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제2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 소은성 이론비평 - 요청하는 이미지와 지연되는 말들
2022-07-16
글 : 소은성
<드라이브 마이 카>(2021)를 중심으로 살펴본 하마구치 류스케의 대화들

1.

하마구치 류스케에 따르면, 이야기는 어둠으로부터 온다. 그 어둠은 실질적인 빛의 부재가 아닌, 아직 보이지 않는 어떤 상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드라이브 마이 카>의 첫 번째 시퀀스에서 가후쿠와 오토가 새벽 창문을 등지고 앉아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 그를 덮고 있는 바로 그 어둠이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사실 벗은 몸의 윤곽일 뿐이며, 그림자와 다름없는 그 몸이 이야기를 전하는 소리의 출처라고 판단하도록 이끈 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오래된 습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습관에 기댄 판단은 대부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옳다. 이 시퀀스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오토임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이 느슨해진 이 나른한 순간을 다시 돌이켜보는 것은 그의 이름 ‘오토’(音) 때문이다. 그는 ‘소리’를 뜻하는 자신의 이름에 적합하게도 이 영화에서 카메라 앞의 보이는 대상으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토의 죽음 이후 2년이 지난 시점부터 영화의 주무대는 도쿄에서 히로시마로 옮겨간다. 오토의 남편 가후쿠 유스케가 책임 연출가로서 연극 워크숍에 참여하기 위해 히로시마로 이동한다. 이때 그의 이동 수단은 자동차이며, 이 빨간색 사브가 어떤 공간인지 보여주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진다. 유스케가 운전하는 자동차에서는 여느 때처럼 오토의 목소리로 녹음된 <바냐 아저씨>의 대사가 흘러나온다. 이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동안,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와 카세트테이프의 릴 구멍, 어두운 방에서 대사를 녹음하는 오토의 뒷모습, 그리고 대사를 말하는 입이 몽타주된다. 이후 유스케의 사브는 마치 귀신 들린 자동차처럼 끊임없는 오토의 목소리와 함께 히로시마를 떠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동안 극의 흐름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희곡의 대사를 반복해서 듣는 것이 오래된 습관이라고 유스케는 말하지만, 그것은 오토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행위 자체와 떨어뜨려놓고 생각할 수 없다.

위의 몽타주에서도 역시 오토는 소리의 출처로서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유스케의 시점이기도 하다. 도쿄에서의 유스케가 아직 살아 있는 오토를 직면하지 못했던 순간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가 오토의 정사를 목격하고도 그 장면을 회피하려던 것은 차라리 영화의 서사적인 요구에 가깝다. 여기에서 보다 중요한 지점은, 목격의 순간에 오토를 바라보는 유스케의 모습이 거울의 반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유스케에게 페르세우스의 방패와도 같이 기능하게 되는 매개물의 이미지가 성립한다. (그날 밤, 공항 근처 호텔 방에서의 영상통화는 그것의 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오토에게 돌아가는 길에 유스케가 당한 교통사고는 그 이미지로부터 파생된 에피소드다. 사고는 그가 점차 시야를 상실하게 되는 질병인 녹내장을 앓고 있기 때문에 일어났다. 하지만 그때 그는 <바냐 아저씨>의 대사를 읊는 오토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유스케의 진행 중인 시각 상실은 어쩌면 그가 선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서 두 번째로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야기를 오토가 발설할 때, 그리고 그 이야기가 (물론 오토 스스로는 알지 못하지만) 오토의 들켜버린 정사를 연상시킬 때, 유스케가 팔로 자신의 눈을 가려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렇듯 오토를 더이상 직면할 수 없게 되자, 그의 목소리는 유스케가 불완전하게나마 그와 닿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매개의 형식이 된다. 문제는 불완전함에 있다. 이 매개의 형식은 대상을 온전히 수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포기할 수 없는 어떤 것인데, 이때의 매개는 대상으로부터 (상처가 되는 대상이라면 더더욱)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불완전함이 유스케로 하여금 오토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어둠 속에, 보이지 않는다는 불안 속에 남겨놓는다.

