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역사상 가장 멋진 실패를 보여준 엔딩. 하지만 일본 스포츠 만화 역사상 전무후무한 판매고를 올리고 세계 시장까지 제패한 <슬램덩크>의 진짜 엔딩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소년 만화 잡지인 <주간소년점프>에 1990년 10월(42호)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슬램덩크>는 1980년대부터 이미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드래곤볼>의 전성기 시절에 등장했다. 1996년 6월(27호) 총 276화를 끝으로 <슬램덩크>의 연재가 종료됐던 이 시기가 바로 <주간소년점프>를 비롯한 일본 소년 만화 주간지의 황금기였다. 한 회차 전체가 올 컬러로 실렸던 1995년 3-4호 <주간소년점프>는 653만부가 팔려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게다가 <슬램덩크>는 1990년대에 가장 많이 팔린 단행본 기록(21-23권의 초판 발행 부수 250만권)을 갖고 있으며, 2004년에 누적 판매 1억부를 돌파해 현재까지도 일본 역대 만화 판매 순위 10위권 안에 속해 있다. 한국에서도 단행본이 오리지널판, 완전판, 신장재편판 등 다양한 판본으로 출간되어 15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사회적 영향력도 대단했다. 당대 미국 프로농구(NBA)의 인기와 함께 이 만화로 인해 일본 청소년들에게 농구 붐이 일기도 했고,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는 2006년에 작품 인세 중 일부를 출연해 청소년 농구선수를 지원하는 슬램덩크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다”라며 슈팅 가드 정대만을 다독이던 북산고의 감독 안 선생님의 명대사는 실제 농구선수들 사이에서 격언처럼 인용됐고, 주인공 강백호의 산왕전 명대사, “왼손은 거들 뿐”은 수많은 패러디를 남겼다. 애니메이션판 오프닝에 등장하는 에노시마의 가마쿠라고교앞역의 건널목은 대표적인 지역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고, 이노우에 작가는 2004년 12월, 일본 내 발행 부수 1억권 돌파를 기념하며 한 폐교 교실 전체에 후일담인 <슬램덩크 그로부터 10일 후>라는 에피소드를 그려 식지 않은 작품의 인기에 화답하기도 했다.
<슬램덩크>의 한국 내 영향력을 이야기할 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번역이다.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 정대만, 송태섭 등의 실제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벚나무가 늘어선 꽃길을 뜻하는 ‘사쿠라기 하나미치’라는 이름은 일본에서도 그 이전에는 어떤 창작자도 짓지 않은 새로운 이름으로 화제가 됐는데 한국에서 출판사 편집부에 의해 강백호라고 번역되었다. 상승(언제나 이긴다는 뜻의 구호로 만화에 등장한다)의 기운을 타고난 <슬램덩크>의 운명 같은 에피소드다. 사실 등장인물의 이름을 비롯, 학교명과 지명 등을 번역해 인기를 얻은 이유는 밀레니엄 시절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의 산물이다. 출간 당시 일본 만화는 번역을 전제로 제한 수입되었고, <슬램덩크> 역시 극중 등장하는 일장기는 전부 삭제됐다. 하지만 작가의 요청으로 마지막 산왕전에서 매니저 한나가 송태섭의 손바닥에 매직으로 ‘넘버원 가드’라고 써내려가는 명장면 컷만은 한글로 바꾸지 않고 원문 그대로 실었다.
애니메이션도 1990년대에 이미 TV판과 극장판이 만들어진 바 있다. 총 101화에 걸쳐 전국대회 출전 직전까지의 내용을 다뤘고, 후반부에는 원작 만화에 없는 상양, 능남 혼성팀과의 연습 경기가 새롭게 추가 제작됐다. 2만번의 슛연습을 거친 강백호가 점프슛을 처음 성공시키는 등 경기 내용은 풍전고와의 전국대회 첫 경기와 흡사하다. 이번에 새로 개봉하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지금껏 한번도 애니메이션화되지 않았던 전국대회 하이라이트인 산왕전을 다룬다. 열정과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강백호와 동료들의 무모한 전국 제패 도전기는 실패한 엔딩이 아니다.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다시 일어서려는 도약의 첫 페이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