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조선희 <버닝>이 감독님 영화에서 명백하게 변곡점인 것 같아요. 이창동 감독이 이젠 다른 방식으로 갈 수도 모르겠다는 인증을 남긴 작품인 것 같습니다. <시>가 2010년 작이고 그 다음 작품인 <버닝>이 2018년 작입니다. <버닝>을 찍기까지 8년 동안의 침묵이 절치부심의 과정이었을 텐데요. 그 침묵 속에 풍부한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요. 8년 동안 뭘 하셨는지 얘기 좀 해주세요.
이창동 8년간 영화를 준비했죠. 엄밀하게 말하면 7년인데요. <버닝>을 2017년에 찍었고 2016년에 영화를 준비했는데 1년 연기됐어요. <버닝>을 만들기 전까지가 7년 정도 걸린 거죠. 그 기간에 <심장소리> 토대가 됐던 장편을 준비했었어요. 그리고 또 다른 노동자 이야기도 있었거든요. 또 완전히 다른 장르물에 가까운 이야기도 있었고요. 거의 시나리오 단계까지 가고 프리프로덕션까지 진행했다가 막판에 제가 접었죠. ‘이게 관객들에게 의미가 있나? 나한테도 의미 있냐?’ 이 질문에 제가 답을 못한 거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의아하시겠지만, 제 주변 사람들은 더 ‘무슨 소리냐’고 했어요. 제작자도 있고 같이 팀에 참여한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같이 하기로 한 배우도 있었거든요. 근데 도저히 내가 왜 이 영화를 해야 하는지 이유를 못 찾았어요.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고민을 혼자 한 거죠. 심지어 생활고를 겪음에도 불구하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그 고민의 정체가 뭐냐고 다 설명을 드리긴 어려워요. 다만 이 정도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무슨 얘기를 해야 하지? 지금 눈앞에 있는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무엇일까, 그들에게 필요한 이야기가 뭐지?’였다고. ‘영화감독이 꼭 그런 영화만 찍어야 되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이 없어요. 그러나 저는 그랬다는 거예요. 제가 보기엔 사람들이 다 분노하고 있었어요.
‘도대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분노하고 있지?’라는 게 화두였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의 분노가 세계사를 바꾸고 있는 것 같아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된 것도 미국민들의 분노 때문이었죠. 유럽에 온갖 문제가 생긴 게 중동 난민들 때문에 정치적으로 다들 보수화돼갔기 때문이고요.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분노하면서 생긴 문제들이죠. 전 한국 사람들도 분노하고 있다고 봤어요. 이 분노가 우리가 80년대 사회를 향해 분노하던 것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옛 분노는 ‘순수한 분노’였어요. 미래를 믿으니까 분노하면서도 앞으로는 잘 될 거라 생각하고 희망을 나눠가졌어요. 굳이 말하면, 밝은 분노죠. 그러나 지금 분노는 밝지 않아요. 어두워요. 청년들만 분노하는 게 아니라 나이든 사람들도 분노해요. 극장에 오는 길에 광화문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분들이 집회를 하고 있더군요. 다행히 그분들은 왠지 분위기가 밝아 보이더군요. (웃음) 그러나 일상에 돌아가서도 이분들의 분노가 해소될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쨌든 지금 남녀노소 불문하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저는 분노를 다루는 이야기를 그동안 많이 생각했고 시나리오로 쓰기도 했어요. 앞서 말한 노동자 얘기도 분노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고, 장르물 역시 분노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 이야기들을 오정미 작가랑 얘기할 때는 ‘분노 프로젝트’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이 몇 개의 분노 프로젝트가 엎어진 것이죠. 그러던 중 일본의 <NHK>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소설을 갖고 영화를 만들어줄 수 있겠느냐는 의뢰를 받았어요. 제게만 부탁한 게 아니라 일본, 중국, 한국 감독에게 각각 의뢰한 거였고, 각각의 독립 장편 영화로 만드는 기획이었어요.
저는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란 작가하고 썩 편한 관계가 아니에요. 왜냐면 저 같은 한국의 80년대 작가들은 조금이라도 현실의 변화를 위해서 글을 쓰려고 했고, 현실의 중압감과 도덕적 책무에 시달리고 자기 검열을 하면서 글을 썼어요. 그렇게 80년대를 보내고 90년대가 되자, 민주화가 제도적으로 이뤄졌다고는 하지만 구조적으로는 달라진 게 없는데도 사회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 거예요. 새로운 상상력과 일상적인 것이 각광을 받고, 현실을 다루는 것은 마치 유통기한 지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분위기가 생겼어요. 그렇게 새로운 문학에 대한 요구가 생겼는데, 그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게 하루키입니다. 우린 무라카미 하루키를 ‘하루키’라고 부르잖아요. 보통 외국 작가를 부를 때 성을 부르지 이름을 부르지는 않죠. 일본사람들은 가까운 사이에도 성을 부르지 이름은 안 부르거든요. 우리만 전세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하루키라 부르잖아요. 그만큼 한국에서 하루키는 특별한 존재고 상징적인 존재가 된 거죠. 80년대 현실에 매여 있던 문학적 사고, 문화 전반에 걸쳐 현실의 중압에 눌려 있던 모든 것과 결별하게 한 존재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였어요. 그것도 일본 작가가 그런 역할을 했다는 거 자체가 아주 상징적인 것이죠. 그러니 제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별로 좋아할 수가 없었죠. 저와 너무 안 맞는 것 같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라는 제안을 받은 거에요. 처음엔 안 하려 했습니다. 근데 몇 년을 같이 고민해오면서 수많은 프로젝트를 엎는 내상을 계속 입었던 오정미 작가가 <NHK>의 제안에 응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어요.
