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알파빌’, 고통의 도시(들)
2022-11-16
글 : 스테판 뒤 메닐도 (<카이에 뒤 시네마> 평론가)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1960)부터 장뤽 고다르는 뛰어난 형식주의자였다. 실험적 편집, 다이얼로그 도중의 갑작스러운 컷, 풀 프레이밍된 그림, 배우의 목소리를 덮는 음악.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클래식 영화의 규칙을 하나하나 무너뜨렸다. 고다르는 세계와 동시대 사람들(철학자이건 학생이건 노동자이건)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고, 필름누아르나 SF 같은 장르에 예술영화를 접목한 팝 시네아스트의 선두 주자이기도 했다.

1965년 고다르는 전체주의, 컴퓨터의 절대권력, 인간의 상품화 같은 현대의 모든 공포가 집약된 미래도시 ‘알파빌’을 발명한다. 사립 탐정 레미 코숑이 주인공인 <알파빌>(1965)은 프리츠 랑과 <메트로폴리스>(1927), 그리고 필름누아르에 대한 감독의 애정을 가늠케 하는 작품이다. 고다르에게 알파빌은 미래도시라기보다 시멘트 건물로 뒤덮여가던 60년대 당시의 파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알파빌>은 공상과학영화라기보다 당대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로 봐야 한다. 1967년 그는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에서 다시 한번 이러한 파리의 초상을 그린다. 그리고 1991년, 베를린장벽 붕괴 후 고다르는 <알파빌>의 주인공 레미 코숑을 <신독일 영년>으로 다시 호출한다. 그리고 유령의 거리를 헤매는 레미 코숑의 쓸쓸하고 향수에 젖은 산책이 시작된다. 구소련은 사라졌지만 과연 진정한 승자는 누구일까?

우리가 사는 현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한 세편의 영화 <알파빌>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 <신독일 영년>을 통해 고다르는 우리에게 전체주의, 진보라는 기적, 인간을 소외시키는 소비사회, 그리고 역사적 범죄에 대한 망각에 맞서 싸우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경고한다. 사랑과 시가 없으면 인간의 마음은 얼어붙고, 우리는 감정 없는 기계로 전락한다고.

레미 코숑

1965년 사립 탐정 레미 코숑은 나타샤 본 브라운과 함께 고통의 도시 알파빌에서 탈출한다. 그리고 1991년, 만신창이의 그는 홀로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독일로 되돌아온다. <알파빌>에서 <신독일 영년>까지, 26년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알파빌>은 1965년 <미치광이 피에로>보다 몇달 앞서 프랑스 극장에서 개봉한다. 페르디낭(장폴 벨몽도)이 “나는 보았다. 무엇을? 영원”이라고 랭보의 시구를 읊조리며 목숨을 끊기 전 레미 코숑(에디 콘스탄틴)은 은하계의 또 다른 영원을 건너 알파빌에 도착한다.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려움으로 몰아넣는다.” 사립 탐정은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말을 누아르의 주인공처럼 보이스 오버로 읊조린다. 레미 코숑은 원래 영국 작가 피터 체이니가 고안한, 1930년대 인기 연작 추리소설의 주인공이다. 프랑스에서는 베르나르 보데리 감독의 <포이즌 아이비>(1952)에서부터 미국계 배우 에디 콘스탄틴이 레미 코숑 역을 꾸준히 도맡는다. 슈퍼컴퓨터 알파 60을 발명하고, 인공두뇌학으로 인간의 감정을 사라지게 만들어 세상을 지배하려는 독재자 브라운 교수를 체포하기 위해 고다르는 레미 코숑을 지구에서 몇 광년 떨어진 알파빌로 보낸다.

비인간적 도시

고다르는 미래도시를 만들기 위해 폐쇄된 파리의 오르세역을 지옥 같은 관청으로 변신시켰던 오슨 웰스의 <소송>(1962)에서 영감을 받는다. 60년대 파리는 산업화로 급격하게 변모하는 중이었고 고다르는 비즈니스 타워와 빌딩 숲 등 미래 지향적 건축물, 라디오 방송국의 길고 새하얀 복도와 녹음실을 카메라에 담는다. 알파빌은 유리로 만든 엘리베이터가 있는 로비, 하얗고 차가운 호텔 객실, 반대파를 숙청하는 수영장 등 비인격적 공간이 뒤얽혀 있는 미로다. 파리를 에워싼 고속도로는 우주공간으로 변형된다.

