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막 연기 활동을 시작했던 박예영 배우가 <씨네21>과 만났을 때 그는 “한편의 극을 온전히 이끌어나가는 여성 캐릭터”를 맡고 싶다는 포부를 던진 적 있다. 이 포부가 몇년 뒤 커다란 궤적을 그리며 <언니 유정>에 도달했다. <언니 유정>에서 박예영 배우는 동생 기정(이하은)의 영아 유기 사건을 좇으며 동생과의 관계, 자신의 존재론을 꿋꿋이 찾아나가는 간호사 유정 역을 맡아 한편의 극을 온전히 이끌었다. 사건의 진실을 모르는 유정의 눈동자와 시선은 대개 흔들린다. 그러나 그 안엔 분명히, 어떤 생각의 변화가 또렷하게 담겨 있다. 이 복잡다단한 감정의 흐름을 자연스레 체화해낸 박예영 배우는 <언니 유정>의 굳건하고 섬세한 방향타가 되어 극의 서사를 유려하게 운행했고, 윤색 크레딧에 이름을 올릴 만큼 작품에 깊숙하게 관여하기도 했다.
- 정해일 감독과는 단편 <인사3팀의 캡슐커피> <더더더>에 이어서 세 번째 협업이다. <언니 유정>의 출연 계기는.
영아 유기 사건이라는 소재를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감독님의 섬세한 마음이 잘 느껴졌다. 자칫하면 누군가의 잘못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소재지만, 어떤 인물도 어떤 관객도 영화를 보며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감독님과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논의해나갔고 대사 하나하나를 두고 직접 연기해보면서 마음에 걸리면 함께 고치는 과정을 거쳤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영화가 되기를 바랐다.
- 정해일 감독이 “유정이가 언제쯤 부정, 슬픔, 이해 단계를 거칠지”로 이야기가 흐른다고 밝혔다. 세 감정의 기점은 어디였나.
시나리오 작업 때 플롯이나 영화적인 구조 중심으로 유정 캐릭터에 접근하진 않았다. 난 유정이의 감정선이 우선이었다. 이때쯤이면 유정이가 어떤 걸 느낄지, 또 주변 인물들은 어떨지 모조리 신경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번의 변화가 드러났다. 면회에 가서 기정이와 이야기하는 세번의 장면이다. 영화를 끝내고 천천히 곱씹어보니 처음 찾아갔을 때, 중간에 만났을 때, 마지막에 봤을 때 아예 다른 유정이가 돼 있다고 느꼈다.
- 말문이 막힐 때마다 유정은 시선을 돌리고 다른 곳을 본다. 영화 내내 타인의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의도하진 않았다. (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눈을 바라본다는 건 어떤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정의 사건을 파헤치는 유정은 계속 확신이 없던 상태였다. 동생에 대한 사랑은 있지만 상황에 이리저리 이끌려가는 처지였으니 남들과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던 것 같다.
- 기정과의 면회 중 서로를 똑바로 쳐다보는 정면 클로즈업 장면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유정에게 눈을 마주하며 자신의 마음과 사랑을 똑바로 전할 수 있는 상대는 기정뿐이었다. 유정이가 그렇게 느꼈다는 감정을 감독님께 의논했고, 유정의 중요한 감정을 이해한 감독님께서 촬영감독님과도 협의하여 만들어낸 장면이다.
- 유정의 감정이 가장 폭발한 때는 고모에게 “고모가 우리 엄마냐”라며 화내는 대목이다. 실컷 울기도 한다. 이때 유정의 감정적 진원은 무엇이었나.
사실은 화풀이기도 하고. 고모가 엄마 대신 유정과 기정을 키워준 만큼 더 친밀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도 남들보다 엄마나 가족에게 더 쉽게 짜증을 내곤 하니까. 유정이 기정의 언니이긴 하지만 사회에선 초년생에 속하고 모든 일에 서투른 때다. 그런데 언니 노릇도, 엄마 노릇도 해야 하고 병원에서 일할 땐 임신부를 간호해야 하는 중책도 맡고 있다. 그렇게 켜켜이 쌓여 있던 감정이 폭발한 거의 유일한 장면이었던 것 같다.
- 그런데 문 앞에서 오열하던 유정은 금세 일어나 전화를 받으러 간다. 이토록 담담한 유정의 면모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유정이 기정에게 쓴 편지를 읽는 내레이션에 “나도 엄마가 없어진 어린 여자애일 뿐인데”라는 말이 나온다. 내가 직접 대사를 쓴 부분이다. 어렸던 유정이는 K장녀가 돼서 무던하게 집안을 지켜야 했다. 다만 기정이에게도 그런 면이 있어서 서로 강한 척을 하다 보니 소통이 무뎌졌다. 서로에게 제대로 기대지 못했다. 건강하게 의지하는 관계였다면 기정의 사건도 다르게 흘러가지 않았을까.
- 편지의 대사를 직접 쓴 건 감독의 제안이었나.처음엔 감독님이 대사를 써오셨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유정 역인 내가 직접 써보는 게 낫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계속 자신이 없다고 말하긴 했는데 어떻게 완성하고 나니 감독님이 굉장히 좋아해주셨다. 편집본을 다 본 후에 쓴 터라 감정적으로 몰입하기가 더 쉬웠다. 기정이가 혼자 있을 때 어떤 표정이고, 수갑을 어떻게 차고 있는지 직접 보고 나니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 마음을 글에 담았다.
-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작품을 연출해볼 계획은 없나.영화과에서 공부할 땐 연출 강의도 많이 들었고, 연출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런 깜냥이 될지 의문이다. (웃음) 몇년을 붙잡고 시나리오를 탈고하는 분들을 보면 존경심이 들 뿐이다. 아직까진 엄두가 안 나지만 언젠가 이루고 싶은 꿈이긴 하다.
- 연기를 시작한 지 대략 10년 정도가 흘렀다. 지난 시간을 돌아볼 시점이기도 할 것 같다.
지난해에 디렉터스컷 어워즈 시리즈 부문에서 올해의 새로운 여자배우상을 받았다. 10년을 연기한 뒤 받는 새로운 여자배우상, 너무 좋더라. (웃음) 10년 동안 한결같이 앞에 놓인 일에 최선을 다하고 상처받기도 하면서 나아갔다. <씨네21>과 가진 2017년 인터뷰 이후 이렇게 다시 재회한 순간도 선물 같다. 내가 하는 연기에 대해 어떤 반응을 듣는 일이 가장 감개무량하다. 계속 이렇게 즐겁고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