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② 이진우 철학자의 관점에서: 우리의 마음이 멀티버스이다
2022-11-03
글 : 이진우 (철학자)

[필자소개]

연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대학에서 철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 철학과 교수를 거쳐 동 대학 총장, 포스텍 교수, 한국니체학회 회장, 한국철학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포스텍 명예교수이다.

“너도 여기에 있다니 참 좋다.” “나는 너와 함께 여기에 있어.” 자신의 실존적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실존 자체가 존재할 이유와 의미라는 사실을 깨달으려면 엄청난 사건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진부한 인식은 우리를 새로운 우주로 안내한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영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갑자기 원시의 적막이 내리고, 어느 생명체도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황량한 세계를 바라보며 두 돌이 나누는 무언의 대화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철학적 메시지를 간단하게 전달한다. 인간은 보잘것없고 어리석은 존재다. 무한한 우주 속의 미미하고 무의미한 존재이지만, 모든 게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인간처럼 무의미한 존재가 의미를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당신이 무언가를 보고,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주기를 바랐다.” 이 영화의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조용하고 슬픈 돌의 장면은 무의미한 인간 실존의 의미를 묻는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다중우주’(multiverse)를 소재로 하는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대사회가 빚어내는 혼돈 속에서 자아의 의미를 찾는 실존 방식에 대한 송가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Nothing matters)는 사실을 숙명처럼 경험할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에서 ‘모든 게 중요하다’(Everything matters)고 느낄 수 있는 실존 방식의 탐색이 이 영화의 숨은 묘미다.

허무주의적 혼돈의 시대에 자아 탐색은 위험한 모험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가늠할 수 없는 속도로 변화하는 속도의 시대에 처해 있는 현대인의 자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다중우주와 다중 세계전쟁의 비유를 사용한다. 그 중심에는 아버지(제임스 홍)의 반대를 무릅쓰고 웨이먼드(조너선 케 콴)와 결혼해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미국으로 왔지만,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민 생활에 차츰 지쳐가는 에블린(양자경)이 있다. 자신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의 생일 파티를 준비해야 하고 남편 웨이먼드는 이혼장을 내밀고, 사이가 좋지 않은 딸 조이(스테파니 수)는 동성애자라고 밝히면서 자신의 연인을 소개하는 와중에 에블린은 세무 조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복잡한 관계로 인해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문제에 짓눌린 에블린의 삶과 자아는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작은 우주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대안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자아를 확립하고 의미 없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에블린이 처한 현실의 혼돈은 어디에서 오는가? 에블린은 자신의 선택과 자유의지로 미국으로 와서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을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본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 애쓴다. 내가 선택한 모든 행위가 하나의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낸다면, 에블린이 아버지를 떠나기로 결정한 순간 그녀는 다른 우주로 점프한 것이다. 에블린이 예쁘고 똑똑한 아이로 기억되는 아버지의 우주와 아버지를 떠났음에도 끊임없이 그의 인정을 구하는 에블린의 우주는 같은 우주일까? 이 두 세계가 동시에 공존하고 끊임없이 충돌한다면, 에블린의 마음이 바로 멀티버스인 것이다.

에블린의 마음속에도 아버지가 있는 것처럼, 아버지의 마음속에도 에블린이 살고 있다. 에블린은 ‘어디에나’(everywhere) 있다. 평행우주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가 아닌 평행선상의 다른 세계를 의미한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수많은 평행우주가 존재한다. 에블린의 딸 조이는 삶의 평행성을 비유한다. 이민 가정의 ‘타이거 맘’이 그렇듯이 에블린은 조이를 상당히 엄하게 교육했을 것이다. 조이는 엄마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좌절한다. 에블린이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본 자신의 삶을 형편없다고 느끼는 것처럼, 조이가 자신의 삶을 마찬가지로 그렇게 느끼는 것도 자신의 눈이 아닌 엄마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에블린이 조이의 삶을 받아들이면서도 완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까닭은 아버지가 조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조이의 마음속에 있는 에블린은 아버지의 시선으로 딸의 삶을 판단하는 에블린과 동일인일까? 이렇게 에블린 마음속에서 우주는 무수히 많은 평행 세계로 분열되고 확장된다.

나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나와 만날 수 있는가? 내 마음속에서 만난 다른 사람은 과연 그가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는 바로 그 사람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동원된 온갖 장치가 바로 ‘다중우주’이고 ‘우주 점프’(Verse Jumping)이다. 국세청에서 세무 사기와 중대 과실의 경고를 받아 현실의 혼돈에 빠지는 순간, 에블린은 이미 알파 우주의 조종을 받는 남편에게서 우주 점프의 장치를 건네받아 무한히 펼쳐지는 다중우주와 우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알파 우주는 에블린의 다양한 욕망과 그것이 빚어내는 평행 세계에 대한 비유이다. 이 알파 우주의 핵심은 조이의 또 다른 자아인 ‘조부 투파키’이다. 모든 질서를 파괴하고 파괴의 혼돈을 초래하는 조부 투파키의 마음은 바로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허무주의다. 자신의 꿈과 희망, 자신이 아끼는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베이글은 절대적 무의미를 상징한다. 스스로 허무의 베이글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조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에블린과 가족뿐이다. 그런데 너무 많은 일을 겪은 에블린도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고 자멸의 길로 향하고 있지 않은가?

가수, 소설가, 요리사, 배우, 쿵후 고수 등 현란한 영상으로 폭격하듯 보여주는 다중우주 속 에블린의 모습은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에블린이 웨이먼드와 함께 떠나지 않았더라면 실현했을 수 있는 더 나은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만약 ~했더라면’의 가정법을 전제하는 선택되지 않은 대안적 삶을 멀티버스로 보여주지만, 지금 선택할 수 있는 미래의 대안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조이가 엄마에게 바라고 또 에블린이 아버지에게 바라는 것은 지극히 간단하다. 아버지가 한번쯤 에블린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것처럼, 조이도 엄마가 자신의 우주로 들어와서 세상을 보기를 바란다.

왜 에블린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으면서 불행의 혼돈에 빠진 것인가? 지금의 삶을 변화시킬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향한 회고적 상상은 진정한 대안이 아니다. 이제까지 에블린의 삶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단일우주’(Uni-verse)였다면, 그녀가 마음으로 경험한 멀티버스(Multiꠓverse)는 미래로 열려 있다. 인생은 그렇게 나쁘지 않아! 대안은 언제든지 있어! 손가락으로 핫도그를 먹고, 발로 피아노를 치는 우주가 있듯 우주에서는 모든 게 일어날 수 있어!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친절하게 대하면, 세상의 모든 것(everything)이 중요해진다. 무엇보다 지금 그리고 여기 너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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