오토의 ‘칠성장어 소녀’ 이야기, 특히 그 결말은 유스케의 불안에 말을 걸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짝사랑하는 소년의 집에 숨어든 보이지 않는 소녀의 이야기다. 여느 때처럼 비어 있는 집에 몰래 들어간 소녀는, 역시 그 집에 침입한 도둑을 살해하고 난 뒤 그곳을 빠져나온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그가 다시 찾아간 소년의 집 현관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다. 그는 카메라를 향해 자신이 사람을 죽였음을,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기에, 자신의 입모양이 보이도록 말을 한다. 오토가 정작 유스케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결말에서, 칠성장어 소녀는 오토의 처지로부터 정확히 반전되어 있다. 소리는 들리지 않을지라도 소녀가 자신을 내보이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섰다면, 오토의 모습은 자꾸만 유스케의 시야에서 벗어나 소리로만 남는다. 결국 이것은 오토 자신의 불안과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 오토는 자신이 유스케에게 들키기를 기다리며 이야기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오토와 유스케, 두 사람 모두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토는 유스케가 운전하는 자동차 안에서 ‘칠성장어 소녀’ 이야기가 계속될지 기다려야 할지 고민한다. 그러고 나서 이어지는 장면은 유스케가 연출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다. “우리 헤어지는 게 어때? 그게 나을지도 몰라./ 내일 목을 매자. 고도가 안 오면 말이야./ 만일 온다면?/ 그럼 살게 되는 거지.”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삶의 지속을 의미했다. 딸의 죽음과 함께 행복한 시간은 끝나버렸지만, 섹스로부터 이야기를 촉발시키는 오토의 기벽을 통해 두 사람은 대화를 계속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칠성장어 소녀’의 이야기를 유스케에게 거부당한 오토가 비로소 대화를 요구했을 때, 유스케는 그 대화를 지연시키기 위해 자동차에서 녹음테이프를 들으며 집 밖을 헤맨다. 그리고 오토는 돌아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다 끝내 세상을 떠난다.

유스케에게는 오토의 이야기 역시 그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테이프처럼 두 사람을 만나게 하면서도 서로 마주보지 않아도 될 수 있는 알리바이를 제공했던 것이다. 유스케는 자신이 일찍 집으로 갔더라면 오토를 살릴 수도 있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오토의 죽음은 그를 직면하지 못한 유스케의 비겁함에서 비롯되었다. 딸의 기일에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신의 한숏에서, 오토는 마치 자신의 이야기 속 소녀처럼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본다. 그에 따른 리버스숏에서는 방의 한쪽 불 켜진 조명등과 함께, 유스케의 반영이 머물렀던 거울이 어둠에 잠긴 채 카메라 정면으로부터 비껴 있다. 유스케와 마주보지 못한 오토는 그 어둠 속으로 완전히 침잠해버렸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두 사람의 관계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어둠으로부터, 그럼에도 오토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듯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 역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2.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어둠은 하마구치 류스케에게 막연한 은유가 아니다. 스크린 안에서 인물들은 서로 대화하기 위하여 그들 각자 앞에 놓인 보이지 않는 공간을 바라봐야 할 때가 있다. 그 공간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는 프레임의 연장으로서 외화면 공간으로 인식된다. 다시 말해, 한 인물이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을 할 때, 그 시선이 향한 프레임 바깥에는 대화 상대자가 시선의 주체와 동일한 디제시스 공간에 함께 존재한다. 미셸 시옹에 따르면, 이러한 공간 분할,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분리해 위치시키고 그것을 숏과 리버스숏의 관계로 데쿠파주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 말을 보여주기 위해 고전적인 유성영화가 고안해낸 방법이다. 이것은 대화 장면에서 카메라를 위치시킬 때, 현실 공간보다 등장인물의 말이 더욱 중요한 고려 대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물들 사이의 대화 장면은 영화가 현실을 담보한다는 통념에 대한 강력한 방증이 될 때가 있다.

영화에서 대화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굉장히 제한적이다. (통신 기기를 이용한 원거리 대화가 아닌 이상) 대화하는 인물들이 같은 공간을 점유하면서, 동시에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향해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확인시켜야 한다. 이러한 요구로부터, 무엇보다 관객이 빠지게 될지 모를 혼란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던 고전기의 영화산업은 마스터숏과 가상선을 발명했다. 먼저 (대화의 최소 단위로서) 두명의 인물이 위치한 공간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카메라가 자리한다. 그런 다음 마주보는 두 인물의 (측면에서의) 시선이 서로 일치하는 가상의 선이 설정된다. 카메라는 가상선을 넘어갈 수 없고, 이 시선의 연결선을 축으로 하여 180도 안쪽에서 조금씩 프레임의 크기와 각도를 달리해가며 각각의 인물을 번갈아 찍는다. 이때 가장 흔하게 쓰이는 방식 중 하나는 어떤 인물을, 대화 상대방의 어깨를 비롯한 다른 신체부위를 걸고 촬영하는 오버 더 숄더 숏이다.