이 비인격화된 공간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태양은 외로워>(1962)의 라스트 신을 떠올리게 한다. 연인들은 사라지고, 이들이 관계 맺었던 텅 빈 공간에는 핵전쟁이 발발했다는 기사를 읽는 불안한 행인 몇몇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알파빌>은 새 사회가 건설되고 있는 현장과 한 세계가 사라지는 풍경을 함께 보여준다. 다름 아닌 누벨바그의 주 배경이 되었던 서민적 파리의 소멸이다. <알파빌>은 잘 ‘들어보면’ 미세한 전자음이 사운드트랙을 관통한다. 1965년 주민들을 원격 조종하기 위해 사용했던 이 신호는 오늘날의 휴대폰 벨 소리를 연상시킨다. <알파빌>에서 예견된 광기는 이제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레미 코숑을 연기한 배우 에디 콘스탄틴의 울퉁불퉁한 얼굴은 오랜 세월의 흔적이 담긴 고대 동상의 그것과 닮았다. 레인코트에 모자를 눌러쓴 그는 단순한 스파이가 아닌 시네마의 시적 캐릭터다. 나타샤 본 브라운 역의 아나 카리나는 누아르영화의 팜므파탈이면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알파 60의 명령을 따르는 안드로이드와 같은 존재다. 그의 목에는 강제 수용자의 일련번호를 연상시키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이 숨 막히는 세상에서 감정과 분리된 육체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의 도구이다. 성적 차원으로 환원된 여자들은 알파 60의 프로그램에 따라 남자들의 편의를 위해 매춘을 한다. 그들의 일은 가정부의 노동과 같은 개념이다.

고다르가 제안하는 치유책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옛 인류의 감정을 담고 있는 시(poe′sie)다. 시를 통해 나타샤는 알파 60의 프로그램에서 벗어난다. “사랑, 그게 뭐지?”라는 질문에 레미 코숑과 나타샤는 폴 엘뤼아르의 시 <고통의 도시>(Capitale de la douleur)의 한 구절을 함께 낭송한다. “너의 목소리, 너의 눈, 너의 손, 너의 입술, 우리의 침묵, 우리의 말(…) 우리 둘을 위한 단 하나의 미소.”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지는 유희와 독재의 한가운데에서 다시 사랑이 탄생하는 장면이다.

알파 60은 머지않아 파괴될 거고, 연인은 은하의 밤 속으로 도주할 것이다. 니콜라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1948)나 조셉 H. 루이스의 <건 크레이지>(1950)와 같은 필름누아르의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시(poe′sie)는 대형 스튜디오의 규칙에서 벗어나려 애썼던 B급영화의 정신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예산영화가 지닌 자유야말로 바로 누벨바그에 영감을 준 원천이기 때문이다.

파리 영년

<알파빌>은 공상과학 장르를 빌려 60년대의 재난을 이야기했다. 1967년 고다르는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에서 파리 외곽의 고층 아파트에 거주하며 가끔 매춘을 하는 주부 줄리엣 잔슨(마리나 블라디)의 초상을 그리며 현실로 더 깊숙이 파고든다. 도시화와 비인간화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여기에서 사람의 정신을 혼란시키는 건 컴퓨터가 아니라 거짓 욕망을 부추기는 소비사회다. “집세를 낼 돈이 없어. 집세를 내면 텔레비전을 못 사. 텔레비전을 사버리면 차 살 돈이 없어. 세탁기를 사면 휴가를 못 가. 그러니까 어쨌든, 이건 사는 게 아니야.” 모든 게 콘크리트로 덮여 있고, 사람들은 타워에 갇혀 있다. 한 젊은 여성이 카페에서 “난 남쪽 고속도로 옆의 큰 건물에 살아”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알파빌>에서 묘사된 미래도시를 떠올린다. 매춘은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산물인데, 그건 줄리엣이 소비사회가 권장하는 물건을 소유하기 위해서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알파빌>의 안드로이드-매춘부만큼이나 소비사회에 종속된 존재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무한한 공간은 어디에 있을까? 고다르는 커피잔 속의 거품을 은하계의 폭풍처럼 찍으며 “과학의 전격적인 발전은 사람들의 미래를 성큼 앞당긴다. 미래는 현재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되고, 먼 은하가 바로 문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속삭인다.

