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 소설가로서 처음 이창동 작가를 뵌 것은 1980년대고 영화판에 넘어온 감독님을 뵌 건 1993년이에요. <그 섬에 가고 싶다> 현장이었죠.
이창동 촬영은 1992년이에요. 그때 촬영장에 오셨어요. 기자들을 불러서 촬영장을 공개하는 관습이 있었어요. 저는 조감독이고 새까맣게 타고 메가폰을 들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연민의 눈으로 저를 바라봤어요.(웃음) 나중에 기사에 썼던가 누구한테 얘기를 했던가, 현장에서 제가 조감독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고 ‘삶의 회의’를 느꼈다고….
조선희 아이, 감독님 좋은 거 느꼈어요.(좌중 웃음) 감독님이 조감독이셔서 박광수 감독이 “슛 들어간다”라고 하면 확성기를 들고 “뒤에 좀 조용해주세요!” 이런 일을 하고 계셨어요. 근데 너무 열심히 하고 계시더라고요. 거기서 제가….
이창동 아, 삶의 비애!(좌중 웃음)
조선희 아, 삶의 비애! 박광수 감독이 이창동 감독님에게 영화를 하라고 제안하셨다고 해요. 감독님은 박광수 감독 영화 두 편의 각본을 쓰고 조감독을 하셨죠. 그게 <그 섬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었어요. 그래서 감독님이 스스로 데뷔한다고 할 때 박광수 감독류의 영화를 만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전혀 다른 어떤 종류의 영화가 나온 거예요. 데뷔작 <초록물고기>를 보고 저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고, 정말 환대하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영화사 이스트필름의 창립작이 <초록물고기>였는데요. 1996년 남산의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서 열린 <초록물고기> 제작 발표회를 제가 갔었거든요. 거기에 명계남, 문성근, 여균동, 이창동이 쭉 앉아서 이야기하는데, 당시 여균동 감독이 한 말이 기억나요. “우린 이창동을 영화감독을 만들어주기 위해 모였다”라고 얘기했어요. 이 감독을 데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이스트필름이란 영화사가 굉장히 신선했고 <초록물고기>란 영화는 충분한 값을 하는 데뷔작이었죠. 아무래도 데뷔작이니까 영화제작비를 펀딩한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 감독님이 노력한 게 있겠죠.
이창동 네, 그렇죠. 그런데도 투자자는 실망했죠. 투자자는 강우석 감독입니다.
조선희 왜 실망했죠? 흥행도 어느 정도 했잖아요.
이창동 흥행이 그렇게 되진 않았어요. 개봉이 1997년 구정쯤이었는데 한국영화가 완전 바닥이던 시절이었어요. 그땐 사람들이 “돈 줘도 한국영화 안 봐”라고 자랑삼아 말할 때였어요. 관객들이 한국영화를 외면할 때임에도 저는 나름대로 선전했다고 봤으나 투자자인 강우석 감독으로선 실망했겠죠. 그러나 강우석 감독이 시네마서비스라는 한국영화 배급사를 최초로 만들었고, 그 최초의 작품이 <초록물고기>였어요. 시네마서비스가 대기업 들어오기 전에 한국영화 산업을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고 생각해요.
조선희 <초록물고기>는 대종상을 비롯해 상을 휩쓸었어요. 당시로선 한국영화를 안 본다는 시기였으나 계속 좋아질 일만 남은 시점에 감독님이 데뷔작을 찍었다는 건 좋은 일이었죠. 이창동 감독뿐만 아니라 김지운,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 등 한국영화의 문제적 작가들이 90년대 후반에 데뷔했죠. 감독님이 그 트렌드의 중심에 있었다고 할까요. 제가 감독님을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게 2004년이었어요. 노무현 정권 출범하면서 문화관광부 장관에 계시다 퇴임하고 한달쯤 지났을 때 <씨네21>에서 전 편집장 자격으로 인터뷰했죠. 나름 재밌는 인터뷰였어요. 거기 한 대목 중에 감독님의 한 창작자들의 태도에 대해 단적으로 보여주는 질문과 답이 있어서 읽어볼게요. 저는 2000년에 소설을 쓴다고 <씨네21>을 그만뒀거든요. 당시 41살이었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소설을 쓰면 바로 박완서 작가처럼 될 줄 알았으나, 소설이 흥행에도 실패하고 비평적으로도 실패했어요. 그래서 우울해있을 때 감독님을 인터뷰한 거예요. 그런 맥락을 아시고 들어주세요.