하지만 다니엘 위예와 장-마리 스트로브의 경우, 그들은 오버 더 숄더 숏을 거부한다. A와 B라는 두 인물이 대화를 한다고 할 때, 먼저 오는 숏에서 A의 뒷모습 일부를 걸고 B의 정면을 보여준다면, 그다음에 이어지는 리버스숏에서는 그 역의 구도를 보여줄 것이다. 스트로브는 이와 같은 숏-리버스숏의 조합을 통해 영화 안에서 구성되는 공간이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앞선 숏에서 A의 뒤편에 카메라가 위치했었던 공간은, 리버스숏에서 카메라가 자리한 적이 없는 공간으로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위예-스트로브는 영화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공간의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들 영화에서 고전적이고 규범적인 데쿠파주가 (물론 가능한 한계 내에서) 허용되지 않는 이유다. 그러한 데쿠파주를 필요로 하는 영화들에서는 때때로 인물들이 실재하지 않는 공간을 바라보며 말을 하고, 실제 그 장소에서 들려올 수 없는 말들, 소리들에 반응해야 한다.

극영화로 분류되는 거의 모든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드라이브 마이 카> 역시 인물 두명 이상이 등장하여 행해지는 대화로 대부분의 장면들이 구성된다. 규범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 대다수의 대화 장면들은 이 영화를 무척이나 안정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다만 몇개의 장면들과 그 조합이, 이 영화가 스스로에게 부여된 규칙을 실은 당연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자동차의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유스케와 다카츠키가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신을 들 수 있다. 처음에 카메라는 통상적으로 허용되는 위치에서 두 사람을 각각 번갈아 잡고, 그때마다 그들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서로 시선을 일치시킨다. 하지만 어느 순간, 카메라가 거의 다카츠키가 앉아 있는 위치로 이동하고, 유스케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이때 유스케는 이전과 달리 몸을 카메라의 정면에 가깝게 틀며 시선은 렌즈를 바라본다. 대화 중인 인물에 의해 카메라의 위치가 확연히 드러나면서 규칙을 위반한 이 숏은, 동일한 구도의 리버스숏으로서 다카츠키의 얼굴 정면 클로즈업과 결합한다.

이 신에서의 규칙 위반은 어떤 면에서 카사베티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존 카사베티스의 영화들이 공간에 대한 고려 없이, 즉 마스터숏은 누락되고 대화하는 인물들의 시선은 일치하지 않으면서, 특히 하마구치 류스케에 따르면 오로지 인물들의 감정만으로 숏의 연결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로 여기에서 유스케는 오토가 다른 남자들과 가졌던 관계들에 대해 알고 있으며, 그중에 자신이 목격한 오토의 정사 상대가 다카츠키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내비친다. 따라서 디제시스 내부에서 볼 때, 유스케의 시선에 들켜버린 것은 사실 카메라가 아닌 다카츠키다. 이렇게 카메라를 매개로 디제시스 내부와 외부가 조응하면서 영화에 일종의 구두점을 찍자, 두 인물의 대화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다카츠키는 자신이 오토로부터 느꼈던 감정들과 함께, 유스케가 그로부터 전해듣지 못했던 ‘칠성장어 소녀’이야기의 결말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미 이야기한 대로, 이 장면은 디제시스 내부의 감정선만이 아니라, 모순적이게도 디제시스의 외부에 존재하는 시선 또한 전경화한다. 위예-스트로브의 영화가 규범을 거부함으로써 규약에 의해 가려진 공간을 폭로하듯이, 이 영화에서의 규칙 위반 또한 인물의 시선이 지시하는 실재의 공간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곳은 단순히 카메라가 위치한 공간만은 아니다. 또한 거기에 있어야 할 대화의 상대자가 부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유스케 역의 배우 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이곳, 아직 보이지 않는 다카츠키의 자리를 바라보며 말을 건네야 한다. 이때 그의 말에 대한 응답 역시 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물론 스크린에서 다카츠키의 리버스숏으로 제시된다. 다시 말해, 숏과 리버스숏의 조합으로만 가능한 이 대화 장면에서 반응은 아직 보이지 않는, 그래서 기다림이 요구되는 어둠으로부터 온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대화가, 그리고 그 대화로부터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어둠으로부터 이야기가 온다는 것은 하마구치 류스케에게 결코 막연한 수사가 아닌, 하나의 영화적인 은유다.

3.