조선희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라는 단편을 특정하지 않고 아무거나 영화화해달라는 요구였나요?
이창동 네, <헛간을 태우다>를 읽을 땐 재밌게 읽었는데 다 읽고나서도 뭔가 찜찜한 거예요. 뭔가 불길하지만 잘 모르겠더라고요. 이야기 자체는 모호한 결말이지만 단순했어요. 근데 도대체 왜 이렇게 찜찜한 느낌인가 했죠. 얼핏 무서운 걸 봤는데 내가 못 알아봤을 때와 같은 불길함이랄까. 그때 오정미 작가가 소설 속 여자가 죽었을 수도 있다고 말해줬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찜찜한 게 이해가 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오정미 작가가 이 이야기가 특히 청년의 분노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절 설득한 거죠. 그동안 쭉 분노를 다루고 싶었으나,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새로운 분노를 영화적으로 표현할 길을 못 찾았기에 진행하지 못하고 덮어왔거든요. 그러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특히 청년이 지금 경험하는 분노의 본질과 연결할 수 있겠다 생각한 거예요.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킨 <버닝>
조선희 <버닝>은 국내에서 논란의 중심에 섰어요. 해외에선 호평을 받았는데 국내에선 평이 갈렸죠. 저는 당연히 평이 갈렸으리라고 봐요. 한국 영화사에선 이창동 감독의 자리가 있거든요. 이 사람은 사회 현실에 정면 대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국내 관객으로선 <버닝>이 당황스러운 거죠. 영화의 어법도 이창동 감독의 지금까지의 영화와는 너무 달랐고요. 감독님의 작품은 설정과 대사에는 굉장한 리얼리티가 있거든요. 아주 정교하게 드라마를 짜는 작가에요. 그러니까 감독님 영화에서 어느 한부분도 합목적적이지 않은 것이 없죠. 그런데 <버닝>은 모르겠는 거예요. 왜 이런 배치를 했는지 의문투성이고 미스터리 투성이였어요. 만약 다른 감독이 이런 영화를 찍었다 그러면 범죄 미스테리라고 넘어갔겠지만, 감독님은 이창동이기 때문에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을까 질문을 던지게 되는 거예요.
<버닝>이야 말로 질문의 최고봉, 질문의 세트를 한번에 다 던져버리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미(전종서)는 실종됐나? 혹은 벤(스티븐 연)이 죽였나? 벤은 연쇄살인자인가? 우물은 진짜 있었나? 벤은 그럼 진짜 악한인가? 벤은 신사적이고 어떤 면에선 따뜻한데 이 캐릭터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감독님의 이전 작품을 볼 때 우리는 인물들이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았어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감독님과 관객이 합의할 수 있는 선에서 선연하게 드러나 있었죠. 그런데 <버닝>에선 모든 것이 미궁에 빠진 거예요. 그렇다면 감독은 왜 이 영화를 찍었을까. 감독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절반정도는 답을 찾은 것 같아요. 청년들의 분노라는 것에 집중한 거죠. 그렇다면 이 드라마를 구체적으로 왜 이렇게 짜셨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의 진도를 나가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창동 우리도 청년을 겪었고, 우리도 분노를 겪었잖아요. 하지만 그때 우린 분명했어요. 저쪽은 나쁘고 이렇게 바꿔야 한다였죠. 그래서 우리 분노는 낙관적이고 밝았던 것 같아요. 근데 지금은 알 수가 없어요. 누가 적이고, 누가 내편인지, 그리고 내 삶이 진짜 힘들기나 한 건지 알 수 없어요. 그만큼 선악을 구분하기가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분노를 드러낼 수 없으니까 분노를 내면화하는 거예요. 저는 우리가 인류사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는 인류의 역사가 갈수록 좋아졌거든요. 특히 근대 들어서부터는 그랬어요. 아들이 아버지보다 잘 살았던 거예요. 그리고 그 아들의 아들은 아버지보다 더 잘 살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식이 아버지보다 못 살게 됐어요. 이건 인류가 처음 겪는 거거든요. 그래서 아버지도 답을 줄 수 없는 거예요. 아버지는 그저 아들에겐 도움이 안되는 흘러간 과거의 경험을 이야기해줄 뿐이죠.
