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진이 연기하는 여성들은 로맨스가 아닌 일에 대한 욕망으로 움직인다. 성취욕이 캐릭터의 신념과 행동을 결정하고 감정을 좌우한다. <헌트>의 방주경 역시 안기부 해외팀 박평호 차장(이정재)의 오른팔로서 완벽한 수행 능력을 보여주는 직장인이다. 안기부 국내팀과 해외팀이 조직에 잠입한 남파 간첩 동림으로 상대를 지목하며 모략을 펼칠 때, 전혜진의 거침없는 돌파력과 꼿꼿한 기세는 첩보물의 긴장감을 조직하는 핵심 뼈대가 된다.
- 안기부 해외팀 에이스 방주경은 어떤 정치적 입장이 두드러지기보다는 그냥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80년대 초 안기부 배경을 고려할 때 일반적으로 상상되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 방주경은 급한 마음으로 계속 돌진하는 사람 같았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박평호 차장을 잘 보좌해서 국내팀에 뒤처져서는 안된다는 의욕이 넘쳤을 것이다. 일을 즐기고 갈망하는 면에 포커스를 두고 너무 심각하게 접근하지 않았다. 고문 장면에서도 다른 인물들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무표정한데 주경은 계속 어떤 반응을 보인다. 저건 좀 아닌 것 같지만, 어쩌겠어? 우린 쟤네를 잡아야 하는데. 이 정도의 느낌으로 연기했다.
- 안기부에 들어오기 전 방주경은 어떤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나.
= 후시녹음을 할 때 자유로운 느낌을 더하려고 하니 감독님이 “너무 재밌지만 방주경이 그런 표현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하더라. 감독님은 주경이 엄청난 엘리트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안기부에서 여자가 에이스가 되기 위해서는 엘리트 코스를 거쳐야 했을 것이다. 해외팀 소속이니 영어도 잘해야 한다. 그러니 명문대 출신 혹은 외국에서 공부한 경력이 있었을 것이다. 해외를 왔다 갔다 하다가 한국에 들어온 지는 3~4년 정도 되지 않았을까.
- 학생운동을 하지 않고 안기부에 들어간 이유는 뭐라고 생각했나.
= 그러니까. 현실을 부딪쳐봤다면 그러기 쉽지 않았을 텐데. (웃음) 그래서 어릴 때 부모님이 주재원 발령을 받아서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고 상상해봤다.
- 1983년 군부독재 시대라는 구체적인 배경이 있다. 이를 보여주는 분장과 스타일링이 요구된다.
= 헤어·메이크업·의상 스탭들이 고생한 거지 내가 노력한 것은 없다. 움직이기 불편한 셔츠와 재킷은 그 시대와 캐릭터의 경직성을 보여준다. 사실 이대팔 가르마를 탄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을 할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주경을 연기할 때 오히려 곤란한 부분이 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갔다.
- “남산에서 나왔다, 이 새X야”라며 따귀를 날리는 신도 인상적이었다. 여자가 덩치 큰 남자를 어떻게 때리냐는 억지스런 반론마저 차단할 파워가 느껴졌달까. 총격 액션도 멋졌다.
= 나도 남자를 때릴 수 있다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웃음) 상대배우의 덩치가 워낙 커서 거의 날아오르듯 타격해야 했다. 덕분에 만만하게 보이는 사람에게 맞는 그림이 나왔지만. 사실 평호와의 마지막 장면을 가장 고민했는데 막상 총격 신을 경험해보니 너무 힘들었다. 내가 소리에 대한 공포가 이렇게 심한 줄 몰랐다. 귀마개를 하지 않으면 자꾸 몸이 먼저 반응했다. 다음엔 더 잘해야지.
- 전혜진 하면 떠오르는, 남자들의 세계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독보적인 여성의 이미지가 있다. 한편으로는 기능적인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으로 비쳐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 이런 고민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나.
= 연기는 내가 원한다고 다 할 수도 없고 인연이 닿을 때마다 판단해야 한다. 유기적으로 보려고 한다.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이후에 비슷한 역할이 정말 많이 들어왔다. 그 이전에는 경찰 캐릭터가 많았다. 캐릭터가 비슷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되, 나도 했던 것을 또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니라 그 안에서 차별점을 주려고 한다. 흥미로운 시나리오에는 마치 <헌트>의 방주경 캐릭터처럼 차별화된 부분들이 존재한다. 캐릭터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요소를 텍스트에서 열심히 찾는다.
- <헌트>를 공동 제작한 사나이픽처스와 첩보 액션 코미디 <크로스>로 또 인연을 맺게 됐다. 전직 요원 강무(황정민)와 강력범죄수사대 에이스 미선(염정아) 부부 앞에 나타나 어떤 사건을 일으키는 캐릭터다. 웹툰 원작 드라마 <남남>에서는 최수영과 모녀로 나온다. 고등학생 때 아이를 낳았다는 설정이다.
= 지금까지의 캐릭터들 때문인가, 내가 싸움을 잘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이건 오해가 있다. (웃음) 사실 타격감 있는 액션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 캐스팅 제의를 받고 놀랐다. 황정민, 염정아 선배와 작품을 하고 싶었다. 염정아 선배와 함께할, 여자들의 액션을 고대하고 있다. <남남> 대본을 보고 “진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하고 놀랐다. 원래 정형화되지 않은 ‘걸’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흔쾌히 결정했다. (웃음) 친구 같은 모녀의 독특한 케미스트리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