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한산: 용의 출현' 배우 박해일 "활을 든 군자, 이순신의 재해석"
2022-07-20
글 : 송경원
사진 : 최성열

- 올해 참 바쁘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이후 김한민 감독의 <한산>이 연이어 개봉한다.

=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한산>의 개봉이 밀리면서 공교롭게 일정이 이렇게 되었다. 보통 작품마다 휴식기를 가지는 편이라 연달아 작품을 찍은 건 물론이고 연달아 관객과 만나는 것도 처음이다. 한편으론 극장가에 다시 사람이 모이는 시기에 이렇게 선보일 수 있어 다행스럽다. <한산>은 2020년 여름 무렵에 찍었다. 한산대첩도 여름에 있었던 전투인데 특히 올해는 한산대첩 430주년이라고 한다. 여러모로 남다른 의미가 있다.

- 2019년에 임상수 감독과 <행복의 나라로>를 마친 후 2020년 여름 <한산>, 같은 해 10월경 <헤어질 결심>을 촬영했다. <행복의 나라로>가 아직 개봉하지 않았으니 촬영을 마친 순에서 거꾸로 개봉하는 셈이다.

= 의지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임상수, 김한민, 박찬욱 감독님까지 어마어마한 분들과 작품을 연달아 촬영하는 건 배우로서도 쉽지 않은 도전이자 진귀한 경험이었다. 세분 다 색깔도 다르고 현장에서 하고자 하는 바도 달랐다. <한산> 바로 직전 <명량>에서 이순신을 맡았던 최민식 선배님과 <행복의 나라로>를 함께한 것도 신기했다. 운명이라고 하면 거창하지만 보이지 않는 연결들이 오늘로 우리를 이끄는 기분이다.

- 이순신 장군 역을 맡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다. 최민식 배우도 <명량> 때 그 고뇌를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어려움을 여러 번 토로했다. 어떤 조언을 해주던가.

= 전혀. 말씀은커녕 아예 모른 척하시다 한참 뒤에 슬며시 딱 한마디를 건네셨다. “고생 좀 해봐라.” (웃음) 그때 최민식 선배님의 표정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동안 해오셨던 영화의 흔적들이 켜켜이 묻어나는 특유의 주름이 있지 않나. 세월이라기보다는 누적된 영화들의 주름이라고 해야 할까. 한껏 미소 띤 얼굴로 그 말을 툭 건네시는데 어떤 말보다 무겁고 진심 어린 격려로 다가왔다.

- 김한민 감독과의 오랜 인연이 출연을 결정한 이유 중 하나인가.

= 물론이다. <극락도 살인사건>(2007)과 <최종병기 활>(2011)을 함께해 서로의 기질을 잘 알 뿐 아니라 함께해온 시간 이상의 믿음이 있다. 그래서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감독님에게 되물었다. 제가요? 이순신이요? 제가 장군감입니까? 예상했던 반응이라 그랬을까 크게 웃으시더라. 일단 시나리오를 읽어보라고 권해서 봤더니 감독님의 의도가 어렴풋이 잡히는 듯했다. <명량>과는 달랐다. <명량>에서 최민식 선배님이 화염방사기처럼 에너지를 내뿜었다면 이번에는 인물의 내면으로 좀더 밀착된 정서들이 강했다. 김한민 감독님이 나를 염두에 두고 고민한 흔적도 느껴졌다. 동시에 이순신이라는 위대한 실존 인물의 궤적을 벗어나면 안되는 만큼 재해석의 밸런스를 맞추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 <명량> <한산>에 이어 개봉할 <노량: 죽음의 바다>(이하 <노량>)까지 3부작의 독특한 점은 최민식, 박해일, 김윤석 세명의 다른 배우가 이순신 역을 맡았다는 거다.