저는 이런 시대에 삶에 과연 어떤 서사가 있을지, 서사란 걸 제가 평생 이야기해오고 제 업으로 삼았지만…. 서사는 앞으로 가는 거거든요. 철이가 교실에서 집까지 옥상까지 달려가듯이. 서사의 본질은 앞으로 나가는 겁니다. 엄마를 위해서 철이가 달리듯 주인공의 욕망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죠. 그게 우리의 삶을 담는 서사의 틀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어요. 앞으로 나아가는 틀을 가지고 이야기하기에는 욕망도 방향도 불분명해졌어요. 선악도 없어졌고요. 안타고니스트가 강해야 프로타고니스트가 세지는데, 안타고니스트가 사라져버린 거예요. 우리가 새로 경험하는 삶, 새로 경험하는 구조를 <버닝>의 관객들이 함께 느끼면서 질문해보길 바랐어요. 보통의 스릴러, 보통의 서사, 보통의 관습에서 이 영화를 보면 실망하게 되죠. 배신감 느끼고요. 말이 안 되죠. 스릴러라는 건 결국 누가 범인인지 찾아내는 거고 지적인 게임을 통해서 결론에 도달했을 때 쾌감을 주는 게 공식인데, <버닝>은 범인을 찾아가는 스릴러가 아니라 범인을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스릴러 관습 자체에 질문하는 영화이기 때문이죠. 저도 이런 방식의 영화가 관객을 얼마나 불편하게 하고, 관객들이 어려워할 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수많은 프로젝트를 다루다가 엎어온 저로서는 해볼 만한 거라고 생각했었고 의미 있는 이야기라 생각했었습니다.
<버닝>이 지금까지의 제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느끼셨다는 건, 저와 함께 작업했던 오정미씨의 영향도 있었을 겁니다. 오정미씨는 나보다 많이 젊은 친구이고 심지어는 학교에서 저한테 영화를 배웠던 친구지만, 그 젊음으로 저한테 일깨움을 주는 작가예요. 제가 뭔가 본질에서 벗어나려 하면 오정미씨가 “학교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으셨잖아요?”라고 말하곤 했는데, 제 영화의 어떤 본질적인 걸 미러링하듯이 자극을 줬고 저한테 많은 깨달음과 새로운 자극을 주었어요. 그렇게 같이 고민하면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제 변덕 때문에 계속 실패해왔던 거죠. 그러다가 <버닝>을 만들면서 이 세상의 어떤 문제에 대해 내 나름의 정직한 질문을 던졌다 생각하죠.
조선희 감독님은 리얼리스트였는데, 지금 회의주의자가 된 건가요? 리얼리즘으로는 청년의 분노와 우리 시대의 이슈를 더 이상 담을 수 없다고 판단하셨나요?
이창동 네, 그렇게 생각해요. 사람들이 제 소설을 보고 저를 리얼리즘 작가라고 얘기할 때도 전 리얼리즘이 우리의 총체적인 삶을 다루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현실의 중압에서 벗어나기 너무 힘들기 때문에 현실에 들어와 있었던 것뿐이죠.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등등을 만들면서 단 한번도 정치에 얽매어서 정치적인 뭔가를 갖고 영화를 해본 적 없어요. 70~80년대 정치적 사건을 영화화하는 제의가 왔을 때 더 잘할 수 있는 감독을 연결해준 적은 있어도 제가 직접 하고 싶진 않았어요. 조금 더 본질적인 것, 더 보편적인 뭔가를 담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 누가 봐도 정치적인 걸 하고 싶지 않았어요.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지만 사실 영화 속에선 윌리엄 포크너가 언급되거든요.(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는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소설(Barn Burning)과 제목이 같다. -편집자) 무라카미 하루키와 윌리엄 포크너는 굉장히 대조적입니다. 윌리엄 포크너는 리얼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민중의 고통스런 삶을 밑바닥까지 가서 다루고 있죠. 그러면서 동시에 그 고통에 대한 연민에 가득 차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완전 반대죠. 자유로운 상상력 가진, 현실의 중력을 벗어난 작가예요. 전 무라카미 하루키로도 윌리엄 포크너로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버닝>이란 영화에는 윌리엄 포크너가 다루는 현실이 여전히 있지만, 동시에 그 고통이 어디서 기인하는 건지 눈에 보이진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질문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식 시선이 있는 겁니다. 두 시선을 겹쳐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조선희 그래서 <버닝> 이후로 뭘 생각하고 계시냐는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이창동 <버닝>이 변곡점일 수 있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전 <버닝>이 너무 나간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보다 더 나아가면 관객과 끈이 떨어질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버닝>에서 더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차기작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렸으면 좋겠지만 공수표가 될 수도 있으니까 구체적 얘기는 자제하고 싶고요. 간단히 말하면 사는 게 뭔지, 삶이 뭔지, 삶의 의미란 뭔지에 대한 질문을 가진 영화가 될 거 같아요.
*본 기사는 '이창동 감독 X 조선희 작가 대담④'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