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엔딩은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이건 누가 누구를 사랑한 것에 관한 이야기이며, 누군가가 누군가를 의심했던 이야기다. 거기에 질문이 필요하지 않은 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다. 바다 앞에서 하나의 진실만을 고집하면 안된다.
와이드스크린의 비율이 높을수록 사물의 왜곡이 일어난다. <타락천사>(1995)처럼 굳이 극한의 렌즈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시네마스코프의 주변부가 휘어져 보이는 현상은 피하기 힘들다. 막스 오퓔스의 <롤라 몽테>(1955)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오른쪽과 왼쪽에서 내려오는 신으로 시작한다. 샹들리에를 붙들고 내려오는 선은 직선처럼 곧아서 화면의 양쪽을 깔끔하게 분할한다. 그러나 이렇게 정교하게 찍은 영화에서도 서커스 천막을 버티는 기둥의 상단부가 휘어져 보이는 건 막지 못했다. 밀로스 포만의 <래그타임>(1981)은 아예 주변부를 왜곡하기로 결정한 경우다. 볼록렌즈로 바라본 양, 바깥쪽 기둥이 볼록하게 휘어진 것을 손대지 않았다. 주인공 얼굴을 변형한 것도 아니고 그냥 넘어가면 문제가 될 일은 아니다. 그런 이미지를 볼 때마다 신경이 쓰이고 불편한 건 내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주변부 사물일수록 일부 왜곡이 일어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신은 내 눈을 둥근 형태로 빚었다. 눈을 흉내낸 카메라 렌즈도 딱딱한 평면이 아니지 않나.
<헤어질 결심>은 총소리로 시작한다. 모호영화사 로고가 없어지면, 두 형사가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서래(탕웨이)의 첫 번째 남편 기도수(유승목)가 산에서 떨어진 즈음부터 박찬욱은 이게 눈의 영화라고 말한다. 그 세계 속의 수많은 눈동자와 그것과 유사한 물체들이 무언가를 본다고 아우성을 쳐대는 영화다. 살인 현장에서 안약을 넣는 해준(박해일)의 거대한 눈동자를 먼저 보게 된다. 이어 죽은 자의 눈동자를 보여줄 때는 더하다. 스크린을 꽉 채운 눈동자 위로 개미가 기어간다. 이어 죽은 자의 시선 위로 바위산과 인물들이 까마득히 멀리 보인다. 잠복근무를 즐기는 해준은 망원경으로 서래를 관찰하고, 볼록렌즈에 잡힌 실내 풍경의 주변부에는 암부 효과를 입혔다. 다음으로 현상수배범 홍산오(박정민)가 죽으면서도 감지 못한 눈동자, 사대천왕의 부리부리한 눈, 부처의 가는 눈을 보았다. 웬일인지 죽은 생선의 눈동자가 해준 부부를 바라본다, 그래서 부부의 상은 흐릿하다.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은 죽은 몸으로 그를 덮치는 대신 눈을 떠 찡긋 바라본다. 그를 따라, 풀장을 채운 물에도 눈이 있다는 듯 핏빛 렌즈로 서래를 본다. 목격자 핸드폰에 붙은 렌즈도 둥근 면을 지녔을 것이다. 해준이 다시 눈동자 속으로 안약을 넣는다. 그는 서래에게 말했다. “나는 똑바로 보려고 노력해요.” 시작부터 사격 연습을 하던 사람이?
