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만화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의 미도리야 이즈쿠부터 <주토피아>의 ‘나무늘보’ 플래시, <알라딘>의 알라딘에 이르기까지, 심규혁 성우의 목소리에는 작품의 중심을 단단히 잡으면서 캐릭터의 인장까지 새기고야 마는 효험이 있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프로젝트 <유미의 세포들>에서는 ‘이성’을 실체화하면서 내레이터로서 극을 서술하는 중책을 맡았다. 최근 오디오 콘텐츠 시장에서도 소비자들의 두터운 신뢰를 받으며 성우의 저변을 확장 중인 심규혁 성우를 만났다.
= 개인적으로는 육아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첫째가 두돌 좀 지났고, 둘째가 백일 조금 지난 상태에서 이번 추석이 처음 맞는 명절이었는데 쉽지 않았다. (웃음) 일적으로는 이시다 히로야스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표류단지>, 애니플러스의 수영 애니메이션 <프리!> 더빙 작업을 최근 했다. 펀딩을 받아 제작되는 오디오 웹툰 <집이 없어> 녹음도 끝냈다.
- <유미의 세포들>은 이전의 더빙 작업과 달리 실사 드라마의 독립된 캐릭터를 연기한 작품이었다. 처음 오디션 과정은 어땠나.= 스튜디오 녹음실에서 오디션을 두번 봤다. ‘이성 세포’는 캐릭터 보이스도 내레이션도 하기 때문에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다리 역할을 한다. 그래서 다양한 주문을 받으며 무척 상세하게 오디션을 봤다. 함께하기로 결정된 이후에도 구체적인 컨셉을 잡는 조율 과정이 길었다.
- 연기 방식에 있어 이전 더빙 작업과 다른 점이 있었나.= 처음엔 애니메이션과 실사가 교차되는 작품인 만큼 실사에 가깝게 연기하는 것도 시도해봤다. 결국 세포들의 얼굴에 목소리가 잘 붙어야 하기 때문에 기존 더빙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성우마다 연기 방식이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나는 최대한 그림에 잘 어울리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그래서 내레이션은 실사에 입히는 톤으로, 이성 세포로서 연기할 땐 애니메이션 그림에 맞게끔 연기했다.
- ‘이성’이란 추상적인 개념을 목소리로 연기한다는 건 어떤 경험이었나.= 초반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실사쪽은 아직 촬영에 들어가지 않았고, 워낙 새로운 시도다보니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캐릭터를 잡아갔다. 이성 세포 안에도 다양한 감정이 있다. 혼이 빠질 때도 있고 다른 세포들에게 화를 내며 다그치기도 한다. 너무 딱딱하게 연기하면 이성적인 게 아니라 AI처럼 보일 수 있고, 그렇다고 감정이 너무 격해지면 이성 세포답지 않기 때문에 표현에 있어 적정한 테두리를 정했다. 전반적으로 이성 세포는 정신이 나가더라도 곱게 나간다는 느낌으로 컨셉을 잡았다. (웃음)
- 감성 세포를 연기한 박지윤 성우와의 조화도 중요했다.= 박지윤 성우와는 평소 잘 아는 사이라 함께 일에 관한 대화도 자주 나눈다. 하지만 녹음은 따로 했다. 스케줄상 내가 먼저 녹음했는데, 박지윤 성우가 이렇게 표현하지 않을까 상상하며 연기했다. 워낙 경험이 풍부한 성우들이 포진한 작품이다보니 찰떡처럼 잘 받아주더라.
