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7번째 칸영화제 초청이다. “봉준호 감독께서 송강호를 믿으라 했고, 그렇게 했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말은 정확하다. 여기에 더이상 어떤 수식어를 붙여봤자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송강호 배우는 고레에다 감독과의 작업을 솔직한 대면이라고 표현했다. “전작들과 어떻게 다르고 뭐가 비슷한지에 대해선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다. 상현이 어떤 사연으로 세탁소를 하고 있는지, 어쩌다가 브로커 일을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사연을 상상하지 않았다. 연기를 할 때 늘 생각하는 건 지금 현재 이 인물의 감정과 상황이 무엇일지 표현하는 것뿐이다.” 스스로 영화가 되는 배우와 일상의 잔물결도 놓치지 않는 감독이 만나 만들어낸 기적 같은 여정은 특별함을 의식하지 않기에 한층 더 특별해졌다. 칸영화제 출국 전에 진행한 인터뷰에서 담담하게 산책하듯 다녀오겠다던 송강호는 결국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들고 돌아왔다. 트로피는 그저 수많은 이름표 중 하나에 불과함을 알기에 우리는 더 큰 박수 소리로 그의 귀환을 환영한다. 오직 지금 주어진 것들에 집중하는 송강호는 그렇게 한국영화의 얼굴이 된다.
- <씨네21>과의 인터뷰도 오랜만이다.
= <기생충> 이후에 <비상선언> 개봉이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계속 밀리면서 그렇게 됐다. 극장가 분위기가 꽤 오래 가라앉았는데 이제 슬슬 흥행작도 나오면서 살아나는 것 같다. 이런 흐름 속에 <브로커>를 통해 관객과 만날 수 있어 기분 좋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는 언제 처음 인연을 맺었나.
= 처음 뵌 건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 때였다. <밀양> 상영을 끝내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우연히 문 앞에서 마주쳤다. 너무 반가우면 순간 말문이 막힐 때가 있지 않나. 그땐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삼킨 채 가볍게 인사만 나눈 기억이 있다. “<밀양>은 최고의 영화다”라고 칭찬해주신 건 또렷이 기억난다. (웃음)
- <브로커>에 출연하기로 결정한 계기가 있나.
= 고레에다 감독님 작품이니까. 늘 봐왔던,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영화제를 오가며 만난 뒤 몇년 전에 한국에서 찍을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며 한번 만나고 싶다는 제안이 왔다. 감독님 영화의 오랜 팬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출연하고 싶었지만 딱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당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찍기로 결정한 다음주였기 때문에 연이어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연기한다는 게 조금 걱정스러웠다. 약간의 시간 차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인연이 있었던 건지 <브로커>의 시작이 조금 밀렸다는 소식이 왔다. 감독님도 워낙에 바쁜 분이고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계시니까. 덕분에 홀가분하게 출연할 수 있었다.
-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관객으로서 볼 때와 작품에 참여했을 때 무엇이 가장 달랐나.
= 이번 영화의 처음 제목은 ‘요람’이었다.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에 관한 이야기라는 한줄 아이디어만 들었기에 막연했는데 처음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예상 밖이어서 재미있었다. 선입견이었지만 일본 감독님들은 좀더 구체적인 계획하에서 정해진 대로 찍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님은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스타일이었다. 예상을 빗나가서 더 즐거운 부분이 있다. 창의적인 작업이라고 할까. 현장에서 배우들을 존중해주고 배우들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고 지켜본다. 그렇다고 즉흥적인 연출을 하는 건 아니고. 정확한 그림이 머릿속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그걸 표현하는 방식에서 배우들을 믿고 맡겨주는 편이었다.
- 세탁소를 하면서 어두운 거래도 병행하는 상현 역을 맡았다.
= 제목 그대로 브로커다. 버려진 아이를 새 부모에게 건네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사람이다. 베이비박스 시설에서 일하는 보육원 출신 청년 동수(강동원)와 팀으로 일하는데 인신매매나 흉악범은 아니고 나름의 논리가 있다. 이렇게 버려지면 보육원에서 커야 하는데 그보다는 새로운 가정에 연결해주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는 거다. 그럼에도 꼭 한마디로 지칭해야 한다면, 브로커다. (웃음) 어쩌면 이 영화는 상현의 일이 무엇인지 아주 긴 변명, 아니 설명을 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사회적으로 파장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입양에 대한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는 면이 있으니까. 한편으로 이건 버려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상현, 동수, 소영(이지은) 모두 누군가로부터 버려진 경험을 안고 살아간다.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이들이 우연히 모여 가족 비슷한 경험을 함께한다.
