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허구의 중첩, 뜨거운 믿음과 풍자를 동시에 꾀한 <비상선언>으로 한재림 감독이 5번째 영화를 선보인다. 중반부까지 돋보이는 항공 재난물로서의 준수한 완성도와 고강도 스트레스 상황을 장시간 끌고 나가는 후반부의 전개가 더해져 <비상선언>에 대한 세간의 추측과 평가는 개봉 당일부터 꽤나 엇갈리는 모양새다. 분명한 것은 어떤 이유로든 이 영화가 뜨거운 바이럴을 낳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재림 감독은 테러영화의 스릴로 영화를 이륙시킨 다음 재난 상황의 극한적 속성과 동시대 한국 사회의 살풍경에 대한 모사로 항로를 만든다. 이후 거듭되는 착륙의 위기 속에서 <비상선언>의 비행기가 최후의 연료로 택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용기, 그리고 집단의 희생 정신이다. 한재림 감독은 이 모든 것이 실제 현실의 일면이 불러낸 상상이라고 말한다. 코로나19라는 재난을 거쳐, 어렵사리 회복한 극장가에 1년 만에 안착한 재난 블록버스터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관객에게 <비상선언>의 의미와 재미는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가질까. 한재림 감독 또한 궁금해하고 있었다.
- 요즘 드라마 <머니게임> 촬영 중에 <비상선언> 개봉 행사를 함께 소화하고 있다.
= 대전에서 밤 촬영 마치고 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머니게임>은 25회차 정도 진행한 상태다. 개봉 시기와 촬영이 이렇게 맞물린 건 처음이라 일정이 겹친 데서 오는 피로감은 있지만, 그동안 <머니게임>이 주로 세트 촬영 위주였기에 그나마 다행이라 볼 수 있다. 앞으로 더 집중할 일만 남았다.
-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등 초호화 캐스팅에 칸영화제 초청을 거쳐 인지도도 꽤 높은 상황이다. <외계+인> <한산: 용의 출현>에 이어 <헌트>와 함께 여름 시장의 빅4 구도가 형성된 셈인데 흥행 추이를 어떻게 내다보나.
= 물론 흥행이 신경은 쓰이지만 결과는 전혀 모르겠다. 예전과는 모든 것이 달라진 느낌이다. 여전히 코로나 상황인 데다 최근 몇년 사이에 관객층 자체가 바뀐 것 같다. 게다가 <비상선언>은 감염병 상황과 밀접한 재난물이다보니 이것이 긍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할지 혹은 반대일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 감독으로서는 당연히 많은 관객과 소통했으면 싶고 손익분기점도 넘기길 바랄 뿐이다.
- 세트 분량이 약 70%에 좁은 기내 공간을 100% 핸드헬드로 촬영했다. 항공기 절반을 통째로 재현하고 초대형 짐벌을 돌리는 등 프로덕션의 규모와 조건 등에서 도전적인 지점이 많은데, 최초에 시나리오에 끌렸던 이유도 이런 시각적 스펙터클과 관련이 있을까.
= 처음엔 오히려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프로덕션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시련을 많이 겪었다. (웃음) 10년 전쯤 이미 충무로에 꽤 떠돌았던 시나리오가 <비상선언>이었다. 세트 촬영도 잘 준비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했는데, 시나리오에 그저 ‘비행기가 돈다’라고 쓰여 있는 대목을 실제로 구현하려면 엄청난 공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실감했다. 규모나 프로덕션에 대한 야심보다는 항공 테러라는 소재, 그리고 그 안에서 발휘되는 인간성이라는 주제에 매료된 점이 크다.
- 테러범의 존재와 바이러스 살포에 관한 스펙터클이 서사 구조 면에서는 앞부분에서 전부 소개되는 형태를 취한 이유가 있다.
