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젠틀맨’ 박성웅, “하늘 아래 똑같은 악역은 없다”
2022-12-28
글 : 송경원

엘리트 법조인, 압도하는 카리스마, 겉으로 보기엔 깔끔한 신사 같지만 추악한 욕망으로 뭉친 이중인격자, 감히 넘어설 엄두가 나지 않는 빌런. 각각의 조건을 놓고 보면 떠오르는 인물들은 꽤 있지만 이 모든 요건의 교집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유일하다. 검사 출신 대형 로펌 대표 권도훈 역이 박성웅 배우에게 갈 수밖에 없었던 건 당연하다. 마치 맞춤복처럼 캐릭터가 박성웅 배우에게 착 달라붙는 것도 납득이 간다. 캐스팅만으로 이미 설득력을 더했으니 남은 과제는 스테레오타입이라고 해도 좋을 익숙한 캐릭터를 어떻게 다르게 표현할지에 달렸다. 박성웅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하늘 아래 똑같은 나쁜 놈은 없다.

- 처음엔 역할을 거절했다고 들었다.

= 맞다. 악역이라서 망설였다. 역할의 크기나 비중에 관계없이 가능하면 다양한 역할들을 하고 싶다. <오케이 마담>(2019)의 석환 같은 코믹한 역할도 그런 맥락이다. <메소드>(2017)의 재하처럼 나와 전혀 이미지 매칭이 안될 것 같은, 의외성을 주는 역할을 할 때 즐겁다. <젠틀맨>의 권도훈은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여러 측면에서 기존에 맡았던 역들과 기시감이 있었고, 조심스레 고사했다. 그런데 <헌트>(2022) 특별출연 때 주지훈 배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 주지훈 배우가 의지를 가지고 열정적으로 설득한 건가.

= 절반만 맞다. 지훈 배우가 막 나서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냥 “형님이 <젠틀맨> 시원하게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도로 언급만 하고 넘어갔다. 반대로 내가 궁금해져서 나에게 왜 시나리오를 줬는지 물었고, 그때 나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실감했다. 이 정도로 내가 필요한 영화라면 뭔가 해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 작품을 고를 때 함께하는 사람들을 중점적으로 고려하나.

= 당연하지만 첫 번째는 시나리오다. 다음으로 맡은 캐릭터를 통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물론 함께하는 동료, 감독, 스탭들도 중요하다. 어떤 것이 우선순위라고 할 순 없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첫 데뷔를 하는 감독님들과 주로 함께하는 편이다. 절실함이 나를 흔드는 것 같다. 그게 어떤 건지 너무 잘 아니까, 누군가가 나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마음을 거절하기는 힘든 것 같다. (웃음)

- 로펌 대표인 권도훈은 제목인 ‘젠틀맨’의 어두운 버전이다.

= 한마디로 뼛속까지 욕망으로 똘똘 뭉쳐진 악인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이용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중요한 것들이 결여된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다르게 보이고 싶어 하는 허영과 위선이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 간극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게 필요했다. 과장된 표현 대신 최대한 건조하고 조용하게, 큰 액션이나 반응을 하지 않으려 의식했다.

- 깔끔한 걸 좋아한다든지 결벽이 심해 옷깃이나 양말 모양에 집착하는 등의 디테일이 돋보인다.

= 맞다. 어찌 보면 스테레오타입은 악역을 빤하지 않게 표현하는 게 중요했다. 이번에 공을 들인 건 그런 디테일들이다. 정작 권도훈은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거의 없고 감정도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다. 나는 그냥 가만히 무표정하게 서 있기만 해도 주변에서 알아서 무서워들 해주시니까. (웃음) 대신 인물을 둘러싼 환경과 소품, 미술 같은 걸로 인물의 심리와 어두운 그림자를 짐작할 수 있게끔 유도했다.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도 그런 표현의 일환이다. 권도훈이 음모를 꾸미는 별장에 독특한 공간이 있다. 동물을 박제하여 마치 미술관처럼 꾸며놓은 곳을 집 안 한가운데 배치했다. 얼핏 멋져 보이지만 이상하고 기괴한 배치랄까. 그런 요소들을 눈여겨보면 캐릭터 이면에 감춰진 섬뜩함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것이다.

- 신인감독들과 자주 작업했는데, 김경원 감독과의 호흡이 궁금하다.

= 김경원 감독은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2016) 이후 차기작이니 입봉은 아니지만 범죄 오락물처럼 장르영화는 첫 도전이다. 낯선 환경에 흔들릴 수 있음에도 확실한 비전과 고집이 있는 감독이다. 본인이 원하는 명확한 그림이 있기 때문에 믿고 연기할 수 있는 부분이 좋았다. 동시에 현장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받아들이는 유연성도 겸비했다. 일방적으로 한 가지 버전만 찍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덕분에 내 의견이 반영된 몇몇 장면도 있는데, 이런 변화들이 영화를 생생하게 살려준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시나리오를 보지 않고도 다음 작품에 기꺼이 함께하고 싶은 연출자다.

- 흥신소 사장 지현수 역의 주지훈 배우, 독종검사 김화진 역의 최성은 배우와 실제로 맞부딪치는 장면이 많지는 않다.

= 딱 한 장면씩 맞붙는다. 주로 내 공간, 사무실 등에서 혼자 연기해서 편했다. (웃음) 주지훈 배우야 워낙에 선수니까 더 말할 것도 없다. 착 달라붙는 연기를 보고 있으면 배우에 맞춰 시나리오를 쓴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최성은 배우는 이번에 처음 봤는데, 한마디로 괴물이다. 몰입도와 에너지, 집중력이 엄청나다.

- <신세계>(2012)의 이중구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렇지 생각해보면 정작 악역을 그렇게 많이 하지는 않았다.

= 맞다. 악역을 많이 한 게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악역처럼 ‘보이는’ 역할이 많았다. (웃음) 한편으론 빤하게 보이는 인식을 깨고 새로운 면을 보여주는 것도 즐겁다. 예를 들면 알 파치노는 어떤 영화에 나와도 알 파치노다. 하지만 로버트 드니로는 같은 악역을 맡아도 작품마다 미묘한 차이를 잡아낼 줄 안다. 굳이 고르자면 나는 로버트 드니로쪽이 더 끌린다. 똑같은 악역이란 건 없다. 비슷해 보이는 역할을 쪼개고 쪼개어 세밀하게 들어가서 기어이 한끗이 다른 걸 찾아낸 뒤, 여러 가지 디테일을 통해 그 미세한 것들을 증폭시키는 작업이야말로 핵심이다. <신세계>를 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이중구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 있다. 그만큼 인상적인 캐릭터였다는 말이겠지만 이번 영화를 통해 그 이름표에 ‘권도훈’이라는 인물이 업데이트될 수 있을 거라 자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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