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주지훈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가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현실성’이었다. 그는 역설적이게도 땅에 붙은 이야기를 통해 허구만이 선사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완성하고자 했다.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며 어쩌다 검사 행세를 하게 된 흥신소 사장 지현수를 연기하면서 주지훈은 그의 감정에 따라 상황을 조밀하게 재구성했다. 슈트를 입지만 메이크업은 하지 않거나 긴 수사 끄트머리에 퀭해진 낯빛을 그려내는 등 지현수를 세세하게 계산해낸 주지훈만의 절댓값이 현실 속에서 빛을 발하는 이유다.
- 4년 만의 스크린 복귀다. <젠틀맨>에 함께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기다리는 영화 중 <젠틀맨>이 가장 먼저 관객을 만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영화가 가진 현실성이 좋았다. 먼저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땅에 붙어 있는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젠틀맨>에도 일반적인 케이퍼영화가 갖는 판타지성이 있다. 흥신소 사장이 거대 권력에 맞선다는 컨셉 자체가 그렇다. 하지만 전체적인 톤 앤드 매너가 너무 허황되지 않게 그려져 있어 개연성에 무리가 없었다. 장르별로 배우가 관객에게 제시해야 하는 설득력의 방향이 모두 다르다. 예를 들어 시트콤은 엉뚱한 일이 벌어져도 사람들이 웃으며 넘기고, 역사물은 사건간의 개연성이 무척 중요하다. 그런데 <젠틀맨>에는 사람들의 희망이 들어 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어떨까?’ 하는 작은 희망. 그래서 영화 속 상상을 받아들이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 어쩌다 사건에 휘말려 검사인 척해야 하는 흥신소 사장의 고군분투를 보여준다. 현수의 임기응변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부분을 강조하고 싶었나.
=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이 흥신소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잘 모른다. 그 정보의 공백이 사람들에게 미스터리함과 판타지스러운 부분을 자극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스파이였다면 영화를 보기 전부터 현수의 숨겨진 능력 같은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일단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현수의 다양한 모습 중 무엇이 거짓이고 진실인지 나뉘어 보이지 않길 바랐다. 관객을 각각 나름의 이유로 이해시키고 설득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빈틈을 보였다. 완벽하고 전문적인 모습보다 관객이 응원하게 만드는 지점을 드러내려고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잘해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고 싶었다. 캐릭터 연구뿐만 아니라 조명이나 미술 등 리얼리티를 보여줄 수 있는 전체적인 요소까지 신경 쓰려 했다.
- 디테일을 살피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
= 각종 회의에 모두 참여한다. 캐릭터 설정 회의, 스토리 회의, 분장 회의, 촬영 회의…. 그 자리에 있으면 내가 생각지 못했던 디테일을 모두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과정이 너무 재미있다. 배우인 나에게 가장 필요한 자리이기도 하다.
- 현수의 정체를 의심하는 화진(최성은)과 대응하는 장면이 많다. 팽팽한 신경전을 위해 완급 조절이 중요했을 텐데 함께 호흡을 맞추는 과정은 어땠나.
= 최성은 배우는 우직한 힘이 너무 좋다. 자기가 밀고 나갈 때 그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사실 시나리오 초반에는 김화진이라는 인물이 그렇게까지 입체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성은 배우는 김화진만이 줄 수 있는 쾌감을 만들어냈다. 스스로 어디서 끊어야 하는지를 잘 알더라. 욕심이 커지면 감정이 과잉될 수 있는데 그런 법이 없었다. 아주 좋은 재료를 갖고 있다. 어떤 감독을 만나느냐에 따라 색다른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줄 거라 믿는다. 예리한 배우다.
- 귀여운 강아지와 버디를 이룬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강아지와 함께 촬영한 과정이 궁금하다.
= 우리 윙 옹은 그야말로 천재다, 천재. 나이가 꽤 있어서 내가 윙 옹이라고 불렀다. (웃음) 정말 신기한 게 복도 신에서 “조금만 천천히 가 줘” 하면 그 말에 따라 천천히 가고, 또 빠르게 가달라 하면 빠르게 지나간다. 그래서 윙 덕분에 촬영이 금세 끝났다. 사실 시나리오에 동물이 등장하는 순간 바짝 긴장된다. 원하는 대로 촬영할 수 있을지, 동물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윙이 있어 촬영도 안정적으로 잘 마쳤고 긍정적인 탄력을 받았다.
- 실제로 강아지가 영화상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현수가 얼마나 인간적이고 잔정이 많은 인물인지 그를 통해 알 수 있다.
= 우연히 만나게 된 강아지를 끝까지 책임지고, 사고가 날 때도 구해준다. 그런 점들이 현실적이다. 사실 현수는 동물 애호가는 아니다. 직접 동물을 키우지도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맞닥뜨리는 일 앞에선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하고 실행한다. 영화에서도 문제가 생겼을 때 현수가 즉시 뛰쳐나가서 돌진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인간적으로 망설이고 고민하는 틈들이 현실성을 높여준다.
- 이제 2023년이다. 새해엔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 코로나19로 미뤄졌던 영화들이 개봉할 예정이다. 또 내 삶에 없을 것만 같던 예능도 방영한다. 여행 예능 컨셉이고 촬영은 모두 마친 상태다. 개인적으로는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지내고 싶다. 누구나 감정적으로 쉽게 폭발하는 버튼이 있는데, 그게 아무리 눌려도 “이게 다 무슨 의미냐~” 하고 넘겨버리는 관대함을 가져보려 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