하는 역할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지완은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주인공이니까 계속해서 힘을 주고 있을 순 없다. 일상성이 더 중요했다. 특징적으로 어떤 부분만 도드라지게 보여주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여주려 했다. 동시에 입체성도 유지해야 했고. 촬영하면서 감독님과도 인물의 균형을 잡는 방식을 세세하게 논의했다. 또 지완이 로드 무비처럼 한명 한명 만나가는 과정이 나한테도 선배 연기자를 한명씩 만나는 시간이었다. 영화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오마주가 이어졌다. 신기했다.

<명왕성>은 10대 청소년들을 통해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과 경쟁 사회를 꼬집었고 <마돈나>에서는 성차별이 만연한 한국 사회를 비판했다. 또 타인의 욕망으로 삶이 흔들리는 사람들을 <유리정원>이 위로해주었고 <젊은이의 양지>에서는 기성세대가 만든 사회 안에서 어린 청춘들의 어려움을 낱낱이 밝혔다. 사회적 가해가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신수원_ 누군가는 염세적이고 어두웠다고 표현하기도 하더라. (웃음) 실제로 다양한 사회문제에서 내가 느꼈던 감각과 감정을 이야기로 풀어나갔다. 어두운 마음에서 출발한 게 맞다. 하지만 <오마주>는 나를 둘러싼 환경보다 진짜 나, 내 중심에서부터 시작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사회 시스템을 다룬 비판적 영화와는 궤도가 살짝 다르다. 정답이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좀더 밝은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다.

이정은 배우가 심보르스카의 시 <내가 잠든 사이에>를 담백한 목소리로 읽는 장면이 감명 깊었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내레이션을 맡았을 때도 시청자들이 “자, 이제 울 준비 하자”고 말하기도 했다. (웃음) 목소리로만 감정을 담는 건 평소 연기와 어떻게 다른가.

이정은_ 솔직히 말하면 엄청나게 부담스럽다. 정말이지 내레이션은 쉽지 않다. 평소 연기하는 것보다 더 예민해지는 것 같다. 목소리로만 모든 걸 표현하는 게 어렵다. 또 내 목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은 편이 아니다. 서걱거리고 매끈하지도 않고 투박하다. 그런 목소리로 이야기를 명확하게 전달하려면 상황에 훨씬 더 몰입하고 집중해야 한다.

보통 앞서간 선배의 조언이라 하면 사회 초년생에게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중년 여성에게도 선배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두분에게도 이러한 경험이 있는지.

이정은_ 여기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신수원 감독이 나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스스로 역할을 한정시키지 말고 다양한 활동을 해보는 게 좋겠다”, “한 가지 역할을 처음부터 끝까지 심도 있게 다뤄보는 경험을 하자” 같은 말을 해줬던 게 실제로 앞으로 나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다른 작품에서 만나는 멋진 조연 친구들에게도 내가 앞서 나가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다. 방영 중인 <우리들의 블루스>엔 청각장애를 가진 이소별 배우가 출연한다. 이러한 사례가 많아질수록 배우가 이래야만 한다는 정형성과 선입견을 깨트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나도 누군가의 선배로서 이러한 한계를 깨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

신수원_ 직접적 관계가 아니더라도 임순례 감독님을 비롯해 내 앞에 계신 분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정말 큰 힘이 난다. 꾸준히 영화 작업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큰 에너지를 얻는다. 모두가 잘 살아서 오래 버텨낼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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