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성우들은 작품 밖에서도 자기 캐릭터의 생을 연장해 살아가는 일에 익숙하다. 여고생 5명으로 구성된 밴드 로젤리아의 성장담 <뱅드림!> 시리즈, 소녀들이 경쟁하는 치열한 공연의 세계를 담은 뮤지컬 애니메이션 <소녀☆가극 레뷰 스타라이트>의 중심에 선 아이바 아이나 역시 그렇다. 10월21일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발 개막식 참석을 시작으로 <소녀☆가극 레뷰 스타라이트 론도 론도 론도>, <극장판 소녀☆가극 레뷰 스타라이트>의 극장 상영, 그리고 스페셜 토크로 바쁘게 활약한 아이바 아이나는 한국에서도 점점 더 팬층을 넓혀가는 일본의 인기 성우다. 연극배우로 시작해 프로레슬러 활동을 거쳐 성우이자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그는, 자신의 모든 정체성에 충실할 수 있는 그 남다른 에너지의 비결로 “분한 마음도 힘으로 바꿔버리는 건 웃음, 또 웃음”이라고 환하게 웃으며 알려주었다.
- <스페셜 토크: 아이바 아이나를 만나다> 프로그램 클래스 참가 차 BIAF를 찾았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오랜 단절 이후 해외 팬들과 오랜만에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자리가 아닐까 싶은데.
= 맞다. 그래서 정말 기쁜 마음으로 왔다. 팬데믹 기간 동안 라이브 스트리밍 방송을 시작했는데, 해외 팬들 또한 방송을 찾아주신다는 것에 많이 놀랐다. 어제도 방송 댓글에 한국 팬분이 부천 도착을 반겨주는 댓글을 달아주셨다!
- <뱅드림!> 시리즈의 미나토 유키나 캐릭터를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크게 상승했다. 의연한 태도로 밴드 로젤리아를 이끄는 미나토 유키나와 실제 아이바 아이나의 쾌활함이 만드는 ‘갭 차이’가 매력 포인트로 꼽히곤 하더라.
= 확실히 미나토 유키나는 쿨해서 나 아이바 아이나는 정반대의 성격이다. 그러나 일에 대한 사고방식이라고 할까, 심지가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있어 굽히지 않는 지점에서 우리는 같다. (웃음) 실제와는 극명하게 다른 말투 차이에서 생기는 괴리 같은 것은 처음엔 오히려 혼자서 걱정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어색하다고 받아들이는 분들이 계실까 봐.
- 캐릭터의 정체성 그대로 라이브 공연을 한다는 점에서 작품 바깥에서도 자신의 캐릭터를 계속해서 탐구하고 이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캐릭터성에 투철한 태도 역시 이 직업에 필요한 중요한 프로 정신인 걸까.
= 역시 그런 것일까! <뱅드림> 시리즈의 로젤리아라는 밴드로서는 주로 라이브 공연을, <소녀☆가극 레뷰 스타라이트>의 사이죠 클로딘으로서는 주로 뮤지컬을 하기 때문에 준비하는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최대한 무대 위에서도 캐릭터 그 자체가 되기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목소리 뿐 아니라 몸짓에서부터 닮아가려 한다. 강인한 리더인 미나토 유키나가 될 때엔 내 어깨가 펼쳐지는 각도부터 다르다. 유키나에겐 동시에 어딘가 덧없고 허무한 느낌도 필요해서 약간 좁은 보폭으로 선다. 반면에 사이죠 클로딘을 연기할 땐 프랑스 혼혈이라는 특징을 잘 살리고 싶었다. 유튜브에서 프랑스 채널을 많이 본다든가 프랑스 영화를 많이 찾아보면서 특히 목과 어깨의 움직임, 자세 같은 것을 연구했다. 기품과 고집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구현하고 싶었다.
- 성우의 일은 소리 쪽에 집중될 거라 생각했는데, 연극 배우 그리고 프로레슬링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몸을 쓰는 것에 대한 묘사를 더 많이 들려주는 것 같다.
= 녹음을 할 때 겉으로 보이는 부분부터 잘 설정해야 목소리 또한 제대로 자리 잡는다고 믿는다. 특히 초창기일수록 중요한 과정이다. 예를 들어 사이죠 클로딘의 경우에는 팔을 이렇게 허리에 올려놓는 자세로 녹음했다. 목소리에 좀 더 탄력감이 들어가도록. 미나토 유키나는 왼쪽 손을 오른쪽 팔뚝 위에 살포시 올려놓는 식으로 둘의 포즈가 완전히 달랐다.
