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종료 후 26년 만에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돌아왔다. 당시에도 극장판을 만들자는 요구는 적지 않았을 텐데 지금 다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 내 안에서는 ‘돌아온다’는 감각은 별로 없고, ‘처음’이라는 느낌이다. 지금 영화를 만드는 이유의 밑바닥에는 오랜 세월 <슬램덩크>라는 작품을 봐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기쁨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자리한다. 나에게는 최선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슬램덩크>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끝났고 거기에 슬퍼하거나 놀란 분들도 계신 걸 잘 알고 있다. 늘 그런 분들께 보답하려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 오리지널 에피소드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원작의 에피소드 중 하나를 골랐다. 가령 강백호가 건강을 회복했는지, 서태웅이 대학에 발탁되어 어떤 활약을 했는지 같은 후일담을 궁금해하는 팬들이 많은데, 산왕전을 극장판의 소재로 고른 이유는 무엇인가.
= 일단 기획안에서 그 경기를 원했다. 표현의 측면에서 가장 큰 도전을 할 수 있는 경기였기 때문에 나 역시 좋았다. 각각의 팬들이 보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 그런 식의 기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렇게 기대해주었기 때문에 이 영화의 기획이 실현되었다. <슬램덩크>를 처음 접하는 분도 이해할 수 있는 영화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지 취사 선택해야 했다. TV애니메이션의 연속이라 생각지 않았고, 원작을 충실하게 따르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원작의 에피소드를 다른 시점으로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만화책의 엔딩은 어떤 팬들에겐 예상치 못한 마무리였을 테지만 작가에게는 필요한 결말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절정의 순간에서 이야기를 끝낸 이유가 있었나.
= ‘독자들을 놀라게 했구나’ 하는 날카로운 가시가 계속 마음속에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끝낸 것 자체는 지금도 만족한다. 내가 생각한 대로 이야기의 핵심 부분에서 필연적인 형태로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극장판은 2014년부터 시작된 프로젝트다. 작품 연재를 끝냈을 때와 다시 극장판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때 작가의 시점이나 가치관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
= 영화 속의 시점에도 나타났지만 ‘강함’의 의미와 ‘잘되지 않는 것’에 대한 공감과 상상력이 중요하다. 아픔과 상실, 잘되지 않는 것, 살아가면서 누구나 통과하는 길을 표현하고자 했다. 돌아보면 나도 나름대로 지나왔던 길이라 더 공감되도록 그릴 수 있었다.
- 송태섭의 어린 시절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이번 작품의 화자로 선택한 셈인데.
= 팀의 사령탑인 포인트 가드의 시선으로 이 경기와 이 한편의 영화를 그리고 싶었다. 덧붙여 연재 당시부터 송태섭에 관해서는 어딘가 스토리가 부족했다고 생각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원작에선 강백호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해서 같은 1학년인 서태웅, 팀의 중심인 3학년 채치수, 복귀할 때까지 드라마가 있었던 정대만 등이 스토리를 이끌었는데 2학년인 송태섭은 플레이나 내적 묘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더 표현하고 싶었다.
- 형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함께한다는 송태섭 가족의 에피소드는 공감과 감동을 준다.
= 코트 위 강자들의 태연한 얼굴 뒤에도 각각의 삶이 있고 그곳까지 가는 길이 있다. 그건 객석에 앉아 있는 분들도 똑같아서 각자 자신이 주인공인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조금은 힘이 나지 않을까 한다.
- CG, 3D가 사용되긴 했지만 마치 로토스코핑 기법처럼 기본적으로는 펜선의 질감이 두드러진다.
= 단순한 실사도, CG 같은 그림도 아닌 만화의 그림이 움직인다는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 손으로 그린 느낌과 펜 선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리터치를 많이 하는 편이다. 인물들에게 피를 돌게 한다고 해야 할까. 만화는 그림이나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지만 결국은 캐릭터다. 캐릭터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게 나에겐 일종의 생명선 같은 거다.
- 애니메이션에 맞춰 다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원작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살아 움직인다. 3D CG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받은 부분이 보완된 셈인데 움직임의 박진감, 육체의 생동감을 살려낸 비결이 있을까.
= 만화를 그릴 때도 플레이의 연속된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재현하기 위해 모션 캡처를 사용했다. 하지만 그대로 하면 아무래도 박진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으로서 움직임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과장이나 생략을 넣어서 완급을 조절하거나 만화 속 정지화면의 멋진 이미지도 움직임 속에서 느낄 수 있도록 자세와 위치를 리터치해서 조정했다. 움직임의 리얼리티를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물리적 무게를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내가 전하는 이미지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스탭이 인내심을 가지고 시행착오를 거듭한 결과다. 오랜 여정 끝에 실현할 수 있게 돼 스탭들에게 감사하다.
- 색감은 선명하기보다는 다소 흐릿한, 파스텔화 같은 느낌이다.
=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으며 구름 낀 회색 하늘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눈을 빼앗길 것 같은 반짝반짝 빛나는 색도 좋지만 이 영화에서는 일상과 맞닿아 있는, 색 바랜 곳도 있는 듯한 분위기로 가고자 했다. 거기에 살아 있는 인물을 느꼈으면 해서 채도를 억제했다.
- 반면 만화 속 마음의 소리라든지 개그적인 표현은 많이 축소됐다. 실제 경기의 흐름과 같은 리얼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나.
= 나 역시 웃음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더 넣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경기의 리듬을 깨면서까지 넣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꼭 살리고 싶었던 건 리얼함이었다. 진짜와 똑같다는 뜻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그것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진짜 리얼함이다.
- <배가본드> <버저비터> 등 늘 새로운 장르, 새로운 것에 도전해왔다.
= 이번에 애니메이션에 도전해 굉장히 많은 걸 배웠다. 내게 있어 영원한 테마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진 완성된 만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뭔가를 계속 전해왔다. 이번엔 팀 스탭들에게 내가 생각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1부터 10까지 보여주고 전해야 했다. 전달 방식이 서툴면 몇번이나 다시 의견이 오가야 했는데, 원래 작품에 대해 꼬치꼬치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겐 큰 도전이었다. 만화와 영화의 표현 방법, 문법의 차이도 많이 배웠다. 영화는 작은 것이 쌓이면 마지막에 만화보다 더 큰 차이가 생긴다는 걸 알았다. 만화는 한컷 한컷이 완성된 세계다. 애니메이션은 아무도 보지 않을 것 같은 자세한 부분들이 축적되어 최종적으로 작품 전체의 느낌을 좌우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 강백호의 대사를 빌리자면, “작가님의 영광의 시간은 언제인가?”.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선택지가 없다. 항상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