= 쓰나미가 닥쳐온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그 발생 이유를 모른 채 일단 휩쓸리게 된다. 여기서 이야기가 덮쳐오는 파도 자체와 거기에 맞서 싸우는 순간에 방점을 둘 것인가, 아니면 쓰나미가 지나간 이후의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릴 것인가, 나는 후자이고 싶었다. <비상선언>은 비행기 테러의 스펙터클과 액션에 오롯이 초점을 맞춘 작품이 아니다. 다만, 사건 이후라고 하면 보통 긴장감이 많이 해소된 상황을 연상하게 되지만 비행기라는 공간은 재밌게도 재난이 지나간 자리가 그대로 밀도 있게 유지된다. 내부에서 그 여파가 계속 퍼지고, 착륙 직후에도 집중적으로 이목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 범죄자의 서사에 집중하지 않겠다는, 테러리즘에 대한 관점도 될 수 있다.
= 그렇기도 하고 일종의 허무함도 있다. 라스베이거스 총격 사건을 예로 보아도 그렇다. 주변인들은 가해자가 부유하고 콤플렉스도 없었으며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총기 난사를 하고 자살했다. 내막은 영영 알 수 없다. 재난은 예고 없이 들이닥치고 이유를 찾고 자행해도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 두려움과 허망함을 일으키는 상징으로 진석(임시완) 캐릭터를 썼다. 물론 시나리오를 쓰면서 진석에 대해 나 나름대로 그려놓은 전사는 있다.
- 우리 시대의 재난영화가 가져야 할 미덕이 무엇이라고 봤나.
= 재난영화를 만들면서 두 가지를 질문했다. 재난 상황의 실질적인 속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과연 ‘진짜 재난’은 무엇인가. 이제 재난영화를 만들 때는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우리가 재난에 너무나 밀접한 삶을 살고 있어서이다. 코로나19로 우리가 겪은 것은 이 병이 주는 아픔과 괴로움뿐 아니라, 감염자와 비감염자 사이에 형성되는 비난과 혐오의 문제였다. 그와 동시에 어떤 이들은 이타심을 발휘하거나 의료계 종사자처럼 헌신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내가 감염되어 타인에게 피해를 줄까봐 외출을 자제하기도 한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이 재난이라고 보았고 <비상선언>을 그 축소판처럼 만들고 싶었다.
- <비상선언> 작업 초기가 팬데믹 초기와 맞물렸는데, 무엇이 지금의 주제의식을 갖도록 자극했나.
= 팬데믹으로 유럽 전역이 봉쇄되었을 시기에 이탈리아 어느 마을 사람들이 각자의 집 발코니에 나와서 서로 노래를 불러주는 영상을 봤다. 요즘도 마찬가지로 더운 날씨에 계속해서 검사소를 지키고 있을 간호사, 의사 분들을 생각한다.
- 아토피 흉터를 감염의 증거로 오해받아 배척받는 딸을 지키려는 아버지 재혁(이병헌), 하와이행 비행기에 탄 아내를 구하려는 지상의 형사 인호(송강호)가 각각 두 파트로 나뉜 무대에서 주도권을 잡는 인물들이다. 남편과 아버지로 묘사된 남성 인물들이 어떻게 보이길 바랐나.
=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게 보일 것. 영화에서도 부조종사, 사무장, 승객들, 그리고 장관에 이르기까지 다 비슷한 한명의 사람처럼 보이길 바랐다. 그런데 그중 아주 조금 더 용기를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원형 같은 인물이 김소진 배우가 연기한 사무장이다. 그 사람도 얼마나 두렵겠나. 후배 승무원들은 무서워서 더 못하겠다고 하는 지경인데 이 사람은 그럼에도 나름대로 헌신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킨다. 재혁도 인호도 승객들도 결국 다 그런 마음을 끝내 발휘하는 셈이다. 거창한 대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직업윤리를 지킬 뿐이라든가 혹은 아내와 딸을 위한다든가 하는 작은 마음으로 움직인다. 재난을 이겨내는 힘은 이렇게 위험 상황에서 발휘되는 아주 조금의 인간성과 용기가 아닐까.
- 상공에 갇힌 승객들 대부분이 와이파이 스트리밍을 이용해 누구보다도 빠르게 실시간 뉴스를 접하고, 바이러스에 감염된 항공기의 착륙을 놓고 청와대 국민청원의 찬반이 벌어지는 등 시나리오가 기획된 시점은 오래되었지만 그 디테일은 최신 이슈들과 접목했다. 소재의 선택과 집중, 심도의 문제가 중요한 과제였을텐데 어떤 기준으로 추려냈나.