- 아이바 아이나다운 포즈란 것도 있을까.
= 음... 아마도 생각하는 포즈? 관자놀이나 턱에 손을 갖대 대고 이렇게 고민하는 얼굴이 아닐까. ‘어쩌지, 이번에도 잘해내야 하는데’ 하는 느낌으로. (웃음)
-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지만, 그 중 인기 IP들은 여러 시리즈 혹은 공연 등의 형태로 오랫동안 지속된다. 특정 캐릭터와 긴 시간 함께 한다는 것이 아이바 아이나 개인의 인생에도 영향을 끼치나.
= 물론. 인생에서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 역할이 천천히 나를 따라오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나 역시 내가 연기한 캐릭터로부터 배운다든지, 혹은 살아가면서 인물을 알게 모르게 흉내 내는 부분이 생긴다. 현실적으로 한 캐릭터를 오래 연기하게 되면 작품에 참여하는 스태프들과도 가까워지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나의 특징을 캐릭터 디벨롭 과정에 포함해주시기도 한다. 내가 엄청난 길치인데 어느새 미나토 유키나가 길치가 되어 있더라. (웃음) 주변 사람을 챙길 때 기쁨을 느끼는 내 성격이 사이죠 클로딘에게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반면 과거에 라이브 공연에서 실수를 하거나 원하는 만큼의 퍼포먼스를 선보이지 못한 경우 너무 심하게 자책하던 성격의 내가 이제는 좀 더 의연하게 마음을 고쳐먹고 빠르게 다음 스텝으로 나아간다. 유키나와 클로딘에게 배운 거다.
-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하며 가수를 꿈꾸다가 극단에 들어갔고 갑자기 프로레슬러로 전향해 스포츠계에 몸담았다. 성우가 된 이후로는 뮤지션으로서도 주목받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을 관통하는 특성이 있다고 느끼나.
= 사람들을 웃게 한다는 것. 어릴 때 친척들 앞에서 이런 저런 퍼포먼스를 보여줄 때부터 그들의 표정이 내게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나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웃고 신나는 얼굴이면 좋았고, 조금 지루한 기색이 스치면 금방 불안해졌다. 오사카 출신의 평범한 여자애가 연예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내 삶의 키워드는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을 안겨주는 것이란 분명한 사명을 갖고 전진했다. 여러가지 정체성 속에서 가끔은 힘들고 분할 때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도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인생,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은 많이 웃자는 마음으로 버텼다. 사람의 목은 무척 섬세한 기관이어서 미세한 감정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긴장과 불안을 건강히 해소하는 것이 중요한데, 웃음과 미소는 내게 가장 중요한 해독제다.
- <사무라이 하트> 라이브 무대를 봤다. 엄청난 ‘기세’의 라이브였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 어떤 의식을 치르지 않는 이상 나오기 힘들 것 같은 에너지였달까. (웃음)
= 에에에, 정말? 사실 나만의 루틴이 있긴 한데... 우선 멤버들과 함께일 때는 무대 위에 올라가기 직전에 꼭 멤버 전원과 허그를 한다. 그 다음 서로의 등을 엄청나게 세게 탁! 쳐준다. 가차 없이, 아주 아프게! 그러면 기운이 확 올라오거든. (웃음) 혼자 있을 땐 거울 앞에서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된다 된다 된다 된다…’라고 주문을 건다.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는 암시를 계속 주는 거다.
- 일본 무비자 입국이 재개되어 직접 일본을 찾는 한국 팬들의 발걸음도 다시 이어질 전망이다. 향후 공연 일정을 소개해준다면.
= 11월12일에 <뱅드림!> 라이브가 열린다. 원래 2020년에 예정했던 공연을 이제야 개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은 그동안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던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현재 일본은 아직 관중이 육성 응원까지는 할 수 없는 상태라 공연이 재개된 건 기쁘지만 객석에서 날아오는 함성을 들을 수 없어 슬픈 마음도 든다. 11월13일엔 부시로드(<뱅드림!> <소녀 가극 레뷰 스타라이트>의 제작사)창립 15주년 기념 라이브 공연이 열린다. 사이죠 클로딘, 미나토 유키나 두 캐릭터의 모습을 모두 보여드릴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 같다. 또 이 무렵엔 육성 응원이 가능해진다는 말도 있어서 조심스럽게 기대하고 있다. 2023년 1월7일에에는 <소녀 가극 레뷰 스타라이트> 오케스트라 라이브, 2월엔 뮤지컬도 앞두고 있다. 2023년 초엔 아마도 사이죠 클로딘으로 살아갈 시간이 좀 더 많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