- <유미의 세포들2> 6화와 7화에 서점 주인으로 특별 출연했다. 직접 얼굴과 몸짓까지 나오는 연기를 해보니 어땠나.= 성우들도 오프라인 행사 경험이 많고, 특히 요즘엔 유튜브 콘텐츠 제작이 활발하다보니 카메라 경험이 전혀 없는 경우보단 나았지만 드라마 촬영은 처음이라 많이 긴장됐었다. 대학교 방송국에 있던 시절 친구들과 단편영화를 찍었던 기억을 최대한 짜내면서 촬영했다. (웃음) 그런데 성우 연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평소 표정과 제스처도 열심히 관찰하고 연구해야 한다. 그림에 목소리가 잘 붙기 위해 배우와 거의 똑같이 연기해보면서 그 느낌을 찾아갈 때가 많다. 그래서 아주 짧은 신은 잠깐의 연습으로 소화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 이전에는 애니메이션, 외화, 게임 등 더빙이 주된 활동 영역이었다면 지금은 웹툰, 웹소설 기반 오디오 드라마, 드라마 CD, OTT 플랫폼 더빙 등 다양한 콘텐츠에 참여하고 있다.= 디테일한 내용물보다는 방송국에서 OTT로 플랫폼이 바뀐 것에 가깝기 때문에 작업 방식에는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이런 변화는 실감한다. 이전에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VOD나 실물 DVD로도 남기 때문에 성우들이 따로 녹음하며 디테일한 오디오 기술에 보다 신경 쓰고, TV로 방송되는 시리즈 애니메이션은 연기자들의 합과 한데 모였을 때의 흥을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소장용 DVD나 VOD와 유사한 속성을 갖고 있는 OTT가 플랫폼의 중심이 되면서 지금은 시리즈 애니메이션도 극장판처럼 작업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또한 공중파 라디오 채널에서 방송되던 라디오 드라마가 점점 사라지는 시대에 등장한 오디오 드라마 시장은 분명 성우에게 고무적인 부분이 있다. 라디오 드라마는 해당 방송국 소속 성우만 참여할 수 있었다면 오디오 드라마는 출신이 다양한 성우들이 함께 작업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시장의 확장 가능성은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작품의 퀄리티와 홍보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본다.
- 드라마 CD, 오디오 드라마는 목소리 연기를 다르게 접근하나.= 성우마다 작업 방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어떠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연기의 메커니즘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더빙은 이미 정해진 그림에 목소리가 잘 붙게 하는 게 최대 목표이기 때문에 성우의 창의성이 끼어들 틈은 거의 없다. 입모양도 점점 더 디테일하게 맞춰야 하는 추세다. 내 색깔을 너무 입히려고 하다보면 그림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성우의 개성을 보여주는 적절한 범위를 찾아야 한다. 오디오 드라마는 웹툰과 함께 가는 경우라도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으로 고정된 게 아니기 때문에 좀더 내 것을 집어넣을 수 있다.
- 드라마 CD나 오디오 드라마의 경우 로맨스, 로맨스 판타지, BL 등 소비자의 취향이 중요하고 원하는 바가 명확한 콘텐츠들이 많다.= 장르마다 좋아하는 포인트들은 확실히 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회자될 신을 예측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래서 청취자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며 그들의 피드백을 살피고 다음 연기를 할 때 자연스럽게 반영한다.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학습되는 부분이 있다.
- 장르 특성상 수위가 높은 신도 많다.= 배우들이 수위 높은 베드신을 연기할 때가 있는 것처럼 성우들도 그냥 하는 거다. (웃음) 그리고 각자의 상상 속에 있는 그림에서 소리만 가져와 레코딩 시스템에 집어넣는 것 아닌가. 마치 텍스트 콘텐츠가 그런 것처럼 목소리를 들으며 각자 머릿속에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게 오디오 콘텐츠의 강점 같다.
- 장르 특성상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설정에 일정 부분 현실감을 부여한다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사람들이 콘텐츠에서 본질적으로 원하는 것은 ‘진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현실적인 상황을 그럴 법하다고 느껴지게 하는 게 우리의 목표다. 가령 로맨스 판타지 장르는 서구적인 배경을 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사화를 할 때 각색을 많이 해야 한다. 그런데 오디오 콘텐츠는 독자들이 상상한 그림을 최대한 저해하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 실제감을 만들 수 있다.
- 앞으로 콘텐츠 산업에서 성우의 활동 반경을 어떻게 전망하고 있나.= 사람들이 오디오에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귀 기울여 듣는다면 더 좋은 방향을 찾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최근 K콘텐츠들이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데, K애니메이션이나 K게임으로 그 저변이 확장된다면 한국인 성우의 위상 역시 높아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우들이 보다 각성하고 시류에 뒤처지지 않도록 소비자와 소통하며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