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의 리얼리티를 찾다
‘관객이 체험한 것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한재림 감독과 스탭들의 목표는 확실했고, “모든 회의는 ‘무엇이 더 리얼한 재난 상황인가’를 묻는 것으로 귀결됐다”.(이목원 미술감독) <비상선언>팀은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플라이트 93>과 해외 다큐멘터리들을 참고하며 다큐멘터리의 톤을 잡아나갔다. “필름 시절의 다큐멘터리는 특유의 질감이 있다. 조명을 제대로 치지 않아서 입자가 거칠어지는 건데, 솔직히 요즘 디지털 렌즈는 감도가 좋아서 밤에 찍어도 그리 거칠어지지 않는다. 이번 영화에서는 일부러 후반작업을 통해 거친 질감을 덧씌우는 효과를 넣었다. 또 영화적인 시선이라기보다는 멀리서 지켜보며 포착하는 시선, 보기 좋게 만들어서 찍는 게 아니라 실제 거리감의 확보를 중시했다.”(이모개 촬영감독)
빅터 빌에서 공수한 보잉777 부품
<비상선언>의 기체 내부를 만든 이목원 미술감독은‘스카이코리아’의 내부 모습이 실제 보잉777 기체의 크기와 외관을 연상할 수 있을만큼 실제감을 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부산행>에서 KTX 열차를 재현한 바 있는 이목원 미술감독은 <비상선언>에서도 실존하는 국제선 비행기 안에 머무는 것 같은 사실적인 완성도를 보여준다. 미술팀은 미국 모하비사막에 있는 비행기들의 무덤인 ‘빅터 빌’을 찾아, 보잉777 비행기의 부품들을 직접 공수했다. <비상선언> 내부 세트는 이제는 버려진 낡은 항공기들의 부품을 골라 살뜰히 재조합하고 약간의 재해석을 더해낸 결과물이다. 99% 사실적인 재현을 목표로 했지만, 승무원들이 머무는 갤리는 현실적으로 너무 좁은 게 사실. 촬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사이즈를 약간 더 늘렸다.
<비상선언>의 코어, 360도 짐벌 신
“해외 업체들도 가운데 통로가 하나짜리인 동체를 돌려본 경험은 있지만, 보잉777처럼 복도가 두개인 광동체를 돌려본 경험은 없었다.”(이목원 미술감독) 즉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이목원 미술감독을 필두로 국내 미술팀과 특수효과팀이 공조해 항공기 세트 사이즈에 맞춰 제작한 원통형의 로티서리 짐벌 안에 기체를 3등분으로 쪼개어 넣었다. “워낙 거대한 기체라 한번에 들어가지 않아서 세트를 3개로 자른 다음 하나씩 차례로 넣는 과정이 마치 블록을 맞추는 것과 비슷했다.” 이목원 미술감독은 이때 핵심은 짐벌과 세트간의 정밀한 결합이며 치수와 재질, 결합 구조 등을 소통하는 데 있어 국내 업체간의 작업이 오히려 효율을 높였다는 후일담도 들려줬다.
