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에서 박열(이제훈)은 자신을 심문하는 예심판사 다테마스(김준한)에게 “이 사건이 자네 일생일대의 최대의 사건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2012년부터 단편영화에 출연하며 활동을 시작해 매니저도 없이 혼자 오디션을 치른 신인 김준한에게 데뷔작 <박열>은 ‘일생일대의 사건’이 분명했다. 이후 일본어가 능숙한 신인배우를 눈여겨본 민규동, 류승완, 조철현 감독에게 한번씩 선택을 받았고,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신원호 PD와는 두 차례 작업하며 ‘안치홍’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이준익 감독은 세 차례 그와 함께 작업했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 함께 출연한 정우성 역시 자신의 감독 데뷔작 <보호자>에 김준한을 주연으로 세웠다. 차근차근 쌓아온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면 “매 순간이 중요했다”는 그의 말이 빈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드라마 <안나> 역시 매 순간 성장의 발판 삼아 내딛는 김준한의 소중한 한 걸음이라 할 만하다.
- <안나>의 최지훈은 어떤 인물인가.
= 지훈은 ‘난 이렇게 살 거다’라고 스스로 결정한 사람이다.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기준에 반드시 도달하려는 자다. 사람들은 환경적, 상황적 어려움이 생기면 목표를 수정하지만 지훈은 차라리 상황을 수정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 성공한 스타트업 대표이자 권력 지향적인 지훈 캐릭터를 디자인할 때 무엇을 참고했나.
=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원래 많았다. 그동안은 그저 관망해왔다면 이번에는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인물들의 행동도 어떤 마음에서 저렇게 표현했을까 상상해보았다. 물론 추리일 뿐이고 결국 내 삶의 경험에 비추어서 이해하게 되긴 하더라. 비상식적인 인물을 연기할 때 그 캐릭터의 호감 요소도 고려하나. 일부러 호감을 느끼게 하려고 하진 않는다. 하지만 잘 관찰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거나 영향력을 끼치려고 노력한다. 다만 그 영향력을 누군가는 공포스러움이나 카리스마로 드러내고,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 하는 등 방식의 차이가 있다. 지훈 역시 결국 남들이 자신을 우습게 보지 않게 하려고 권력이 가진 공포를 활용하지만, 마음 한쪽의 얄팍한 자존심은 숨겨지지 않고 삐질삐질 새어나온다. 별것 아닌 것에 빈정 상하는 식으로.
- 드라마 <봄밤>에서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 ‘자존심이 밟혔다’는 이유로 한풀이하는 권기석이 떠오른다. (웃음)
= 맞다. 약간 스며 있다. (웃음) 그래서 캐스팅한 게 아닐까.
- <안나>에는 욕망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두 여자의 욕망은 세밀하게 그려지지만, 지훈은 요약되고 표면적으로 소개되어 해석의 여지가 적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지훈에게서 본 ‘다른 점’은 무엇일까.
= 악역이나 주인공과 대립하는 인물을 맡을 때마다 하는 고민이다. 딱 봐도 나쁘게 표현하면 시청자가 받아들이기 쉬울 거다. 하지만 내가 살면서 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뒤통수를 너무 많이 맞았는데. (웃음) 혹은 내가 누군가의 뒤통수를 때렸을 수도 있고. 사실 사람들의 민낯은 알 수 없잖나. 일부러 캐릭터의 전형성을 비튼다기보다 ‘지훈은 어떤 고민이 있고, 무엇 때문에 자기를 포장하려고 하는가?’ 이런 것들을 고민했다.
- 얄팍한 자존심이나 하찮음. 그게 당신이 생각한 지훈의 민낯일까.
= 어떤 인물이라도 너무 멋지기만 하거나 너무 악하기만 하면 재미없다. 작품은 캐릭터의 결정적인 순간만을 모아둔 것이지만 모든 인간은 하찮은 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고. 그래서 작품 전체의 큰 맥락을 표현해내면서도 어떤 하찮음 한 스푼을 항상 넣어(웃음)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게 캐릭터를 현실성 있게 만든다고 본다.
- <안나>의 부제처럼 ‘갖고 싶은 이름, 훔치고 싶은 인생’이 있을까.
= 지금 삶에 굉장히 만족한다. 내가 걸어온 길인데도 내 것 같지 않을 만큼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감사하면서도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되는 건가 싶은 어색함이 있다. 난 이미 훔친 것 같은데. (웃음)
- 최근 몇년간 꾸준히 인상적인 캐릭터를 맡아 얼굴을 알리는 중이다. 오히려 다른 배우가 당신의 이름을 훔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 진짜 그런 배우가 있다면 나로선 영광이다. 나 역시 어떤 순간을 굉장히 욕망하고, 나 자신을 몰아붙여서 지금의 내가 되어 있는 거겠지만. 돌아보면 삶의 매 순간이 굉장히 중요했구나 싶다. 이제는 너무 채찍질하지 않고 나 자신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게 결국 다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신원호 PD나 <허스토리>의 민규동 감독은 당신에게서 ‘이전과 다른 얼굴’을 끌어내고 싶어 캐스팅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얼굴을 상상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 너무 감사하다. <안나>의 이주영 감독님도 그런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 사실 <안나> 대본이 나에게 와서 좀 놀랐다. 지훈처럼 성공하고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인생 경험도 많고 나이도 더 많은 사람이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고정관념이었다. 감독님한테도 이런 얘기를 했더니 그저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지훈이 궁금해서 캐스팅했다며 용기를 주셨다.
- 당신도 지훈처럼 ‘난 이렇게 살 거다’라고 결정한 사람이다. 서른살을 기점으로 음악 활동을 접고 연기를 선택했다. 5년 동안 단편영화에 출연하며 무명 시절을 견뎠는데 그 짧지 않은 시절을 견딘 힘은 무엇이었나.
= 그저 좋은 작품에 참여해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계속 부족하다고 느꼈고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도 바빠서 다른 데 휘둘릴 시간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의심하는 순간도 많았지만, 감사하게도 그때마다 조금씩 성장하는 내 모습을 응원해주는 동료와 선배가 있었다. 잘할 수 있다는 말이 참 별거 아닌데, 그게 정말 하루를 더 살게 해준다. 내가 동생들에게 잔소리가 많은 편인데, 얘기하다 보니 응원을 더 해줘야겠다. (웃음)
- 정우성 감독의 <보호자>에도 주연으로 출연한다. 어떤 이야기인가.
= <보호자> 속 인물들은 전부 벼랑 끝에 몰려 있다. 영화는 벼랑 끝에서 자리 싸움을 하는 이야기다. 나 역시 벼랑 끝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인간을 연기한다. 경계하고 빼앗는 원초적인 동물들의 세계를 볼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