조선희 제가 지금 신인작가잖아요. 근데 정말 신인작가라는 건 정신분열의 다른 이름인 거 같아요. 사회적 냉대, 시스템의 냉대에 시달리다보면, 끊임없이 내가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내가 바보가 아니라는 것, 그걸 사회에 납득시키기 전에 내 자신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책무가 있잖아요. 그 내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든 거 같아요. 또 내가 소설 쓸 재능은 없을지라도 이유는 있다는 걸 자신한테 납득시켜야 하는데, 가장 절망적일 때는 그 이유가 생각이 안 날 때예요. 선배는 그런 신인작가 시절을, 소설가로서, 영화감독으로서 무려 두번이나 했잖아요. 이 신인작가에게 뭔가 용기를 주는 얘기 해주실 거 없어요?
이창동 전혀 도움이 안 되지. 어떤 누구의 경험도 도움이 안 돼요. 혼자서 해결해야지. 절망을 좀 더해야 해. 가혹하게 이야기하면, 절망을 아직 덜 했구먼.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설득한다고 했잖아. 무가치한 존재라는 걸 받아들여야 돼.
조선희 그것까지 받아들이고 나면 쓸 기력이 없잖아요.
이창동 절망을 하고 나면 할 일이 쓰는 거밖에 없게 돼요. 베스트셀러를 쓰려고 하니까 그렇지. 무인도에서 구원의 글귀 한 구절을 써가지고 병에 집어넣어서 코르크 마개를 닫고 바다에 던지는 심정이 돼야 해. 누구 하나라도 이걸 주워서 봐줬으면 좋겠다, 에서 시작하는 거 아닌가? 무인도에서 베스트셀러작가가 되는 걸, 이 체험을 수기로 써서 베스트셀러가 돼서 비단옷 입고 진주목걸이 하고 그런 거 상상하면 미치지.
조선희 재밌죠? (웃음) 감독님이 이런 자세로 신인 시절을 견뎠다는 것.
이창동 진짜 부끄럽네요. 말만 그렇게 한 거예요, 나도. 그 사이에 저도 몇 번 미쳤었어요. 쉬운 게 아니죠.
조선희 제가 오늘 진행자로서 클로징 멘트를 적어왔어요. 제가 말하고 나면 감독님도 본인의 클로징 멘트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좌중 웃음) “이창동 작품은 한국영화의 자산을 풍부하게 만드는 하나의 독보적인 메뉴다. 6편 모두 독창적이다. 이미 있던 작품의 카피도 없고 먼저 만들었던 작품의 반복도 없다. 동시대 어느 작가와도 구별되는 특징은, 소름 돋는 리얼리티라고 할 수 있다. 상황도 리얼하고 인물도 리얼하고 연기도 리얼하다. 그의 작품들은 하나하나는 모두 사회심리학적 텍스트들이다. 문제는 너무 가뭄에 콩 나듯 만든다는 것. 그는 결벽증, 완벽주의와 사투를 벌여온 것 같다. 앞으로는 3년에 한번씩은 책임지고 영화를 내놓을 것을 엄중히 요청한다.”
이창동 이렇게 경청해주셔서 고맙고요. 오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고 공감하는 눈빛으로 바라봐주시는 여러분을 느낀 것만으로도 크게 힘이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수없이 절망하고 또 미치겠지만 여러분들의 기대에 같이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