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들의 검사, 감찰부의 미친 X. 화진은 화려한 수식어를 거느리고 등장한다. 동료 검사랍시고 자신의 관할 사건에 틈입해 마구잡이로 수사를 진행하는 현수(주지훈)가 거슬리던 화진은 해당 사건이 자신을 좌천시킨 도훈(박성웅)과 연관됐음을 파악한 후 미심쩍은 존재인 현수와 공조하기로 결심한다. 화진은 캐릭터를 이루는 설정도 많고, 영화 속에서 얽히는 인물도 많다. <젠틀맨> 속 최성은은 화진에게 쏟아지는 설정들을 여유롭게 저글링하며 다양한 작품에서 ‘괴물 신인’이라 불렸던 본인의 저력을 너끈히 증명해낸다.
- 캐릭터를 만들 때 다큐멘터리나 음악을 많이 참고한다고 들었다. <젠틀맨>을 준비할 땐 어땠나.
= 음악의 경우 대본에 어떤 음악이 쓰일 것인지 감독님이 세세하게 써놓으셨다. 그래서 그 음악을 들으며 화진의 태도를 만들었다. 검사라는 직업이 내가 발 디딘 세계와 많이 떨어져 있다 보니 검사들의 직업 세계에 잘 접근하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많이 찾아봤다. 검사들만 출연한 <인간극장>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 화진의 대사 중 인상적인 것들이 많다.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나.
= 현수와 화진이 포장마차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그때 화진이 “약자에 대한 연민이 진짜 폼나는 건데”라고 말한다. 그 대사가 화진이 어떤 인물인지 잘 표현해준다고 생각한다.
- 화진은 결국 현수와 공조한다. 정의를 추구하던 화진이 불법 수사를 용인하는 셈인데, 현수와 손잡기로 결심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도훈은 화진에게 악이자 청산하지 못해 켕기는 과거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지만 화진은 사회적인 힘과 영향력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화진은 그 영향력을 근거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에 자신의 힘을 사용하고 싶어 한다. 화진에게 도훈은 명확한 악이기 때문에 그를 끝까지 처단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 그 욕망이 외부에 의해 좌절되기도 했지만 화진의 마음속에선 그 욕망이 계속 살아 있다. 화진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이 너무 강하다보니 합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기 위해 대의를 저버릴 수도 있는 인물이다.
- 현수나 도훈과 달리 화진은 등장 전부터 인물을 이루는 수식이 화려하고 상세하다. 모든 설정에 부합하는 모습을 연기로 보여줘야 했을 것이고 그 와중에 화진 개인의 성정도 내비쳐야 하니 쉬운 작업은 아니었을 듯하다.
= 그 수식어들을 모두 체화하려 했다. 화진은 도훈과 대립이 가능한 인물처럼 보여야 하고, 현수와도 에너지가 오가는 게 보여야 한다. 그런데 내가 두 선배들보다 경력도 나이도 많이 어리지 않나. 이 격차를 어떻게 모니터 안에서 채워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믿으려 했다. 현장을 믿고, 나 자신을 믿고. 현장에서 더 큰 시야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화진이 서 있을 때나 몸을 움직일 때 내 몸의 에너지를 하체로 가져가면 자연인 27살 최성은보다 무게감이 생길 것 같았다. 내 에너지의 중심점을 좀더 아래에 두니 중량감과 에너지가 더 생기더라.
- 이전 인터뷰를 읽어보거나 올해 방영된 <청춘 MT> 등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인간 최성은은 내향적이고 낯도 많이 가리는 사람이다. 배우 개인의 성정과 달리 외향적이고 직선적인 화진을 연기할 때 쾌감이 있었는가.
= 나와 다른 인물을 연기해서 혼자 쾌감을 느끼는 순간은 적다. 촬영 때의 쾌감은 사실 개인의 성취보다는 협업 과정에서 많이 느낀다. 내가 보여주려는 연기나 신체 움직임이 카메라 롤과 기막히게 맞아떨어진다든지, 상대 배우와의 합이 좋았다든지 할 때 말이다. 실은 캐릭터와 내가 너무 달라 부대끼는 경우가 더 많다.
- 2022년 한해 동안 많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드라마 <안나라수마나라>, 티빙 오리지널 예능 <청춘 MT>, 제48회 서울독립영화제에 출품된 단편 <소녀> 그리고 <젠틀맨>까지. 올해가 가기 전 2022년을 돌아보면 어떤 마음이 드나.
= 2022년은 정말 잊지 못할 해가 될 것 같다. 지난달 남궁선 감독님과 독립영화 한편을 작업한 것 외엔 올해는 연기를 거의 하지 않고 개봉할 작품들을 기다렸다. 쉬면서 이전 출연작들을 다시 보며 내 연기의 장점과 개선할 점을 반추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올해 쉬는 동안 단편영화 한편을 연출했다. 처음으로 카메라 뒤에서 전체 그림을 보니 연기에 정답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시점에 연출에 대한 도전을 무조건 해봐야 한다는 필사적인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내게 엄청난 경험을 가져다줬다. 확실히 경험이 많은 것을 알게 하고 나를 자유롭게 한다.
- 유독 필모그래피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파출부>와 <시동>에선 홀 서빙을 하고, <나는 파리에 가고 싶어요> <십개월의 미래>에선 개발자로 나오고, <괴물>에선 정육점을 운영하며 <젠틀맨>에선 검사로 나온다. 필모그래피를 복습하다 보니 문득 최성은에게 직업으로서의 연기는 어떤지 궁금하다.
= 연기자란 직업을 정말 잘 선택한 것 같다. 연기자가 되지 않았다면 나와 타인, 나아가 인간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을 것 같다. 사람을 향한 고민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지만 엄청난 충족감을 주기도 한다. ‘이 캐릭터는 왜 이렇지?’ ‘나는 왜 이만큼밖에 표현을 못할까’ 번민하며 인물과 나 자신에 관해 고민을 하다 보면 결국 인간 존재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이 모든 사고가 내가 연기를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지 않나. 그런 부분에 있어 굉장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