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심장소리'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 촬영감독 박홍열을 만나다 ①>에서 이어집니다.
이슬비를 뚫고 약속 장소에 도착한 박홍열 촬영감독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빨래 영상이었다. 성미산에 살고 있는 그가 합정 너머가 보이는 자택 옥상에 널어둔 빨래를 촬영한 결과물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빨래를 찍고 있다”는 그에게 “창작 뮤지컬 <빨래> 실황을 담고 있느냐”고 물은 것이 무색해졌다. “이번 기회에 유튜브 채널(summermoon film)을 홍보하겠다”는 그에게는 느닷없이 소중해진 ‘생활의 발견’이 있었다.
“제가 이 집에 산 지 5년째 됐을 때 빨래도 사람처럼 자란다는 걸 알게 됐어요. 옥상에 서면 건물들도 자라고 있는 게 보이더라고요. 10년간 한 달에 한 번씩 똑같은 위치에서 빨래를 찍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들이 커가고, 도시가 달라지는 걸 이렇게 기록해보기로 한 거죠.” 이 느릿한 프로덕션은 날씨에 민감하기 쉬운 촬영감독 박홍열이 자연을 기다릴 수 있게 했다. 그는 조금씩 건조되는 옷감을 만지며 바람이 한 방향에서만 불어오는 게 아니라는 걸, 햇빛이 한쪽에서만 비쳐오는 게 아니라는 걸 체감했다고 한다. 물론 박홍열은 이미 알았는지 모른다. 불규칙적으로 운동하는 입자들, 무질서 속에 피어나는 질서들은 그가 오래 전 책으로 학습한 무언가다. 영화를 만나기 전 그의 학부 전공은 물리학이다.
순수과학도와 영화의 교제는 “영화가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도구”라는 풍문(?)을 들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시네필 출신도 영화과 출신도 아니었던 20대 초반, 소문의 진상을 믿게 만든 건 켄 로치 영화였다. 그 뒤를 따른 한국영화가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시리즈. “영화란 그렇게 직접적 발언을 해야 한다”라고 끄덕인 청년은 카메라를 들면 그 방법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촬영에 뛰어들었다.
충무로 현장을 누비던 박홍열이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한 건 <오아시스> 촬영팀 생활을 마칠 무렵. ‘영화적 지식’이 부족하다는 판단 아래 학교에서 촬영을 전공한 그는 이후에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촬영을, 서강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이론을 공부했다. “영화를 꼭 학교에서 배울 필요는 없다”는 흔한 말을,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잠시 색채학을 공부한 것을 포함해 대학만 다섯 곳을 다닌 박홍열 촬영감독에게 듣자 믿고 싶어졌다. 시험을 통과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하자 찾아온 깨달음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공부라는 게, 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영화학교는 자꾸만 영화를 거대한 것으로, 감독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요. 내가 공부하는 대상이 커질수록 나는 초라해지죠. 학교는 영화에 대한 공포를 심어줬어요. 상징과 구조에 대한 집착, 의도와 의미에 대한 강박에 오래 시달리면서 정작 ‘이미지’와는 멀어졌던 겁니다.” 박홍열은 “잘난 사람만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학교 밖에서 동아줄을 던져준 이로 홍상수와 이창동을 꼽았다.
내가 만난 이창동, 홍상수
박홍열 촬영감독은 이창동, 홍상수 감독 곁에 머무는 동안 흡수한 영화인의 태도를 들려줬다. 이때 영화인이라는 명사는 창작자만을 한정하지 않는다. 박홍열 촬영감독은 영화 앞에 앉을 관객의 몫까지 넉넉히 챙겼다. 그는 또 한 번 영화를 어렵지 않은 것으로, 감각할 수 있는 것으로 다루는 일이 중요하다 꼬집었다. 우연을 환영하기. 그것이 박홍열이 건넨 열쇠다.
