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한산: 용의 출현' 배우 변요한 "한끗의 차이가 의미하는 것"
2022-07-20
글 : 이자연
사진 : 최성열

- 첫 악역이 무려 이순신의 적이다.

= 작품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악역으로 보이지만 그보다는 안타고니스트(작품 속에서 주인공에 대립적이거나 적대적인 관계를 맺는 인물)로 정의하고 촬영에 임했다. 오로지 악역으로만 규정해 연기하면 캐릭터가 납작해지고 입체성을 드러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감정의 폭이 좁아지지 않도록 야만적이면서도 패기가 있고 야망이 넘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려 했다.

- 작품에 함께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 한창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를 촬영 중일 때, 분장팀이 <한산>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만 해도 나와 무관하다고 여겼다. 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만난 일본어 선생님도 이 작품에 참여할 거란 소식을 들었다. 그때도 역시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웃음) 그러다 운명처럼 와키자카 역을 제안받았고, 시나리오를 접하자마자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로서 작품이 들어온다는 건 무척 큰 행운이고 감사한 일이다. 다만 본격적인 준비 과정에 들어서니 예상했던 것보다 힘들었다.

- 어떤 점이 힘들었나.

= 인물을 체화하는 예열 과정이 오래 걸렸다. 보통 연기하기 전에 인물의 태도를 먼저 파악한다. 그래야만 나와 캐릭터를 정확하게 일치시킬 수 있다. 그런데 초반에 와키자카의 에너지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인물의 다양한 특징을 생각하면서 그 구간을 넘어가니 조금씩 나아졌다.

- 왜군의 장수를 연기하느라 러닝타임 내내 일본어로 말한다. 언어 습득을 위해 일본어 선생님과 함께 생활하며 공부했다고.

= 기존의 언어 습관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중국 유학 경험이 있어 외국어 습득이 상대적으로 빠르지만 나만의 억양이나 발음 습관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 것을 모두 리셋하고 새롭게 다지는 데 공을 들였다. 시나리오의 일본어 대사도 고증에 맞춰 사극 톤으로 감수받은 상태였다. 대사의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 억양과 음조도 일정하게 조절해야 했다. 당시 주어진 시간이 한달여밖에 남지 않아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 왜군을 맡은 다른 배우들과 일본어로 합을 맞추는 과정은 어땠나.

= 언어의 길이와 감정의 길이가 맞아떨어지도록 배우들과 서로 점검했다. 감정 분석에 맞춰 대사가 입에 달라붙을 때까지 완벽하게 암기하고 촬영할 때는 시험 보듯 여러 버전을 시도했다. 모두 치열하게 준비해온 덕에 외국어로 연기하는 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 영화는 이순신 장군과 와키자카가 해전에서 만나기까지 두 수장의 입장과 고민을 나란히 배치해 보여준다. 리더로서 이순신 장군과는 다른 와키자카의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나.

= 영화를 준비하면서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읽고 그다음에 와키자카기(脇坂記, 협판기)를 접했다. 그러다 와키자카가 ‘나보다 더 치밀하고 전략적인 건 이순신 장군이다’라는 기록을 남긴 걸 알게 됐다. 그걸 보고 나니 꼭 한끗을 놓치고 싶었다. 수장으로서 군대를 진두지휘하며 패기 있게 나아가되 이순신 장군과는 다른, 아주 작은 한끗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 김한민 감독과의 첫 영화인 데다 시대극에 전쟁영화다. 감독과 합을 맞추는 과정은 어땠나.

= 김한민 감독님은 오랫동안 이순신 장군을 공부해왔다. 그래서 극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큰 의지가 됐다. 사무실에서 감독님과 나란히 앉아 대본을 한장 한장 넘기며 궁금한 내용을 정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감독님은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해 많이 아는 만큼 머릿속 그림이 뚜렷했다. CG 작업이 많아서 배우들이 합의한 대로 연기하는 게 무척 중요했는데, 감독님의 명확한 청사진 덕에 세세한 타이밍을 원활하게 맞춰나갈 수 있었다. 배가 들어오는 타이밍, 뒤돌아보는 타이밍, 거북선이 들어오는 타이밍 등 액티비티 리딩을 통해 배우들이 정확한 약속을 만들어나갔다.

