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헌트’ 배우 정우성, “함께라는 무게”
2022-08-10
글 : 임수연
사진 : 백종헌

<태양은 없다> 이후 이정재와 정우성이 투톱 주연으로 재회하는 순간을 많은 이들이 갈망한 만큼 배우 입장에서는 출연을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다. 이정재 배우보다 먼저 제작을 경험하고 장편영화 연출을 준비했던 정우성은 배우가 감독을 맡을 때, 더 냉정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업계 분위기를 잘 알기에 무게를 나눠지기로 결정했다. 고로 이 프로젝트가 성사됐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우성이 <헌트>의 시나리오와, 감독 이정재에 보낸 믿음을 증명한다.

- 제목이 ‘남산’이던 시절부터 이정재 감독이 <헌트>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과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사업 동료다. 지금의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시나리오를 발전시킨 과정은 어땠나.

= 아티스트 스튜디오에서는 투라인으로 각자 관심 가는 작품을 제작하는 일이 자연스럽다. 정재씨가 ‘남산’ 시나리오에 관심을 보일 때도 그냥 옆에서 응원하는 입장이었다. 시나리오가 바뀔 때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라든지 쳐내야 할 잔가지로 보이는 부분에 의견을 주는 정도였다. 정재씨는 작품에 맞는 연출자를 찾으면서 감독과 시나리오를 매칭시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체감했을 것이다. 워낙 다양한 로케이션 촬영이 요구되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초반엔 한재덕 사나이픽쳐스 대표님도 예산 문제 등을 우려했다. 시간이 흐르고 정재씨가 시나리오를 계속 수정하면서 한재덕 대표님이 “이 정도면 작업해볼 만하다”며 공동제작에 응했고 정재씨에게 연출도 제안했다. 내 입장에서는 반가웠다. 감독 도전에 든든한 지원군까지 있으니 정재씨가 잘해내길 바랐다. 문제는 캐스팅이었다. 작품의 만듦새와 무관한 이유로 출연을 고민했다. 남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동반 출연이 굉장히 큰 의미를 갖는다. “이정재와 정우성, 둘이서 회사 차리더니 제작도 하고 같이 출연도 하고 다 해먹으려고 하나?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냐?” 그렇게 보는 외부 시선도 있지 않았겠나. 더욱 까다롭게 평가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한재덕 대표님이 “이 정도면 용기를 내도 괜찮지 않겠냐”고 설득했고, 욕먹지 않는 수준에서 최대한 퀄리티 있는 작품을 함께 만들어보자며 의기투합했다.

- 아직 개봉 전인 영화지만, <보호자>로 연기와 연출을 병행한 경험이 있기에 <헌트> 현장에서 정우성만이 할 수 있던 이정재 감독에 대한 배려가 있었을 텐데.

= 사람마다 자기 속도가 있다. 감독 고유의 템포로 영상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기다리거나 쫓아가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 연출자의 연출력과 상관없는 기술적인 부분은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지만 연출의 세계관을 함부로 침범해서 브레이크를 걸면 안된다.

- 이정재 감독은 “정우성을 가장 멋있게 그린 감독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 김정도가 멋있기만 한 캐릭터는 아니다. 대의를 위해 무고한 이를 해치기도 하고 이를 합리화한다. 김정도를 어떤 인물이라고 보았나.

= 군인이었던 김정도는 그의 직업적 본분을 고민한다. 신군부의 권력 정당화를 위해 무고한 희생자가 생기는 현장을 목격하며 군인으로서 가졌던 자부심이 무너진다. 아픈 역사와 시민들의 울분은 그가 가진 감정적 무게로 이어진다. 이치에 맞는지 갈등하는 과정에서 약자에게 공감하고, 죄책감으로 이어지고, 정당치 않은 폭력을 끊어내야 한다는 신념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폭력을 멈추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안기부 내에 잠입한 스파이 ‘동림’의 정체는 후반에야 밝혀진다. 이전까지는 누가 스파이인지 확신할 수 없도록 모호하게 묘사된다. 나중의 반전을 염두에 두고 연기했나.

= 김정도의 표정을 굳이 감출 필요는 없었다. 정보국의 특수성 때문에 김정도의 속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도 문제되지 않는다. 기술자들이 고문하는 모습을 피곤한 얼굴로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불편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즉, 양가적 입장을 내포하는 중의적 얼굴을 만들 수 있다.

- 안기부 해외팀 박평호(이정재)와 국내팀 김정도가 맞붙는 순간도 있지만, 각자의 공간에서 연기한 신을 연결함으로써 스파이물의 긴장감을 조성하는 비중이 더 높다. 각자의 연기를 계산해서 조율한 것처럼 텐션이 좋더라.

