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정훈 작가 추모 기획①] 당신과 함께 25년을 웃고 울었습니다
2022-11-11
글 : 김소미
사진 : 오계옥
故 정훈 1972~2022

‘정훈이 만화’의 정훈 작가 2022년 11월5일 별세

정훈 작가가 남긴 만화와 말, 그리고 삶에 대하여

‘정훈이 만화’의 정훈 작가가 2022년 11월5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50살. 정훈 작가는 1995년 <씨네21> 15호에 <포레스트 검프> 패러디 만화를 그린 것을 시작으로 2020년 1286호 <레벨16> 편에서 마지막 인사를 남기기까지, 약 25년간 잡지의 인장을 그려넣는 이였다. 많은 독자들이 그로 인해 책의 마지막 장부터 펼쳤다. 고인은 2021년 12월 급성 백혈병을 진단받은 후에도 자신의 만화와 닮은 명랑과 낙관을 유지해 대구 계명대학 동산병원에서 ‘훈이 아저씨’라 불리는 인기 스타였고, 투병 생활을 만화로 옮긴 <슬기로운 환자생활>도 구상 중이었다. 너무 이른 작별임에도 아내 권정화씨는 기자에게 당부했다. “결코 비극적이거나 슬픈 죽음이 아니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진심을 다해 즐겁게 보냈다.”

고장 수리 중.’ 병세가 지속되자 정훈 작가는 메신저 프로필에 이렇게 썼다. 지인들을 걱정시키지 않게 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치료 중인 환자 자신을 빗대어 고장 수리 중이라고 농치듯 말하는 그다운 유머였다. 그리고 얼마 전, 많은 이들이 오랜만에 정훈 작가로부터 먼저 날아온 메시지를 반갑게 열어보고는 온라인 부고장 앞에서 하루를 멈춰 세웠다. 고인은 2021년 12월 백혈병을 진단받은 후, 올해 4월과 7월에 걸쳐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을 받았고,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던 중 11월5일 오전 눈을 감았다. 생전 아내 권정화씨와 연명 치료를 거부하기로 논의한 그는, 마지막 무렵 몸을 가누기 어려울 때에도 “연명 치료를 원하면 눈을 한번, 원하지 않으면 두번 깜빡여 달라는” 주문에 끝까지 연명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의사를 표시할 정도로 굳건했다. 병원에서 ‘훈이 아저씨’와 주고받은 정담을 기억하는 간호사들이 그의 첫 번째 조문객이, 부고를 듣고 멀리서 찾아왔다던 이름 모를 독자가 그의 마지막 조문객이 되었다.

