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역사학자가 본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충분히 독창적인 해석 혹은 역사 고증에 대한 강박 사이에서”
2022-08-04
글 : 심용환 (역사학자)

영화 <한산>이 개봉 전부터 화제다. 전편 <명량>이 한국영화사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기 때문에 이번 작품에 대한 기대 역시 높다. 또한 으레 그렇듯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되면 실증과 왜곡 문제가 도마에 오르기 때문에 감독이나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괜한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할 판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번 작품은 전편 <명량>이 그랬듯 탄탄한 역사 고증과 감독의 적극적인 해석 그리고 국민들의 감정적 기대 사이에서 안전하면서도 과감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조선 수군과 왜군의 군사력이 엇비슷하던 때

7월 동풍이 세게 불어 항해하기 어려웠다. 고성땅 당포에 이르자, 날이 저물기로 나무하고 물 긷고 있을 때 피난하여 산으로 올랐던 그 섬의 목자 김천손이 우리 함대를 바라보고는 급히 달려와서 말했다. “적의 대·중·소선을 합하여 70여척이 오늘 낮 두시쯤 영등포 앞바다에서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이르러 머무르고 있다”고 하므로,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신칙했다. - <이충무공전서> 권2 <견내량파왜병장> 중

피난 중이던 목자 김천손의 정보는 결정적이었다. 1592년 5월4일 이순신의 주도로 조선 수군이 첫 출전한 이래 대부분의 해전은 약탈에 집중하고 있던 왜군을 기습 공격하는 것. 그간의 싸움이 조선 수군에 의한 일방적인 승리였다면 한산대첩은 그러한 조선 수군에 위협을 느낀 일본 수군이 조직적으로 대응해서 맞붙은 사건이다.

7월4일 전라우도 수군이 좌수영에 도착한다. 7월5일에는 합동훈련을 실시하였고 7월6일 경상도 수군을 이끌던 원균의 함대 7척이 합류하였다. 당시 조선군의 전력은 판옥선 58척과 거북선 2척. 일본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도합 73척. 배의 규모와 전투력을 비교했을 때 조선 수군과 왜군의 군사력은 엇비슷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중론이다. 영화 역시 전략을 고민하는 이순신을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7월7일 목동 김천손이 와키자카의 함대를 발견하고 조선군에 알려준다. 이 부분을 두고 영화에서는 옥택연과 김향기의 박진감 넘치는 액션 신으로 재해석하였다. 사료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리한 설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반적인 통념과 다르게 왜군은 개전 초기 조선에 주둔하며 조선인들을 가급적 잘 대해주었고 적절한 수준에서 조선인들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사실을 바탕으로 흥미로운 영화적 상상을 가미했을 뿐이다.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층루선 밑으로 “직충(直衝)”하게 하여 용의 입으로 현자철환으로 치솟게 하고 또 천자총통, 지자총통과 대장군전을 쏘아 그 층루선을 당파하자, 뒤따르던 여러 전선들도 철환과 화산을 번갈아 쏘았습니다. - <이충무공전서> 권2 <당포파왜병장> 중

감독이 가장 고민했을 부분은 거북선의 전투 장면이었을 것이다. 학익진에 관해서는 많이 알려진 바, 전편 <명량>에서 거북선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 어떤 방식으로 거북선이 등장하고 활용될 것인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충분히 인식했을 터. 감독은 전통적인 해석과 새로운 해석을 모두 받아들여 충분히 흥미롭게 이야기를 만들었다.

당시에 남겨진 기록 중 ‘직충’, ‘당파’ 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를 두고 학자들은 오랜 기간 고민해왔다. 거북선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직충’을 ‘배를 몰아 충돌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근거는 있다. 조선의 배가 일본의 배보다 ‘크고 빠르고’, 튼튼하여 ‘총탄이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부딪히면’ 왜군의 배가 ‘부서진다’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많은 비판이 있었다. 배끼리 충돌하는 방식은 고대의 해전에서나 등장할뿐더러 충돌선의 경우 선체의 앞부분이 뾰족하다든지 충돌을 위한 다양한 구조물이 있다. 이에 반해 거북선의 용머리는 그런 용도로 볼 수도, 볼 근거도 없다.

최근의 해석은 “직충”을 배를 몰아 근접전을 전개하면서 총통을 집중적으로 쏘아 적의 배를 무너뜨린다는 것이 주를 이룬다. 기록에는 거북선에는 앞뒤에 ‘2문의 총구멍’이 있고 좌우에 ‘6문의 총구멍’을 내었는데 적이 에워싸면 ‘일시에 총을 쏘니’ 상대가 공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즉 판옥선의 등에 송곳 칼을 씌운 장갑으로 덮고 적진 한가운데를 치고 들어가서 가까운 곳에서 포를 쏴서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학자들 사이에서 합리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문헌에 대한 면밀한 검토뿐 아니라 화포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사정거리가 조총에 비해서 멀기는 하지만 그 정밀도와 정확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근접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해석과 최근의 연구 결과 두루 반영해

학익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종래에는 판옥선이 일본 배에 비해 속도가 느리고, 원거리 사격에 능했기 때문에 견내량이 아닌 보다 넓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싸우는 게 유리하다는 정도로 상황을 분석하였다. 하지만 화포의 성능을 고려한다면 학익진은 일반적인 예상보다는 보다 근접전을 펼쳐야 효과적일 것이다. 조선 수군이 학익진 모양을 펼치면 공격해오는 적은 자연스럽게 삼각형 형태의 진을 펼치게 되고 적의 지휘선이 선두에 서게 된다. 그러면 우리측 배 2~3척의 함포가 앞장선 적의 지휘선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모양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즉 학익진이 적의 주요 배를 집중 타격, 적의 기세를 무너뜨리는 전법이었다는 말이다. 더구나 한산대첩은 1시간 정도의 격전으로 적이 단숨에 괴멸됐던 것으로 보는 바, 영화는 거북선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 직접 충돌론을 수용하면서도 충분히 화포의 근접전과 최근의 연구 결과를 성실하게 수용,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역사학의 시선에서 <한산>은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안쓰러운 마음 또한 가득하다. 역사영화를 두고 영화인들이 얼마나 골머리를 앓고 신중하게 이야기를 만들어야만 하는지, 그 강박에 가까운 무게감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강렬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 정도로 철저하게 조사하고 연구하며 그 결과 이렇게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이 들기도 했다. 거북선 장갑은 쇠로 만들어졌을까, 나무로 만들어졌을까? 조선측 기록은 나무이고, 일본측 기록은 쇠다. 혹시나 영화를 보며 엉뚱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지. 트집을 잡아 틀렸다고 공격하기보다는 충분히 즐기면서 궁금한 점을 찾아 공부하는 합리적인 문화가 만들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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