= 서로를 견제하기 위함이 아닌 신념을 위한 긴장감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단일한 미션만을 수행하지 않는다. 부딪히고 싶지 않았지만 상대가 방해되는 상황에 맞닥뜨렸기 때문에 견제한다. 박평호와 김정도 모두 감추고 있는 신념이 있다. 다른 지향점을 갖고 있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노력과 집념은 비슷한 무게감을 갖는다. 저울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텐션이 적절히 살아난다.

- <헌트>에는 관객이 원하는 그림이 정확하게 등장한다. 이정재와 정우성, 두 배우가 맨주먹으로 싸우는 액션 신이 ‘청담 부부’의 부부싸움 시퀀스라고도 불리던데. (웃음)

= (폭소하며) 그렇게 불리고 있다니! 박평호와 김정도는 각자 갈 길이 바쁘다. 그런데 상대가 걸리적거리는 상황이 자꾸 생긴다. 그들 사이의 날카로운 공기, 예민한 신경에서 촉발되는 액션은 묵직한 파괴력이 있어야 한다. 정재씨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레이, <도둑들>의 뽀빠이 아닌가. 액션을 굉장히 잘한다. 상대가 다치지 않게끔 보호하면서 힘을 쓰는 방법을 알기 때문에 합도 잘 맞았다. 하지만 둘 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촬영 자체는 무척 피곤했다. (웃음)

- <헌트> 반응이 좋은 만큼 곧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될 <보호자>에 대한 부담도 크겠다.

= 살짝 부담되지만, 빨리 깨야지. 같은 장르도 아니고 제작비도 많이 차이난다. <보호자>는 <보호자> 나름의 사이즈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지금은 액션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마침 후배 제작자가 제안했던 작품이다. 클리셰하고 단순한 시나리오를 어떻게 연출해야 비틀 수 있을지 고민하며 찍었다.

- 언젠가 영화를 연출하고 싶다는 의사는 90년대부터 밝혔던 것으로 안다. 뮤직비디오 연출은 일찌감치 도전했지만 장편영화 연출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

= 영상의 길이가 갖는 무게라는 게 있다. 물론 젊은 나이에 치기로 데뷔했을 수도 있겠지만, 현장을 잘 알고 있는 시점에 감독 데뷔를 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즐길 수도 있었고.

- 2007년 영화 제작사 토러스필름을 차렸다. 이후 레드브릭하우스는 영화 제작, 배급, 수출업을 겸하는 회사로 등록했고, 이윤정 감독의 <나를 잊지 말아요>를 제작한 더블유팩토리도 있었다. 이정재와 함께 세운 아티스트 스튜디오는 넷플릭스 시리즈 <고요의 바다>를 만들었다. 지난 15년간 제작자로서 배운 점은 무엇인가.

= 예전에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도전 의식을 봤다. 그런 창작자들과 기회를 나눴다. 다양성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몇장의 글을 잘 쓰는 능력만으로는 큰 누수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현장 경험은 정말 중요하다. 현장 경험이 많을수록 감독에게도 도움이 된다.

- 그동안 영화계에서 인연을 맺은 감독이나 제작자 중 롤모델이 있나. 우선 <비트> <태양은 없다> <무사> <아수라> <서울의 봄>을 함께한 김성수 감독이 떠오르는데.

= 특정한 롤모델은 없지만, 김성수 감독님은 내게 가장 큰 선배이자 동료, 어떤 면에서는 스승이다. 직접 영화를 가르쳐주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20대부터 50대까지 함께하면서 현장에서 감독이 보여주는 리더십이 무엇인지 깨우치게 되었다. 사실 제작은 다른 차원의 일이라 누구처럼 되고 싶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제작 일을 하지만 제작에만 올인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운동 경기로 비유하면 나는 필드 플레이어다. 반면 제작에 올인하는 한재덕 대표님 같은 분은 필드 스탭과 행정 스탭을 겸하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시각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나와 다른 종류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은 제목으로 추측할 수 있는 시대배경 외에는 베일에 싸여 있다.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에 특별출연하고, 오랜만에 멜로드라마 남자주인공으로 돌아오는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아티스트 스튜디오와 스튜디오앤뉴가 공동 제작한다.

= <서울의 봄>의 베일은, 지금은 안되고 나중에 벗겨드리겠다. (웃음) <거미집>은 <헌트>에 카메오 출연한 (황)정민이 형이 가졌을 부담을 갖고 참여했다. 일본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의 판권을 산 지는 오래됐는데 어쩌다 보니 제작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내가 멜랑콜리한 멜로는 못할 것 같고, 이건 서먹서먹한 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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