대화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의 요구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그의 픽션적 인물들에게 부과한 극적 장치만은 아니다. 3·11 도호쿠 대지진을 다룬 세편의 다큐멘터리, <파도의 소리>(2012), <파도의 목소리: 신치마치/게센누마>(2013), <노래하는 사람>(2013)에서 그는 생존자들의 대화를 주요한 형식으로 취한다. 물론 이러한 대화의 형식 자체가 현실의 기록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향한 통념과 충돌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들에서의 대화 장면은 하마구치가 어떠한 사태의 기록만을 의도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여기에서도 그는 평범하게 흘러가던 규범적인 대화 장면을 중단시키고, 마주 보고 앉은 두 인물의 한가운데에 카메라를 위치시킨다. 그에 따라 영화의 인물들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 말을 하거나,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하마구치의 극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처럼, 마찬가지로 아직 보이지 않는 대화의 상대자를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로서는 더욱 생경한 이 이미지는 극영화인 <해피 아워>(2015)에서 보다 구체화되고 정교해진다. 중심잡기 워크숍이 끝나고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 준은 자신이 이혼 소송 중임을 밝힌다. 그것은 (사쿠라코를 제외한) 친구들에게도 처음 고백하는 일이지만, 그 자리에는 워크숍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도 함께하고 있다. 결국 아카리가 그 사실을 왜 이제야, 이런 자리에서 말을 하는 것인지 따지자, 준은 그 말이 하고 싶어졌다고 얘기한다. 여기에서 카메라는 준을 단독 숏으로 잡는데, 뒤이어 카메라 정면을 바라보는 우카이의 단독 숏이, 그의 질문과 함께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준의 단독 숏으로 넘어가면, 준 역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다시 여기서부터 나머지 사람들의 단독 숏이 삽입되고 준의 목소리가 외화면으로부터 들려온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카메라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준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다. 그의 말이 그치자 결국 카메라는 원래의 위치로 물러난다. 준의 정면 숏은 그가 하는 말을 대화로 성립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숏을 기다리는 것에 결국 실패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준은 (마치 오토처럼) 이러한 실패들로부터 사라져 결국 돌아오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인간이기 때문에 입는 상처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이를테면, 쓰나미가 휩쓸고 간 이미지와 같은 것들을 아무리 들여다본다고 해도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그 상처는 영원히 타인의 것이며 어둠 속에 있다. 다만 언어는, 누군가의 말처럼, 인간의 가장 바깥으로 드러난 정신이기 때문에, 상처 입은 언어를 통해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이것이 하마구치 류스케가 시도한 다큐멘터리의 대화들이 중요성을 갖는 지점이다. 이 영화들에서 두 인물 사이에 놓인 카메라는 직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없는 상처와 어둠을 매개하며, 응답을 기다리는 말들과 그 요구에 따른 반응들을 구성한다. 하마구치 류스케에게 대화는 결코 두 사람이 만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다.

다시, 앞서 언급했던 오토의 정면 클로즈업숏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여기에는 유스케와 다카츠키 대화 장면의 숏-리버스숏 조합처럼, 오토의 숏과 같은 구도의 유스케 정면 클로즈업숏이 결합될 수도 있었다. 불행히도 여기에서의 리버스숏은 어둠에 잠긴 방이고, 이것은 오토와 유스케의 관계가 갖는 어둠이다. 그러나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에서 그 어둠은 관계에 있어 반드시 어떤 절망만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어둠에 잠긴 방은 오토 역의 배우 기리시마 레이카가 바라본 상대방의 부재, 아직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토는 어두운 방을 바라보면서도 유스케와 만나게 되기를, 대화할 수 있기를 기다릴 수 있다. 따라서 유스케를 대신하여 눈앞의 어둠과 대화하듯 만들어진 오토의 이야기는, 칠성장어 소녀가 소년의 방에 자신의 물건들을 징표로 남겨놓듯이, 이 기다림의 징표다.

오토는 그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의 기다림에 대한 응답을 받는다. 그것은 영화의 중반부, 히로시마의 유스케와 배우들이 야외에서 공연 연습을 할 때다. (이날은 미사키가 연습을 지켜본다.) 유나와 재니스가 그들이 연습 중인 연극 <바냐 아저씨>의 한 장면을 실연한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이 서로 포옹을 하고, 뒤이어 카메라는 재니스의 어깨 위로 보이는 유나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여기에서 오토의 정면 클로즈업숏과 유사한 구도가 만들어지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유나는 카메라 정면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때 유나의 숏은 역의 구도를 갖는, 재니스의 리버스숏과 결합한다. 유나와 재니스의 실연이 끝나자, 유스케는 두 사람 사이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유스케의 이 말은 영화의 클라이맥스, <바냐 아저씨> 공연 무대에서의 유스케 자신과 미사키, 두 사람 사이의 숏-리버스숏 조합을 예비한다. 영화의 중심 서사인 두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이해하게 되는 과정으로 요약 가능하다면, 정면 숏과 그것의 리버스숏으로서 관계를 맺는 이미지들로 영화를 재구성했을 때, 영화는 무엇보다 유스케가 관계의 어둠을 지나 타인과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는 오토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고, 유나와 재니스 사이에 무언가가 일어나는 것을 본 후에 다카츠키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미사키와 함께한 홋카이도로의 여정으로부터 그는, 미사키의 정면 숏에 대한 리버스숏으로서, 연극의 디제시스 안에서 소냐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화의 요청에 응답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이때 미사키는 카메라의 렌즈를 바라보지 않는다. 유스케는 어둠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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