<헤이질 결심>은 시네마스코프와 유사한 비율로 찍은 영화다. 처음 본 날, 나는 주변 이미지들이 왜곡돼 있다고 여겼다. 직업소개소 소장의 모니터가 스크린 하단을 지나치게 둥글게 차지한 게 각인된 탓일까. 그외에 해준이 수배범과 맞닥뜨리는 두번의 옥상 장면에서의 난간과, 경찰서 내 해준의 방 칸막이 윗면, 해준이 잠시 들른 휴게소의 내벽 등이 굽어 있었지만, 그건 루키노 비스콘티나 오퓔스도 해결하지 못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박찬욱이 일부러 지구상 물체들의 왜곡된 표현을 나열할 이유는 못 된다. 그런데 스크린의 주변부를 너무 열심히 바라본 결과, 반대로 이 영화 내에 존재하는 수십, 수백개의 수직선과 수평선의 구덩이에 빠졌다. 단순히 벽이나 창 정도가 아니라, 직선으로 가득 찬 더미 아래에서 허우적대는 걸 깨달을 판이다. 화면 속에서 둥근 면이 도드라진 건 세면대 등에 불과하다. 선으로 구성된 세상에서 자유로우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영화를 보다 이미지의 왜곡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건 <헤어질 결심>이 누아르여서다. 누아르는 말끔하게 보여주는 법이 없다. 범인이 눈물을 흘리더라도, 창에 흐르는 비를 눈 위로 겹쳐둔다. 골목으로 뛰어오는 남자를 직접 보여주기보다 벽면 가득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누운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걸 뒤쫓는다. 누아르의 남자들은 리타 헤이워스를 정면으로 대할 눈이 없다. <길다>(1946)에서 잠들었다 눈을 뜬 글렌 포드(조니 역)는 블라인드 너머로 헤이워스(길다 역)를 본다. 헤이워스 앞으로 다가가는 시선은 포드의 것이 아니다. <샹하이에서 온 여인>(1947)의 오슨 웰스는 표현주의식의 왜곡된 공간을 지나 거울방에서 헤이워스와 마주한다. 팜므파탈은 수십개의 거울마다 박힌 분열된 존재인가, 아니면 그는 왜곡된 세상을 상징하는 존재인가. 어쨌든 진짜 헤이워스가 어디 있는지 확인할 길은 하나밖에 없다. 거울을 향해 총을 쏴야 한다. 그런데 정작 해준이 총을 쏜 대상은, 자신의 거울이라 할 홍산오였다. 분열된 자는 서래가 아니라 해준인 건가.
<헤어질 결심>은 이상한 누아르다. 인물이나 세상을 왜곡해 보여주지 않는다. 팜므파탈과 해준 사이에 시선을 방해하는 어떤 가림막도 없다. 정훈희의 <안개>가 흘러나오지만, 적어도 그들이 산을 벗어나기 전까지 안개는 해준의 시야를 흐리지 않는다. ‘마음의 안개’ 같은 유치한 표현을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다. <헤어질 결심>은 산에서 바다로 이동하는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바위산에 오른 해준은 아래쪽 세상을 바라보지만, 빌딩과 구조물로 채워진 땅 너머로 지평선을 바라보지는 못한다. 서래가 가족 소유로 판단하는 산에 올랐을 때도, 해준이 세상을 향해 시선을 돌리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불 켜진 건물들 외엔 없다. 지평선은 없다. 그 밤을 마지막으로 서래와 해준은 산을 벗어나 바다로 향한다. 바닷바위 위에서 서래가 손을 든 장면이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대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의 손짓을 바라보다 죽어가는 아센바흐(더크 보가드)가 몰랐던 진실, 박찬욱은 그 답이 ‘바다를 보라’라고 말한다. 단.순.히.
필립 글래스의 오페라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2013년에 재공연되었다. 그중 유명한 영상물인 파리 샤틀레 극장 실황을 보았다.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고 정신만 복잡해지는 이 오페라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흰빛 막대가 누워 있다 서서히 직각으로 일어설 때다. 단순하나 여전히 난해한 상. 이 글의 내용으로 치자면, 그 막대는 누운 것인가, 선 것인가. 수평선인가, 아니면 수직선인가. 오페라에서 해변에 앉은 아인슈타인은 없다. 그는 귀퉁이에 등장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사라진다. 제목대로 나는 아인슈타인이 해변에 앉은 모습을 상상했다. 원자폭탄 개발에 기여한 아인슈타인은 평화주의자인가, 반대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의 역사에 동조한 악당인가. 여기에 답하는 것은 수직선과 수평선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0과 1 중에 선택하는 것은 디지털 시대의 질문이기에,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답할 마음이 없을 것이다. 인간이 주물럭거려 만든 것 중에 완전한 수직선이나 수평선은 있을 수 없다. 꼿꼿한 서래라고 해서 다르진 않다. 그것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하다.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구분되는 세계에서 바다로 이동하면 다른 세상의 진실과 대면하게 된다. 직선으로 보였던 땅이 기실 굽은 것임을 바다는 증명해 보인다. 바다는 0과 1 사이에 수많은 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여러 숫자를 발음해 들려주는 오페라다. 글래스처럼, 박찬욱은 디지털이 등장하기 훨씬 전에 필름으로 영화를 시작했던 사람이다.