- 상현과 동수, 소영 일행이 아이를 입양 보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영화 속 시간 순서대로 로케이션 촬영을 했다고 들었다.
= 세트 촬영은 이틀 정도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전부 로케이션 현장에서 이뤄졌다. 고레에다 감독님이 워낙에 인위적인 걸 싫어한다. 연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지나가는 소음조차 그대로 담기길 원했다. 우리 현장에는 엔지가 없었다. 개가 짖으면 그걸 그대로 담는다. 찍는 도중 오토바이가 지나가도 그대로 담는다. 심지어 목소리가 정확하게 담기지 않아도 관계없었다. 감독님은 모니터도 안 본다. 본인의 육안으로 마치 연극을 관람하는 것처럼 배우들의 숨결까지 보고 소중하게 담으려 공을 들였다. 솔직히 로케이션을 순서대로 했다든지 로드무비의 형식을 취했다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다 같이 그때 그 순간의 공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게 좋았다.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시간이었다.
- 이들의 관계가 무엇인지 굳이 정의하려는 영화가 아니고 사연도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여정의 끝에서 결국에는 한 덩어리가 되어가는 모습이 형용하기 힘든 느낌을 준다.
= 상현 일행의 여정을 쫓는 경찰 중 하나인 수진(배두나)이 하는 대사가 있는데, 그게 유독 가슴에 와 꽂혔다. 세상은 상현 일행을 브로커라고 쉽게 낙인찍지만 사람 사는 게 그리 단순하진 않지 않나. 연기를 할 때도 뭔가 설명하거나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의식은 별로 없다. 굳이 생각을 한다면 그저 어떤 아름다운 순간들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 정도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뒤돌아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그동안 내가 해온 연기가 그랬고, 이 영화도 그렇다.
- 일본 감독이 한국에 와서 한국 배우들과 찍은 영화다. 고레에다 감독님은 프랑스에서도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2019)을 찍었다. 해외에서 작업할 때 독특한 색깔이 나오는 것 같다. <브로커>의 경우 그동안 감독의 영화보다 정서적인 온도가 좀더 높다.
= 아무래도 한국 배우들과 한국에서 작업을 하다보니 정서적인 부분이 반영된 것도 없지 않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감독님이 그동안 해온 영화와 마찬가지로 담백하고 건조한 시선이 강하다. 이번에는 좀더 상업적인 면모를 기대하신 분도 있겠지만 결국 이건 이창동도 박찬욱도 아닌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다. 그만의 미학이 담겨 있다.
- 말한 것처럼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등 숱한 작가들과 함께 작업을 했는데.
= 밤을 새워도 그 차이들을 다 이야기하긴 힘들다. (웃음) 감독마다 디테일한 부분은 다르지만 결국엔 관통하는 것들이 있다. 고집일 수도 있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일 수도 있고. 굵은 기둥 같은 게 느껴진다. 고레에다 감독은 한없이 부드럽고 친절한 분이지만 온화한 미소 뒤에 흔들리지 않는 무게가 있었다. 솔직히 어떤 현장에 있어도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기분으로 임한다. 이걸 어떻게 가져가고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는 철저히 감독의 몫이다. 이번 현장은 <기생충> 때 함께했던 스탭도 많았고 편안했다. 그럼에도 굳이 한마디 하자면 고레에다 감독과의 작업은 소통과 관찰의 시간이었다. 예를 들어 박찬욱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은 머릿속에 치밀한 설계도가 있어 그대로 따라가는 데 집중하게 된다. 고레에다 감독은 설계 도면이라기보다는 하얀 도화지 같았다. 그 위에 배우들을 데려다놓고 어떤 색을 칠할까 가만히 바라본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하라는 건 아니고. (웃음) 원하는 어떤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다. 아까 말했던 자연스러운 소음, 날씨 같은 거. 대사를 버벅대는 건 크게 개의치 않는데 인공적인 느낌이 나는 건 정말 싫어하신다.
