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만의 폭우로 출근시간 강변북로를 건너는 데만 한 시간 넘게 걸린다는 속보가 들려온 8월. 전국적인 교통 파업으로 파리 외곽에서 시내로의 출퇴근이 어려워진 쥘리의 곤경을 담은 영화 <풀타임>은 스크린을 넘어 각자의 출근길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이 계속 차기만 할 뿐 아무도 내리지 않는 9호선 지하철역에 몸을 욱여넣어 출근해본 경험이 있다면, 강남역 혹은 광화문에서 경기도로 향하는 빨간 버스를 타기 위해 늘어선 행렬에 끼어본 적이 있다면 쥘리가 출퇴근길에 겪는 분투를 몸으로 체감할 수 있을 테다. 반복적인 비트의 전자음악과 빠르게 움직이는 카메라워크는 어둑어둑한 새벽에 집을 나서면서도 ‘제때 도착할 수 있을까’ 초조하기만 한 쥘리의 출퇴근길을 긴박한 장르영화처럼 담아낸다.
도처에 놓인 그림자 노동
에리크 그라벨 감독은 여러 사람이 이렇게 근무시간 외에도 고된 분투를 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노동을 이야기할 때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쥘리라는 싱글맘의 일상을 통해 노동이지만 노동 범주에 합산되지 않는 노동, 값으로 매겨지지 않는 그림자 노동을 탐색한다. 경제학 석사를 수료한 쥘리는 육아로 경력이 단절됐고 두 아이를 홀로 키우기 위해 파리의 5성급 호텔에서 메이드로 일한다. 그녀의 일상에서는 호텔에서 일하는 시간만이 대가를 받는 노동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알람 소리에 눈뜨는 순간부터 그녀는 연쇄적으로 달려드는 ‘자잘한’ 일들을 해치워야 한다. 아이 둘의 밥을 챙기고 출근길에 이웃에게 아이를 맡기고 파업으로 운행이 고르지 않은 열차를 겨우 타 직장에 도착해야 한다. 회사 업무가 끝나면 오전의 삶은 고스란히 반복된다. 고달픈 퇴근길을 통과해 아이들을 데려와 씻기고 재워야 한다. 그제야 잠시 책상에 앉아 원래의 경력에 맞는 직장으로 옮기기 위해 면접 준비를 한다. 이렇게 특별한 사건 없는 일상이지만 감독은 쥘리의 일상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그려내어 어느 것 하나 그녀의 삶에서 미루거나 빠뜨릴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납득시킨다. 관객을 쥘리의 삶에 몰입시켜 그녀가 매일 겪는 피곤과 부담을 체감하게 한다. 노동이라고는 호텔 청소뿐인 것처럼 보이는 싱글맘의 하루는 이렇게 풀타임 노동으로 채워져 있다.
어느 것 하나 대단한 야망이 담긴 일은 아니지만, 쥘리가 엄마이자 동시에 일하는 가장으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고 열차가 운행하지 않는 날 파리까지 카풀해줄 이웃이 필요하다. 새 직장 면접을 보기 위해 근무시간을 교대해줄 동료도 필요하다. 여기서 무엇 하나 어긋나기만 해도 쥘리의 일상은 크게 휘청인다. 타인의 도움을 항상적으로 얻을 순 없기에 쥘리의 일상에는 끊임없이 긴장감이 생기고, 적절한 도움을 구하기 위해 매번 애써야 한다. 이웃들은 그녀에게 더 나은 방법을 알려주듯이 “회사 근처로 이사하면 되잖아”, “동네 마트에서 캐셔 일을 하면 아이를 더 돌볼 수 있잖아”라고 충고하지만 쥘리가 영위하는 일상과 타협되지 않는다. 모두가 각박한 일상을 감당하지만 그 각박함의 무게는 저마다 다를 수 있다. <풀타임>은 한 사람의 삶을 이토록 면밀히 들여다봐야 각박함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더불어 과연 이 무게가 각개전투로 감당할 만한 것인지도 묻는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노동영화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영화 속에 나오는 다른 여성들 역시 이름만 다른 쥘리들이다. 아이를 예뻐하지만 현실적으로 힘이 부쳐 돌봐줄 수 없는 이웃 아주머니나 회사에서 쥘리와 갈등하는 상사 실비, 쥘리 탓에 난처한 일에 휘말리는 리디아 역시 자기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또 다른 쥘리다. 돌봐야 할 가족이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멀리 출퇴근하는지 그녀들의 삶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지만 관객은 쥘리를 통해 그들의 삶까지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을 견디고 있는 사람은 쥘리뿐만이 아니다. 거리에서 시위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미덕은 파업 상황이나 회사 내부의 갈등, 혹은 쥘리와 주변 인물을 당위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노동자의 파업은 무조건 옳다거나 누군가의 출근길을 방해하는 일은 무조건 잘못됐다고 판단을 내리기보다 같은 처지임에도 생계적인 이유로 파업조차 참여할 수 없는 쥘리의 상황만 보여줄 뿐이다. 쥘리가 (온전히 그녀 입장에서) 어쩔 수 없다고 내리는 선택들도 전부 지지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무언가의 잘잘못을 가리기보다 감독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정을 한번 들여다보며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묻는 쪽을 택한다. 출근길 시위라든지 워킹맘 등 한국의 상황을 쉽게 대입해볼 수 있는 이야기 속에서 관객 역시 개인과 사회의 풍경을 다양한 맥락으로 재고해볼 계기가 될 것이다. 이렇게 노동의 층위와 노동자간의 관계를 면밀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풀타임>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노동영화다. 에리크 그라벨 감독은 사회적 이슈를 영화에 녹여내면서도 이야기에 장르적인 문법을 더해 차별적인 노동 스릴러를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