멀어져서 더 생생한 화면들
여느 내러티브 장르영화에서 보던 익숙한 톤과 앵글이 아니다. <비상선언>은 마치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한 감각을 도리어 정확한 묘사로부터 멀어짐으로써 획득한다. 이모개 촬영감독은 “한재림 감독은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톤을 원하면서도 광고에 가까운 스타일리시한 영상들의 레퍼런스를 보여줬다”며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지가 관건이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택한 방식 중 하나는 대상을 선명하게 보여주지 않고 다른 사물을 걸친 레이어를 통해 포착하는 방식이었다. “심도는 좁혀 초점을 얇게 가져가고 아웃포커싱을 자주 했다. 영화 전체를 핸드헬드로 찍으면서 망원렌즈를 주로 사용해 대상의 실루엣을 잡는 방식을 썼다. 그리하여 대상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거리를 벌려주는 것이 <비상선언>의 핵심이었다.”(이모개 촬영감독)
실제 비행기에 탄 것처럼
<비상선언>은 비행재난영화인 만큼 좁고 어두운 실내에서 계속 진행되지만 좀처럼 질리지 않는다. 비결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같은 공간이라도 시간대별로 톤과 밝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실제 비행기를 탄 느낌을 주고자 비행기 실내의 광량은 실제 비행기의 이동 시간과 경로를 따랐다.”(이모개 촬영감독) 밝은 창공과 차단막에 가려진 어둠, 그 틈새의 석양으로 물든 실내까지 다양한 빛을 통해 관객을 비행기 안으로 초대한다. 또 하나는 지상의 사람들의 동선을 따라가는 카메라다. 이모개 촬영감독은 핸드헬드, 얕은 심도와 하레이션(태양이 렌즈에 바로 들어와서 사진 이미지가 뿌옇게 반사되는 현상)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격차를 줄이는 한편 지상에서만 찍을 수 있을 상황들을 통해 개방감을 줬다. “하늘과 지상, 실내와 실외의 격차를 줄이는 게 관건이었다. 갑자기 튀거나 불편하지 않게 전체적인 질감을 유지하면서 공간의 색감을 살리는 게 중요했다.”
CG가 대체할 수 없는 조종석 조명
이목원 미술감독은 “자동차 운전석만큼 좁은 조종석의 계기판 라이트가 인물의 얼굴에 묻는 것이 매우 핵심적인 리얼리티”라고 확신, 조명이나 CG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계기판의 빛을 재현하기 위해 노후한 부품을 재조립해 실제 전자 장치들이 모두 작동하게끔 만들었다. 카메라가 들어갈 위치를 마련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계기판을 해체할 수 있도록 약 20개의 피스를 세분화해 제작했다. 피스를 떼어내도 짐벌이 360도 회전할 때 여러 배선 장치들이 강성(변형되지 않는 정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역시 관건이었다.
뿌연 화면과 공간 확보의 비밀
또 중요한 기법 중 하나는 빛의 난반사를 활용한 뿌연 화면이다. “하레이션을 일부러 유도하기 위해 카메라 앞에 작은 조명을 달았고 거의 모든 화면에서 이 톤을 유지했다.”(이모개 촬영감독) 사실적인 톤을 위해 몇컷을 제외하곤 대부분 비행기 실내에 함께 탑승해 찍었는데 전반적으로 어두운 와중에도 인물의 실루엣과 동작을 생생하게 포착할 수 있었던 비결도 여기에 있다. 한편 좁은 기내에서 카메라의 시야각을 확보하기 위해 촬영 중엔 잠시 승객석을 떼어내는 탈착 기능이 필수였다. 이목원 미술감독은 전체 8개월의 작업 기간 중 약 4개월을 비행기 세트에 쏟아부었다. “좌석의 고정 방식을 새로 고안해 촬영 시간을 단축시키고자 했다. 안전사고는 대체로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비상선언>의 프로덕션디자인은 이처럼 미학과 공학을 동시에 고민하는 작업이었다.”(이목원 미술감독)
규모와 정확성으로 승부한 관제실
지상에 있는 스카이코리아 항공사의 관제실, 국토부 상황실, 공항의 관제탑 등도 100% 세트다. 엄격한 보안 유지로 인해 실제 촬영이 불가능하고 답사도 제한적이었기 때문. “특히 스카이코리아 OCC(관제실)는 비용이 많이 든 곳인데, 초기에 한재림 감독님과 컨셉 회의를 할 때 유리가 많은 공간으로 설정했다. 전자기기가 많은 공간에 유리 구조물이 부각됨으로써 모니터의 빛들이 인물에 떨어졌을 때 현실감이 증대된다.”(이목원 미술감독) 그 밖에 재난 상황의 음압 병실은 해외 사례를 참고해 비닐이 드리워진 텐트형 구조로 디자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