- 와키자카는 한국에서 역사적 평가가 명확한 인물이다. ‘악’이라는 고정된 이미지가 있는 상태에서 캐릭터에 서사를 부여하는 건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 같다.

= 먼저 전쟁 같은 역사적 사건은 사실을 왜곡해서 받아들이거나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번 기회에 배우로서 본질을 생각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또한 영화 준비 초반에 와키자카를 오로지 악역으로만 해석했다. 그런데 그 상태로 연기하려니 인물이 입체적이지 않고 풍성하지 않았다. 그의 행보가 이미 그를 악역이라고 가리키고 있는데 나조차 그 이상을 못 본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역할이 너무 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책임감과 자기만의 이상을 가진, 그러나 이순신 장군과의 대적에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내려 했다.

- 화려한 비주얼도 눈에 띈다. 갑옷의 무게가 25kg에 달하고, 땀에 젖으면 또 10kg이 불어났다고.

= 그래서 촬영이 끝날 때까지 무제한으로 체중을 증량했다. 너무 힘든 나머지 나만의 방안을 찾은 것이다. 처음 갑옷을 입었을 땐 내 체구보다 커서 축 처졌다. 날쌘 무사의 모습을 보이려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체급으로 중심을 잡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옷이 몸에 맞으니 행동도 훨씬 편해졌다. 영화에서 조금씩 몸이 불어나는 걸 볼 수 있다. (웃음)

- 이순신 장군과 와키자카가 대면하는 장면이 많지 않다. 박해일 배우와는 어떤 식으로 박자를 맞춰갔나.

= 조선군 팀과 왜군 팀이 서로 나뉘어 있어 자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각 팀의 진행 상황을 공유하거나 서로의 근황을 나누기 위해 촬영 중간중간 박해일 선배와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박해일 배우는 선배로서 후배에게 부담이 아닌 용기와 책임감을 심어준다. 자연스레 동력을 많이 얻었다. 피곤하고 바쁜 와중에 이런 시간을 내어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내가 인복이 많다. (웃음)

- 데뷔 13년차다. 독립영화 <토요근무>와 <목격자의 밤>에서 연기한, 현실에 치이다 못해 초연해진 청년의 얼굴도 여전히 선한데, 그 시절을 돌아보면 어떤가.

= 그땐 변요한이라는 사람으로 승부를 걸어야 했다. 독립영화나 연극 무대에 오를 때면 꼭 나로부터 시작하는 연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토요근무>와 <목격자의 밤>의 ‘나’는 정말 불안해 보였고, 또 실제로 불안했다. 그 나이대에 할 수 있었던 연기다. 지금은 눈이 하나 더 생겨서 변요한을 드러내기보다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나를 올바르게 쓰려고 한다.

- 독립영화에서 대중적으로 지평을 넓힌 계기는 단연 tvN 드라마 <미생>의 한석율이다. 직장인과 사회 초년생에게 많은 공감을 받았다.

= 캐릭터 강한 연기를 그때 처음 해봤다. 단발머리도 하고 입에서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내면서 한석율의 성격을 드러냈다. 독립영화가 변요한의 정체성이 중요하다면, 상업 콘텐츠는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스파크 튀듯 접신하는 느낌으로 임했고, 내게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팬들의 화력도 좋았는데, 아쉽게도 그런 주목이 익숙하지 않고 서툴러서 그 상황을 즐기진 못했다.

- 그때보다 연차가 쌓이면서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진 부분이 있나.

= 새로운 인연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익숙해졌다. 나는 촬영 현장에 가는 게 그렇게 좋다. 주어진 시간 동안 동료들과 최선을 다해 서로 돕고 사랑하는 과정이 무척 귀하다. 내가 나를 외롭게 만들었던 날들이 있던 만큼 이 소중함을 여실히 깨달아간다는 게 가장 큰 변화인 것 같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