미래도 현실처럼 불안하다면 어떻게 꿈을 꿔야 할까? 이 세계화가 지구에서 멈추지 않고 우주와 태양계까지 뻗어나간다면 어떻게 별을 보면서 꿈을 꿀 수 있을까? 고다르는 일론 머스크의 우주여행 민영화, 가상 세계의 지배자를 꿈꾸는 마크 저커버그의 헤게모니를 진작에 예견했다. 오늘날 세계의 최고 권력자들은 60년대 알파빌의 독재자보다 더 탐욕스럽고 냉정하다. 살아남기 위해 이제는 도망이 아닌 투쟁을 준비할 때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은 1968년 5월 항쟁 직전에 개봉했다. 고다르는 항쟁에 가담하면서 상업영화에 등을 돌린다. 이후 10여년 동안 그는 대형 제작사와 영화산업, 그리고 스타 시스템에서 자유로운 영화를 만들며 반순응적 영화 제작 방식을 구축한다. 고다르 역시 알파 60을 파괴할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유럽의 멜랑콜리

<신독일 영년>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오는 늙고 침울한 주인공은 고다르일까 아니면 레미 코숑일까? 에디 콘스탄틴은 30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나 다시 한번 냉전 시대의 마지막 스파이 레미 코숑을 연기한다. 그는 어쩌면 누벨바그의 마지막 투사였던 고다르일지도 모른다. 레미 코숑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줄 모르고 서쪽으로 넘어가려 애쓴다. 이 여행은 육체적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다. 주인공은 더이상 무서운 침묵의 은하가 아닌 ‘노 맨스 랜드’를 횡단한다. 겨울의 독일은 괴테, 토마스 만, 로자 룩셈부르크, 무르나우 또는 프리츠 랑의 유령을 마주치는 림보의 영역이 된다. 이 유령들은 책 속에 살고 있다. 레미 코숑은 블레즈 파스칼의 문장을 변형해 “이 방대한 책들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려움으로 몰아넣는다”라고 말한다. 또한 이들은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1922)나 <마지막 웃음>(1924)으로 시네마테크에 영원히 살고 있다.

코트에 모자를 눌러쓰고 독일을 횡단하는 레미 코숑은 사뮈엘 베케트의 <영화>(1965)에 나오는 버스터 키턴을 연상시킨다. 어딘가 엉뚱하고, 고독하며, 현대사회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인물 말이다. 그가 지나가는 목초지나 호수, 숲의 풍경은 타이어 더미를 쌓아둔 쓰레기장 같은 것만 없다면 과거 독일 낭만주의의 흔적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는 풍차가 아닌 건설 현장의 크레인을 공격하러 떠나는 돈키호테와도 마주친다. 역사와 진보의 거침없는 행보 속에서 이제는 조롱거리가 된 지난한 투쟁을 이어가는 고다르와 레미 코숑은 돈키호테의 후예이기도 하다. 알파빌의 또 다른 이름은 다름 아닌 베를린이다. 도시는 여전히 어둡고, 그림자로 가득하다. 겨우 서쪽으로 넘어간 레미 코숑은 다시 함정에 빠진다. 알파빌의 호텔 방을 연상시키는 장소에 다시 갇혀버리고 만다. 나타샤 본 브라운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알파 60으로 원격 조종되는 로봇을 닮은 가정부가 방문할 뿐이다.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침구를 정리하는 청소부가 단언한다. 나치 강제 수용소 입구에 쓰여 있는 바로 그 침울한 문구, ‘아르바이트 마흐트 프라이’(Arbeit macht frei).

호텔 방마다 성경책이 비치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레미 코숑은 “개자식들!”이라고 외친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다. 레미 코숑은 이렇게 여느 사설 탐정과 다름없이 세상이 송두리째 부패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전쟁은 선의 승리로 종결될 수 있고, 베를린장벽은 무너질 수 있고, 구소련은 붕괴될 수 있지만 역사적 악몽은 끝이 없다. 승자와 개자식이 더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전체주의의 알레고리 알파 60은 여전히 군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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