= 자료 조사를 하는 동안 디테일을 추리는 기준은 명확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다면 어떤 특징을 보일까?’ 그 질문을 끌고 간 결과다. 자료 조사 중 특히 내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한 테러센터 출신 전문가가 한 말이었다. 실제로 <비상선언>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를 대비해 지상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매뉴얼이 이미 있다는 거였다. 윤리적 가치가 후순위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 일종의 충격이었고, 이런 원리들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극중 갈등 장치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설정이 영화적으로 정말 좋은지 자신이 없을 때에도 밀어붙였다.
- 테러범 진석이 사는 강남 아파트에는 재개발 현수막이 붙어 있고 이코노미 클래스 화장실을 찾은 비즈니스 클래스의 승객이 첫 번째 감염자가 된다. 한국 사회의 계급도에 대한 풍자를 혹시 더 구체적으로 계획했던 것은 아닌가.
= 애초부터 계급적인 측면에 집중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다만 진석을 부유한 환경에 있었던 인물로 두면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증오 범죄를 저지른다는 식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길 바랐다. 비즈니스 클래스의 승객이 이코노미 클래스의 화장실에 왔다가 첫 번째로 바이러스에 노출되고는, 이후 이코노미 클래스의 위생 상태를 폄하하는 설정은 첫 번째 희생자에게 관객이 너무 심한 감정이입을 하지 않도록 마련한 시나리오적 전략에 가까웠다. 관객이 그의 죽음에 너무 많은 감정을 소진하지는 않았으면 했다. 한국 사회의 정서상 조금은 얄밉고 호감 가지 않는 사람으로 설정한 것이다.
- 증상 자체는 빨리 발현되지만, 후반부에 착륙을 놓고 지난한 시도를 거듭하는 동안 대다수 승객들이 끝내 생존하는 쪽으로 설정했다.
= 기내 감염의 풍경에 있어서는 다큐멘터리처럼 접근하자는 게 최대 목표였다. 만약 실제로 비행기에서 인명 피해가 난다고 하면, 단 한 사람만 죽어도 난리가 날 거다. 취재한 바로는 시신을 기내 벙커에 보관한다고 하더라.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건 엄청난 공포와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적 과장을 위해 만약 10명, 20명씩 무작위로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건 재난 스릴러가 아니라 고어가 된다. <비상선언>이 추구하는 주제, 장르와 모두 맞지 않게 되는 거다.
- <연애의 목적> <우아한 세계> <관상> <더 킹>을 거치며 점점 더 영화의 예산도 불려가고 있다. 규모적 측면에서 <비상선언>의 프로덕션 운용이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 대규모 예산이 투입된 세트 촬영, 지상과 항공기 내 상황으로 완전히 이원된 프로덕션을 운영하려면 철저한 사전 준비와 효율적인 계획이 필수적이었다. 이모개 촬영감독과 콘티를 세번에 걸쳐서 수정하고 완벽하게 준비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현장에선 서로 콘티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찍을 수 있는 수준이 되더라. <비상선언>의 많은 장면이 사전에 작업한 프리비주얼과 거의 일치한다.
- 초대형 로티서리 짐벌로 연출한 360도 비행기 회전 장면에 대한 반응이 좋았다. 감독 입장에서는 초반에 매우 부담스러운 장면이었을 법도 한데.
= 경험이 없으니까 두려움이 생겼던 건 사실이다. 막상 돌렸을 때 어떤 느낌이 날지 나도 스탭들도 실감해본 적이 없으니까. 물론 안전 문제도 있고. 무술팀, 스탭, 마지막으로 배우들이 탑승하는 식으로 안전을 수차례 확인했고 처음엔 배우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도는 것부터 시작했다. 약간 익숙하게 만든 다음부터 조금 더 빨리 돌렸는데, 그렇다고 영화에서 보이듯이 엄청나게 빠르게 돌린 건 아니다. 머리카락이 거꾸로 떨어져 흩날리고, 핏줄 선 배우들의 리얼한 연기까지 더해지니까 실제 속도에 비해 오히려 그 상황이 극대화되어 보였다. 고통을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있어서 기술이 배로 효과를 본 거다. 수십번 탔을 조감독이 나중엔 놀이기구 같다고도 하고, 그 안에서 딴생각을 하거나 핸드폰을 보기도 했다.