성실한 장기 연재 만화가

서울에서 태어나 창원에서 유년을 시작한 정훈 작가는 책의 여백이 보이면 무작정 그림을 그려넣던 학생이었다. 마땅한 만화적 도구도, 지식도 없이 윤승운, 김수정 작가, 그리고 닥터 슬럼프 캐릭터를 전범 삼아 자기 세계를 키웠다. 밴드 생활에 심취했던 고교 생활을 거쳐, 1990년대 초 대학 진학 대신 전업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백수 젊은이가 늘 리모컨을 붙들고 TV를 보면서 스스로를 리모커니스트라고 칭하는 단편이 그의 데뷔작인 대원씨아이 신인 만화가 응모전 당선작 <리모코니스트>가 됐다. 1995년 만화 잡지 <영챔프>가 주관한 제2회 신인 만화 공모전에서 수상했고, <씨네21>과는 9호에서 ‘만화계 메가톤급 신인’으로 인터뷰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곧이어 지면 개편을 시도한 <씨네21> 15호에 두쪽짜리 전면만화 코너 ‘만화 VS 영화’의 첫 주자로 나섰다. <다이하드3> <쇼생크 탈출> <레옹> 같은 인기작들을 2주 또는 3주 간격으로 패러디할 당시 그의 자리는 ‘전국 개봉관표’ 바로 앞장이었다. 1996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씨네21>에 매주 연재를 이어가는 동시에, <영챔프>에서는 <삼국지> 패러디 코미디의 원조 <트러블 삼국지>(~1997)로도 인기를 끌었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칸칸이 새긴 2000년대 초반, 그는 하나의 고유명사로 인식돼 2004년엔 만화 코너의 이름도 ‘정훈이 만화’로 바뀌었다. 2005년에 연재 10주년을 맞이했을 때 그는 이미 “편집장이 네번 바뀌는 동안에도 두 페이지의 텃밭을 한결같이 장악해온 행복한 영주”(김혜리)로 불렸다. 2008년 5월부터 잠시 휴식기를 가졌지만 독자들의 성원에 못 이겨 4개월 만에 다시 ‘정훈이 만화’ 지면에 복귀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편집장이 열번 바뀔 동안 <씨네21>의 ‘뒷문지기’를 맡은 최장수 연재 작가로 남았다. 2002년부터 합류한 의료 잡지 <청년의사>의 만화 코너 ‘쇼피알’ 역시 20년간 장기 연재해 총 975편을 남겼다. 남기남은 이곳에서도 의사 가운과 수술복을 입고 활약했다. 그의 마지막 작업은 2020년 7월부터 연재한 <국방일보>의 ‘임진왜란 무명열전’이다. 임진왜란 속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매주 한명씩 소개하는 이 코너를 완결까지 다섯 꼭지를 남겨둔 상황에서 병세가 악화됐다. 그는 끝까지 연재를 마치겠다며 의욕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정훈 작가는 무엇이든 한번 시작하면 유유한 자세로 끝내 오래 붙드는 남다른 지구력의 소유자였다.

영화의 프레임을 빌려 소시민의 일상과 정치 풍자를 고루 담아냈던 ‘정훈이 만화’를 통해 정훈 작가는 “유머와 연민의 결합을 통해 항복하게 만드는, 반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힘”(허문영 전 <씨네21> 편집장: 한국영상자료원 전시)으로 독자들을 설득했다. 특히 ‘정훈이 만화’는 영화 정론지를 지향했던 <씨네21>에 기분 좋은 활력과 재미를 불어넣는 마지막 보루였다. ‘정훈이 만화’의 캐릭터들- 남기남, 용길이할마시, 씨네박, 이끝봉, 김똘만 등이 “억울한 일도 당하고, 어리석은 판단도 하고, 그래서 난처한 처지에도 자주 놓이는”(이다혜 <씨네21> 편집팀장) 동안 독자들도 그들의 소시민성에 내 일처럼 울고 웃었다. 비단 영화뿐 아니라 <전설의 고향> <목욕탕집 남자들> <체험! 삶의 현장> 등 당대 방송가에 새겨진 대중의 일상도 면밀히 포착해냈고, 명절에는 만화로 그린 설, 추석 독자 퀴즈로 독자들과 우정을 쌓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훈이 만화’가 독자들에게 주는 만족감과 안정감은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은 기획도 저지를 수 있는 든든한 바탕”(문석 전 <씨네21> 편집장)이었고, <씨네21>의 내부자들에게도 “한주간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양의 위트와 유머를 제공해주곤 했다”(남동철 전 <씨네21> 편집장).

