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삼키는 수많은 마음과 힘겹게 내뱉는 짧은 말. 기정(이하은)에게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은 마음과 마음 사이의 투명한 다리를 신중히 두들겨보는 시간이다. 영아 유기 사건의 용의자로 자수한 후 심적으로 고립된 기정에게 그 과정은 슬픈 거짓말로 귀결되곤 했다. 하지만 배우 이하은이 기하는 신중함에는 불안 대신 미소가 서려 있었다. 답변에 앞서 말을 고르는 눈빛은 가장 깊은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뜸이었다. 춘추복을 입고 도로를 내달리던 어느 새벽을 기억하는 표정과 촬영 순서를 기다리며 박예영 배우와 나누던 소담. 이하은이 전하는 온기는 기정이 그토록 건네고 싶었던 마음이 결국 주변인을 향한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 지난 5월 <언니 유정>으로 전주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예전부터 대학 동기들과 전주국제영화제를 자주 놀러 가곤 했다. 첫 장편영화 주연작으로 전주를 찾을 수 있어 정말 감사했다. <언니 유정>의 완성본을 처음 관람한 것도 전주에서였다. 관객들의 반응과 숨결을 그대로 느꼈던 순간을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 대학 재학 당시부터 여러 독립 단편영화에 출연하며 탄탄한 경력을 쌓아왔다. 연기를 공부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친언니가 먼저 연출을 공부했다. 언니가 고등학생이었을 무렵 과제를 잠깐 도와달라며 내게 부탁한 적이 있다. 그때 경험했던 첫 촬영장이 굉장히 인상 깊게 남았었나 보다. 자연스럽게 연기 학원을 찾게 되었으니 말이다.
- <언니 유정>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정이 기억나는가.
조사실에서 기정과 언니 유정(박예영)이 나누는 대화 장면이 특히 궁금했다. 서로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는 자매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눈을 마주치는 상황이다. 일단 현장에서 그 감정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미팅에 참석했다. 내가 대본을 보며 대사를 읽자 감독님이 앞을 바라보며 말해줄 수 있는지 부탁하셨다. 감독님이 내 눈을 보고 싶어 그러신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 조사실 장면에서 유정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기정의 섬세한 시선 처리가 기억에 남는다. 대사 사이의 긴 공백도 표정과 눈빛으로 넘치도록 메우는 듯했다. 특히 “언니가 생각이 안 났어”라고 말하며 눈을 피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시선의 흐름을 미리 계획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현장에 도착해 그 자리에서 언니의 호흡과 내 호흡을 맞춰보려 노력했다. 연기하면서 나도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거나 대사를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순간들이 생기더라. 언니와 오랫동안 많은 대화를 나눠와서 그랬는지 현장에서 몰입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눈과 얼굴이 스치게 되었다. 특히 정해일 감독님은 배우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많이 열어주셨다. 언니의 호흡을 읽으며 침묵을 이어나가는 그 모든 시간을 충분히 기다려주셨다.
- 기정이 겪은 사건의 인과나 세부를 드러내는 일을 자제함으로써 그것이 핵심이 아니라고 말하는 단호한 태도가 <언니 유정>의 미덕이라 느꼈다. 다만 배우의 입장에서는 기정의 감정의 빈칸을 채워나가는 과정이 필요했을 수도 있겠다.
감정 기복이 무척 크고 속마음을 잘 털어놓지 않다 보니 남모를 외로움도 많았을 친구라고 생각했다. 가족의 안정감에 대한 결핍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기정이 정면으로 마주보는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기저에 깔려 기정을 힘들게 하는 부류의 결핍이 아닐까.
- 기정은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한편 실질적으로 엄마 역할을 수행한 유정에게는 데면데면한 모습을 보인다. 기정의 마음속에서 엄마와 유정의 존재는 서로 얼마나 중첩되어 있을까.
“엄마를 생각하면 냄새나 그런 건 좀 기억이 나는 것 같아”라는 대사가 있다. 엄마에 대한 기정의 마음이 담겨 있는 대사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많이 그리워했을 것이다. 기정에게 유정은…. (잠시 고민) 서로 서먹한 관계가 되어버렸지만 분명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 단 하나뿐인 소중한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 기정에게는 유정보다 친구 희진(김이경)이 더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기정에게 제일 친한 친구이자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또래가 희진이다. 놀이터 신처럼 희진과 함께하는 장면을 찍을 때는 현장에서도 진짜 고등학생처럼 깔깔깔 웃으면서 임했다. (김이경 배우와도) 나이가 같아 바로 친구가 되었다. 유머 코드도 잘 맞아 서로 진짜 많이 웃으면서 촬영했다.
- 전동 킥보드를 타고 텅 빈 도로 위를 누비는 기정과 희진의 모습이 오래 마음속에 남았다. 일말의 자유를 누리는 아이들의 표정이 난연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칫 중앙선을 넘어갈 것만 같은 몸짓이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사실 그날 현장이 되게 추웠다. (웃음) 차를 타고 언덕을 올랐다가 다시 킥보드를 타고 내려오는 장면을 반복했다. 새벽까지 찍느라 힘들기도 했지만 오히려 무척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행도 그렇지 않나. 순탄한 여행보다는 비가 퍼붓는 산길을 함께 걸었던 힘들고 거친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는다.
- 드라마 <다크홀>의 악역 윤샛별, <모범형사> 속 사형수의 딸 이은혜 등 도전적인 배역을 맡아왔다. 도전하고 싶은 역할이나 장르가 있나.
비슷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저 더 좋은 이야기를 가진 작품이 좋다고 대답하곤 한다. 장르는 성장이나 가족드라마, 또 진지한 사회파 영화를 좋아한다.
- 듣고 보니 <언니 유정>이 아닌가. (웃음)맞네! (웃음) 돌아보니 이런 영화가 취향이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비슷한 결에서 <애프터썬>도 무척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