- 현장성, 살아 있는 에너지라고 볼 수 있나.
= 그렇게 단순하게 구분하거나 정의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나홍진 감독의 영화에서 느껴지는 날것 같은 에너지와는 또 다르다. 호수의 잔잔한 물결인데 한순간에 탁 치고 올라오는 미세한 파동을 놓치지 않는 거라고 할까. 고요한 가운데 긴장이 있다. 찍으면서도 아, 여기서 한번 뒤집어주겠구나 하는 장면들도 많았다. 작은 파장이 큰 울림이 되어 퍼져나가는, 한 장면 한 장면을 정말 소중히 여기면서 찍는구나 싶었다.
- 여러 번 함께했던 배우도 있고 이번에 처음 작업한 배우도 있다.
= 전체 화보 찍은 걸 보니 이렇게 각양각색 따로 놀 수가 있나 싶어서 웃겼다. 얼굴만 보면 모두 장르가 다르다. (웃음) 불협화음인데, 한 화면 안에 담겼을 때 묘하게 어울리는 것이 재미있었다. 강동원, 배두나 배우와는 워낙 여러 작품에서 함께했기 때문에 눈빛만 봐도 서로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주영 배우도 작품은 많이 봤는데 이번에 함께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들 궁금해했던 사람은 아무래도 이지은 배우다. 조정석 배우와 함께한 드라마 <최고다 이순신> 때부터 봤는데 저 친구는 연기도 어쩜 저렇게 잘할까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대선배들 사이에서 자기 색깔을 보여주는 것도 대단했고. 결정타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였다. 나도 그랬지만 다들 강렬한 인상을 받았을 거다. <나의 아저씨>에서 워낙 잘했기 때문에 고레에다 감독님과의 협업에서 어떤 색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곁에서 지켜보니 굉장히 진지한 친구다.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작업 방식도 매사 신중하고 집중력이 남다르다. 가수를 하다 연기도 하는 친구들이 대체로 그런 것 같다. 임시완 배우도 그렇고. 개성과 색깔이 다 다른데 열정과 집중력, 진지함만큼은 공통적으로 다들 대단하다고 느낀다.
- 칸영화제에서 지난해에는 심사위원을 맡았고 올해 다시 경쟁부문에 초청받았다. 벌써 7번째지만 올해는 각별하지 않을까 싶다.
= 맞다. 심사위원을 하고 났더니 다른 부분도 보이는 것 같다. 영화 축제인 만큼 즐거운 것도 있지만 솔직히 일정이 험난하다. 경험이 쌓여도 힘든 건 힘들다. 올해는 한국영화에 대한 기대가 유독 큰 만큼 부담도 남다르다. 하지만 즐기다 오려 한다. 경쟁부문에 초청된 것만으로도 이미 수상을 한 거나 마찬가지다. 심사위원을 해보니 수상은 정말 아무도 모른다. 매체 평가나 언론 반응, 이런 거 다 부질없다. (웃음) 심사위원 경험은 정말 특별하고 즐거웠다. 좋은 영화들을 모두 볼 수 있다는 게 제일 행복했고, 마치고 나와서 각자의 의견을 밝히는 토론 시간도 흥미로웠다. 정말 빡빡하고 치열하게 심사한다. 심지어 지난해엔 <비상선언> 상영을 할 때 행사 시작에 잠깐 얼굴을 비췄다가 뒤로 빠져나와서 심사하고 토론하다가 마칠 때 다시 들어가서 영화 본 척 인사만 했다. 결국 영화는 국내에 들어와서 다시 봤다. (웃음) 사실 심사위원들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심사위원일 때는 상을 주는 입장이라 너무 행복했는데, 다시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 되니 이게 참. (웃음) 칸 골목골목에 좋은 가게가 많다. 축제 한가운데서 그 설렘을 즐기고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다시 비행기에 오르면 그걸로 충분하다. 수상은 보너스 같은 거다. 그보다 관객 여러분이 꼭 극장에서 이 영화를 즐겨주셨으면 좋겠다. 크고 화려한 영화도 재미있지만 고레에다 감독 영화는 진짜 극장 관람을 필요로 한다. 숨소리 하나조차 의미가 될 수 있는 고요한 호수 같은, 잔잔하고 입체적인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