위대한 누아르 <키스 미 데들리>(1955)에서도 주인공은 해변가 집에 도착한다. 그러나 <키스 미 데들리>는 미스터리의 답을 끝내 말하지 않는 작품이다. 스크린 밖으로 떠나는 주인공 눈앞엔 온통 검은 바다뿐이다. <헤어질 결심>에서도 선명한 바다는 보기 힘들다. 그나마 밝은 바다가 등장하는 신은, 핸드폰이 발견된 직후 해준이 바위 절벽 위에 섰을 때인데, 박찬욱은 절벽 주변으로 시선을 차단한다. 해안선은 비밀처럼 시선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결말부에서 서래와 해준이 바다에 도착한다. 아직 밤이 바다로 내려오기 전이다. 먼저 서래가 바다 앞에 선다. 그런데 그 바다에서 행동하지 않고, 기묘한 바위들이 모인 해안으로 이동한다. 해준도 바위 군상을 지나 바다에 도착하지만, 이미 시간은 만조를 향할 때다. 바위 군상은 스즈키 세이준의 <지고이네르바이젠>(1980)에 등장하는 바위 문을 닮았다. 바위산 아래로 난 구멍을 오가는 인물들은 흡사 죽음과 삶 사이를 넘나드는 듯하다. 죽음의 산 - 거대한 바위산을 내려온 서래와 해준도 다르지 않다. 인간에게 유일한 경계가 있다면 그건 삶과 죽음이다. 사는 사람이 있으면 죽는 사람도 생겨야 한다.
영화의 엔딩에 와서도 박찬욱은 선명한 해안선을 보여주지 않는다. 보여주지 않겠다는 의지라기보다, 한명은 보았고 한명은 보지 못한 것이 안개에 싸인 희뿌연 해안선으로 표현될 따름이다. 아무리 내 눈이 붙들고 싶어 해도 지는 해 아래 해안선의 생명은 곧 끝난다. <헤어질 결심>의 엔딩은 질문의 행위가 아니다. 서래는 서구 누아르에 등장하는 건조한 팜므파탈과 사뭇 다르다. 중국에서 넘어온 사람이라고 해서 다오이난의 누아르에 나오는 매서운 팜므파탈과도 닮은 건 아니다. 겉과 안이 다 우아한 존재는 아니었으나 그는 사랑 앞에 단호하다. 물론 반대의 답을 꺼내는 것도 가능하지만 영화의 엔딩은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이건 누가 누구를 사랑한 것에 관한 이야기이며, 누군가가 누군가를 의심했던 이야기다. 거기에 질문이 필요하지 않은 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다. 바다 앞에서 하나의 진실만을 고집하면 안된다.
영화 끝 무렵, 카메라가 하늘쪽을 향하다 크게 아래쪽으로 움직인다. 서래로부터, 해준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으로 이동하는 모양새다. 진실의 스펙트럼은 그렇게 넓다면 넓다. 결국엔 하나의 진실로 수렴될지라도 수많은 이미지의 잔상들이 각기 다른 진실의 빛에 의미를 부여한다. <헤어질 결심>은 그 의미들 사이로 길을 비추며 미묘하게 안내한다. 안내받은 길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건 서래와 해준이 산사를 찾았을 때다. <밀회>를 언급했다는 박찬욱은 행복한 순간을 노엘 카워드에게서 빌려온다. 카워드가 오리지널 희곡에 붙인 제목은 <멈춰선 존재>다. 하지만 산사의 정서를 느끼노라면 카워드의 제목은 <조용한 삶>처럼 느껴진다. 가슴을 졸여야 할 관계의 이야기에 <멈춰선 존재>와 <조용한 삶>이라니, 그러니까 대가들이다.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서래의 격정에 잠을 못 이루었다. 그의 죽음은 <흐트러지다>(1964)와 <사랑한다면 이들처럼>(1990) 사이 어디쯤일까 궁금했다. 두 번째로 보고 극장을 나서던 날에도 내 눈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나는 조용한 삶 속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전형적인 구식 구도를 가져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만든 누아르 <헤어질 결심>은, 마찬가지로 전혀 다른 색깔의 진실 앞으로 나를 데려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