작가 스스로 “설정이나 캐릭터를 따올 때도 있고 영화를 끌어들이는 정도는 매번 다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는 상상력이 제한될 것을 우려해 여러 영화의 제목이나 컨셉만을 펼쳐놓고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처럼 멍하니” 구상하기를 즐겼다. 그 결과 <마이너리티 리포트> 속 사이보그의 기억 상실은 모 주간지 사무실을 떠도는 기자들의 고질병으로 변모했고, <나쁜 녀석들: 더 무비> 속 흉악범들은 ‘위조 전문가 남선생과 신선생’으로 둔갑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의 표창장 논란을 풍자한다. 이 황당하고 엉뚱한 비약의 미학을 <표현의 기술>을 함께 작업한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복잡해 보이는 사회문제의 핵심을 영화를 빌려 명쾌하게 간파해냈다. 게다가 나는 기승전결에 얽매이지 않는 ‘정훈이 만화’의 엉뚱한 매력을 통해 우리 시대 만화의 트렌드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유 작가에 따르면 고인은 “나는 기술적으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만화는 그림이 다가 아닌 것 같다. 짧은 분량 속에서 진실한 생각과 감정을 전하려고 애쓴 점을 독자들이 알아봐주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정훈 작가는 아이디어가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주변인들의 경험을 믿었다. 젊은 시절엔 친구들을, 결혼 이후엔 아내를 돈독한 동지로 삼고 마감의 공동 작업자로 초대한 그였다. “온갖 이야기를 던지고, 썰렁한 유머를 일삼다가 무언가 탁 걸려드는 순간이 그에겐 있었다.” 결혼 이후 오랫동안 함께 마감해온 아내 권정화씨는 남편의 죽음에 “동지를 잃었다”라고 표현했다.

<씨네21>과 함께한 25년

“한 페이지 남았어요. 채색만 몇컷 더 하면 됩니다.” 늦은 마감으로 <씨네21> 내 명랑한 악명을 자랑했던 정훈 작가는 “금요일 밤 12시에 벽돌 같은 외장하드를 들고 와 한주 마감의 마침표를 찍어주는 인물”(허문영 전 편집장)이자 아무리 마감이 늦더라도 “전화를 안 받는 법은 없었던, 성실한 마감인”(이다혜 편집팀장)으로 기억된다. 연재 초기엔 특급 우편으로 화요일에 원고를 부치거나 “술 먹고 놀다가 원고를 못 보내는 바람에 아버지께 비행기 값을 얻어 수요일에 급하게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도 했다”. 덕분에 정훈 작가가 살면서 비행기를 처음 타본 이날, 한겨레신문사에 도착해 사실은 목요일에 원고를 넘겨도 된다는 데드라인의 정체를 알아냈고, 그렇게 마감 꼴찌의 긴긴 역사가 이어졌다. ‘정훈이 만화’를 펑크낸 일화도 유명한데,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날 정훈 작가가 먼저 편집부에 연락해 마감을 관두고 시위에 나가겠다고 전하자 모두가 그의 뜻을 존중했다. 디지털 방식으로 잡지 제작 시스템이 변모하는 과정 또한 그가 창원, 일산, 대구로 생활의 터전을 옮기는 동안 고스란히 마주했다. 세월이 흘러 웹하드로 원고를 주고받으면서 편집부와의 접촉은 예전만 못해졌고, 작가 스스로 이 사실을 종종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초창기 기자, 편집장 대부분이 떠날 동안 정훈 작가는 25년을 함께했다. 그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씨네21>과의 일체감으로 따진다면 어느 누구도 정훈 작가를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조선희 <씨네21> 초대 편집장)

2021년 9월14일 시작된 한국영화박물관 기획전시 <정훈이만화, 영화와 뒹굴뒹굴 25주년>은 2022년 3월20일까지 열렸다. 2020년 연말에 <씨네21> 연재를 종료한 직후에도 휴식 없이 전시 준비로 약 반년간 바쁘게 보냈던 고인은 그즈음 15년을 함께한 반려견을 암으로 앞서 보내고 찾아온 상심의 시간도 이겨냈다. 병증을 정확히 진단받기 이전에는 친구들과 생애 첫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고,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정훈이 만화’ 전시에 참석했다. 이후 1년 가까이 병원 생활을 지속할 때에도 “병을 이겨낼 거라고만 생각하고 매일 씩씩했던”(권정화) 그는 “장례식장에서조차 누가 남기남 캐릭터의 원조냐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역시나 그처럼 웃긴 친구들”의 든든한 호위 속에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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