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안나' 정은채, "연기가 나를 바꿨다"
2022-06-22
글 : 이자연
사진 : 최성열

안나(수지)가 그토록 훔치고 싶어 하는 현주의 삶은 타인의 기분을 살필 필요도, 가계 사정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부유한 환경에서 그늘 없이 자라온 만큼 누군가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긴다. 언뜻 아무런 문제 없는 화려한 인생처럼 보이지만 현주의 말과 행동에서 정은채는 숨겨진 외로움을 읽었다.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부터 드라마 <파친코>에 이르기까지, 캐릭터의 이면을 살피는 정은채의 눈은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이 허구에만 머물지 않고 생동감을 얻을 수 있게 만들었다.

- <안나>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 여성 서사라는 것이 가장 흥미로웠다.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보고 자연스럽게 이끌렸다. 마냥 무겁지 않은 전개 방식도 신선했다. 장면 곳곳에 인간의 솔직한 본능이 묻어 있어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느낄 수 있다. 그야말로 다양한 색깔이 혼재한 작품이다.

- 실제로 어린 시절 영국으로 유학 길에 올라 예술대학에 진학했다. 현주와 비슷한 배경과 이력이라 둘이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 <안나> 시나리오가 완성되기 전부터 이주영 감독님으로부터 작품에 대한 구상을 오랫동안 들어왔다. 내가 투영된 부분도 있지만 현주는 나와 많이 다르다. 이기적이고 상대방을 쉽게 자극한다. 다만 어떤 의도를 가진 건 아니고, 순수 악에 가깝다. 조용하고 눈치도 많이 보는 나와 달리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현주를 연기하면서 한편으론 자유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일종의 대리 만족이었다. (웃음)

- 현주는 파티를 좋아하고 구설수가 많은 부잣집 딸이다. 반면 지금까지 맡아온 역할은 당당한 변호사(<리턴>), 악령을 믿지 않는 현실적인 형사(<손 the guest>), 강단 있는 총리(<더 킹: 영원의 군주>) 등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라 갭이 크게 느껴진다.

= 현주는 그동안 연기했던 캐릭터와 많이 다르다. 일부러 촬영 중 쉬는 시간에도 편하고 당당하게 있으려 했다. 평소라면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있는 편인데 현주의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태도를 취했다. 이주영 감독님은 주어진 상황에서 배우들이 자유롭게 연기하게끔 한다. 현주는 즉흥적이고 유연한 태도가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런 환경으로 더 풍성해질 수 있었다.

- 자유롭게 연기하기 위해선 연출자와 대화도 많이 나눠야 했겠다.

= 이주영 감독님은 직접 대본을 쓰고 오랫동안 준비해와서 그런지 장면마다 본인이 상상하는 그림이 확고했다. 그래서 디렉션 받는 과정이 무척 안정적이었다. 동시에 배우의 자율성을 존중해주셔서 대화를 통해 주도적으로 캐릭터를 키워나갈 수 있었다. 특히 현주는 감정선이 들쑥날쑥하고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이 강해서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럴 때마다 다양한 연기를 시도할 수 있도록 감독님이 긴장감을 많이 풀어주셨다.

- 시청자는 보통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래서 안나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하고, 또 거짓말이 들킬 위험에 처하면 들키지 않길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현주야말로 피해자 아닌가.

= 현주는 극중 인물을 통틀어 가장 우월한 인생을 살아왔다. 워낙 자기 중심적인 탓에 주변 사람에게 크게 관심이 없다. 그러다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면서 상상해본 적도 없는 충격을 난생처음 겪게 된다. 그 장면에서 인간적으로 현주가 무척 가엽고 외로워 보였다. 너무 자기 인생에만 몰두하면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어 고독해진다.

- 어떤 면에서 현주는 수동적이다. 가족이 맺어준 결혼을 군말 없이 따르고, 그 결혼이 성사되는 데 3년이 걸려도 조용히 기다린다.

= 현주는 자신을 대신해 누군가가 제시해준 것 중에서 선택해왔기에 수동적인 면이 있다.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성취한 이들은 그렇게까지 간절한 게 없다. 현주도 삶에서 뚜렷한 목표를 설정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원하는 모든 걸 쉽게 얻었으니까.

-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통제하며 연기한다. 상황과 감정에 따라 목소리 높낮이부터 명암까지 섬세하게 바뀐다.

= 목소리 톤이나 말투가 그 사람의 성격을 직접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에 목소리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현주는 원래 정은채보다 목소리 톤이 한 옥타브 더 높다. 하지만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처음 생각한 대로 목소리가 구현되지 않는다. 생각에 따라 태도가 변하는 것처럼, 오히려 그 인물의 성격을 체화할 때 자연스럽게 목소리도 변하게 된다.

- 캐릭터를 체화할 때 어떤 과정을 거치나.

= 작품에 그 사람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 그러면 캐릭터가 이야기 안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보인다. 이러한 과정으로 인물의 성격이나 관계성 등 포지션을 구체적으로 잡을 수 있었다.

- 라디오 프로그램 <FM영화음악>을 1년5개월가량 진행했다. 드라마나 영화와는 다른 기술이 필요했을 것 같다.

= 라디오를 진행하기 전 주변으로부터 조언을 많이 받았는데 귀 기울여 듣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하더라. 보통 말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청취자나 초대 손님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야 내 안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다. 그러면 대화도 편하게 이어진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려 노력한 시간이 연기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 라디오는 시간 약속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매일 출퇴근하는, 루틴 있는 생활은 학생 이후 거의 처음이었다. 많은 이들의 성실한 지속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달았다.

- 데뷔 13년차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어떤가.

= 아쉬운 점도 많다. 더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다양한 작품에서 각기 다른 인물을 연기할수록 배우로서 더 유연해지고 내면도 강해지는 걸 느낀다. 처음보다 능숙해진 면이 있다면, 이제는 스탭들 얼굴도 보이고 감독님에게 내 의견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워낙 사람들 앞에 서길 두려워하는 성격이었다. 연기가 날 바꿔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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