= 이순신 장군이기에 가능한 시도였을 것이다. 이순신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의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가 무엇인지 상상하는 것이 중요했다. 삼부작 프로젝트는 중요한 전투의 성격과 의미에 맞춰서 인물의 다양한 면모를 부각시키는 과정이다. 가령 <명량>이 절망 앞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의지라면 그에 앞선 <한산>은 이순신의 준비성과 차분함, 지적인 면모와 과단성을 읽을 수 있는 위대한 전투다. 최후의 전투인 <노량>에서도 이순신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김한민 감독의 표현을 빌리면 <명량>에서는 불굴의 용기를 지닌 장수, <노량>에서는 세월의 무게만큼 묵직해진 현명한 장수, 그리고 <한산>에서는 미래를 내다보는 지장(智將)의 면모가 도드라진다.

=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억지로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흠결투성이인 사람이다. 배우로서 나는 캐릭터를 통해 결핍을 연구하고 채워나가는 편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알면 알수록 위대한 인물이라는 확신만 들 뿐이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감독님의 의도와 의지를 확인했지만 그럼에도 고민이 오래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벽이라고 해도 좋겠다. 심지어 이걸 잘못 표현했을 때 내가 배우를 계속할 수 있을지 두려움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역할이었다. 어쩌면 그 막막함이 한산대첩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심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산도 앞바다에서의 전투는 단지 한번의 교전이 아니라 조선의 명운을 짊어진 역사의 분기점이었다. 그 무게 앞에서 어떻게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으로부터 이순신 장군에게 다가갔다.

- 설명을 듣고 보니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와 책임감, 두려움에 맞서 한 걸음씩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영화 속 이순신 장군의 행보를 똑 닮았다.

= 감사하다.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 이순신 장군이 느꼈을 막막함, 책임감, 고독감 등 인물 전체를 표현할 수 없다면 상황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존 작품 속 이순신과 다른 모습을 보여줄 여지가 있을 거라 믿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이순신의 면모가 무엇일지 상상하면서 유현목 감독님의 <성웅 이순신>(1962)부터 찾아볼 수 있는 레퍼런스는 최대한 다 찾아본 것 같다. 언젠가 이순신 장군의 군자 같은 면모를 칭송하는 한줄의 글귀를 본 적 있다. “그는 많은 수양을 쌓은, 도를 닦는 가난한 선비와도 같다.” 그 문장이 전환점이 되었다. 광화문 광장에 서 있는 위엄 넘치고 당당한 무인의 면모와는 또 다른, 붓을 든 선비이자 활을 든 군자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고요하게 내면을 갈고닦는 인물. 감정의 희로애락에 휩쓸리지 않는 거대한 산. 나를 갈고닦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고민의 시간이었다.

- <한산>의 이순신은 거대한 산밑의 호수 같다. 호수같이 맑고 깊은 잔잔한 수면 위에 상대를 비춘다. 덕분에 자신이 도드라지는 대신 다른 캐릭터들이 개성을 선보일 수 있는 좋은 무대, 듬직한 배경이 되어주는 기분이다.

= 그렇게 보였다면 더할 나위 없다. 김한민 감독님도 물에 대한 비유를 종종 하셨다. <명량>이 격정의 불이라면 이번에는 깊고 고요한 물의 기운이 필요한 영화라고. 안성기, 손현주, 변요한, 김성규 등 믿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관록의 배우들이 함께하는 만큼 내가 모든 걸 다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 한편으론 그게 덕장의 면모가 아닌가 싶다. <한산>에서 이순신은 임진왜란에 대해 ‘의(義)와 불의(不義)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단순한 선악 대결과는 다르다.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각자의 고뇌와 질문이 수반되는 과정이라고 해도 좋겠다. 마치 활을 쏘는 것처럼 과녁을 그린 후 전심전력을 다해 당기는 과정. 이번 영화에서도 마지막 전투는 당연히 훌륭하겠지만 그에 이르는 과정이 잘 전달되길 바랐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걸 혼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역할을 최대로 끌어낼 수 있도록 마음속에 깃발을 세워주는 것이야말로 위기 때 필요한 리더의 덕목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지금이기에 이순신의 이야기를 되돌아보는 의미가 남다를 것이라 믿는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