- 감독도 탑승한 적이 있나.
=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그래도 안전 확인차 배우들이 타기 전에 먼저 한번 타봤다. (웃음)
- 캐스팅 면에서는 올여름 빅4 영화 중 몸집이 가장 크다. 대중영화가 관객에게 제공해야 할 재미 중 하나로 스타 배우 캐스팅을 중요한 요소로 보는 감독이란 생각도 드는데.
= 배우의 호감도를 중요하게 보는 것은 사실이다. 역할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은 당연하고. 사실 신선한 얼굴을 기용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더 킹>에서 김소진 배우를 캐스팅한 것 같은 행운은 잘 주어지지 않는다. 스타성이라는 것은 그만한 연기력과 매력을 담보하는 신뢰성이고, 그런 분들과 운 좋게 작품을 하게 되면 의외의 시너지가 생기기도 한다.
- 인지도와 출연료, 스타 파워가 센 배우들이 여럿 모이면 긍정적인 긴장감이 작용하기도 하지만, 감독 입장에서 분량 조절에 있어 고민이 되는 점은 없나.
= 모두 나보다 프로이기 때문에 그들 내부에서 이미 자정작용이 있다. 다만 촬영을 하다보면 캐릭터와 장면에 애정이 생기는데 편집 단계에서 러닝타임 등을 고려해 잘라낼 때 감독으로서도 종종 고민이 될 때가 있다. 때로는 좋은 연기를 관객에게 더 길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건 사실이다.
- 상공에서 비행기의 회전 신이 있다면, 지상에서는 진석의 동료를 쫓는 인호의 차가 완전히 뒤집어진다. 점프 스케어에 가깝게 틈입해 관객을 놀라게 하는 장면인데, 구조적인 균형감을 위해 설계된 신일까. 이 장면을 기점으로 <비상선언> 후반부는 재난 상황의 스트레스를 극한까지 밀어붙인다는 인상을 준다.
= 구조적으로 상공과 지상의 통일성을 구축했다. 비슷한 뉘앙스의 회전 감각이 지상에서도 스펙터클한 시각적 효과를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하나 있었고, 시나리오적인 문제로는 인호라는 인물이 분주한 것에 비해 막상 액션 자체가 적은 감을 보완하는 장치였다. 이야기의 갈등을 시각적인 감각으로 전하는 교통사고 장면은 그런 충격 효과의 일환으로 계획한 것이다. 인호가 죽을 고비를 넘겨서도 이런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절박함의 상태가 공유되길 바랐다.
- 한국 관객이라면 밀폐된 공간의 재난 상황 묘사, 그리고 후반부 영상통화 장면 등에서 세월호 참사의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 현실의 여러 재난을 떠올리며 만들었으나 특정 사건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다. 만약 결정적 레퍼런스를 묻는다면 미국의 총기 난사 사건들이 더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를 만들면서 세월호 참사뿐 아니라 대구 지하철 사건, 미국 9·11 테러가 우리 사회에 남긴 것들을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영화보다 다큐멘터리를 참고했던 것이고. 후반부의 화상 통화 장면도 극적인 설정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현실에서 어땠는지 돌이켜보면 다들 전화기를 붙들고 가족에게 전화를 했었다. 갑자기 전화해서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런 것을 배제하지 않고 보여주고 싶었다.
- 현실의 우연이 영화에서는 때로 비약이나 부실한 개연성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처럼, 재현 방식에 따라 불쾌감이나 신파라는 반응도 불러올 수 있다.
= 슬픔을 과장하고 눈물을 강요한다는 의미의 신파라면, <비상선언>을 작업할 때 나는 이 영화에 신파가 전혀 없다고 확신했었다. 다만 앞서 말했듯,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이 정말로 할 법한 행동들에는 부정할 수 없이 감정을 격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고 느낀다. 이병헌 배우가 연기한 재혁이 기내에서 마지막 방송을 할 때는 음악도 줄였다.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이 가까운 가족이나 남에게 이를 전하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을 신파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을 극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나오는 극적인 인간성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