“이창동 감독과 홍상수 감독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만드는 영화의 의미와 의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동안 누구에게도 그걸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 지점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 영화를 재미있게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며 자꾸만 만든 사람의 의도, 의미에 집착하면 오히려 영화로부터 내가 멀어지는 것 같거든요. 그럴수록 감독이 대단해보일 뿐이죠. 나도 저렇게 멋있게 무언가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갇힐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내 영화는 좁아지고, 나도 점점 작아져요. 제가 한때 그런 기분을 느꼈거든요. 하지만 제가 본 이창동, 홍상수 감독은 어떻게 하면 우연을 더 잘 만날 것인가를 고민하고 준비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나아가 박홍열은 촬영감독의 위치에서, 때로 관객의 입장에서 여행한 두 영화인의 세계를 이렇게 해석했다.
“저는 이창동 감독님 영화가 반복적으로 내 주변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각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버닝>도 <심장소리>도 그렇습니다. 그런 태도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분이 홍상수 감독이기도 합니다. 최근 개봉한 <소설가의 영화>에도 보편적 아름다움을 넘어선,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주변을 느꼈을 때 담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카메라가 알려준 것들
박홍열 촬영감독은 개인 유튜브 채널에 올린 빨래 영상, 다큐멘터리 연출작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첫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촬영작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를 거치며 ‘주변을 느꼈을 때 담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만났을까? 그는 팬데믹 시기에 이뤄진 작업들을 돌이키며 차분히 후일담을 전했다.
“영화를 하다보면 항상 배우나 감독에게 집중하게 돼요. 그래서 의식적으로 그 주변에 관심을 많이 가지려 노력 중입니다.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도 호명 받지 못한 선생님들을 세상에 알리려는 게 목적이었어요. 우리가 사회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지만, 그들 또한 자기만의 가치를 지키며 살아가는 분들이죠. 그들이 쓴 책도 기획했고, 곧 출간 됩니다. 배급사와 영화 개봉도 준비하고 있어요.”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에서는 일상적 도구가 폭력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걸 말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익숙한 사물들을 낯설게 찍었습니다. 사건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오히려 피해자들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최진성 감독에게 기자들이 등장해 인터뷰하는 세트를 짓자고 주장했어요. 다큐멘터리에 세트라니 인위적이잖아요. 보는 이로 하여금 ‘기자가 왜 저기 있지?’ 질문하게 만드는 것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이었어요.”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4월 전주에서, 5월 넷플릭스에서 차례로 선보인 박홍열 촬영감독은 지금 경순, 김미례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 촬영도 이어가고 있다. 경순 감독은 암벽 등반하는 노인들을 바라보며 자전적인 이야기를 엮어내는 중이며, 박홍열 촬영감독과 전작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함께한 김미례 감독은 70년대 여성운동을 다룬 작품을 만드는 중이라고. 그는 고 백남준 선생의 <다다익선>을 아카이빙하거나, 미디어아티스트 남화연 작가와 협업하는 등 현대미술 영역에서 촬영이 할 수 있는 일 또한 병행하고 있다.
박홍열이 카메라를 내려놓을 새가 없는 이유는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입수한, 그가 CGV SVIP 등급이라는 정보로부터 선명해졌다. “제가 어쩌면 영화관 고객 상위 100명 안에 들지도 몰라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나면 항상 반성해요. ‘왜 난 저런 생각을 못하고 있지?’ (웃음) 근데 그것 또한 다른 카메라가 나한테 알려주는 거잖아요. 현장에서도, 극장에서도 카메라는 정말 온몸으로 제게 알려줘요. ‘안다고 말하지 말라’고. 그래서 영화한테 정말 감사한 거예요. 영화를 하지 않았으면 엄청 거만한 인간이 됐을 것 같거든요. 그중에서도 촬영을 하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걸 준비해도 준비한 것과 다른 우연을 만나는 일을 하기에, 앞으로도 카메라를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에요.”
그는 촬영에, 아니 촬영이라는 행위로 얻어지는 각성에 중독돼있었다. 그리고 그 탐닉을 누구보다 건강하게, 다시 카메라를 잡으며 승화하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다가올 김태용 감독의 <원더랜드>에, 김미례 감독과 경순 감독의 차기작에, 촬영감독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박홍열 의 새 작품들에 매혹될 태세를 갖추게 된다. 카메라가 박홍열에게 가르쳐준 것들이 우리에게도 보이기를 기도하면서.
*본 기사는 <'심장소리'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 촬영감독 박홍열을 만나다 ③>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