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유령’ 이하늬, 박소담, “단단한 자존감과 당당한 애티튜드”
2023-01-18
글 : 임수연

1933년 경성, 조선총독부는 항일 조직 ‘흑색단’의 스파이 ‘유령’을 색출하기 위해 5명의 용의자를 외딴 호텔로 유인한다. 이들 가운데 서로 가장 성정이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통신과 암호 전문 기록 담당 박차경(이하늬)과 정무총감 직속 비서 유리코(박소담)다. 처음엔 서로에게 적대적이었던 이들의 관계는 <유령>의 장르가 추리극에서 스파이 액션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화한다.

- <유령>의 시나리오를 처음 받고 어떤 점을 기대하며 출연을 결심했나.

박소담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을 하면서 이해영 감독님에게 배운 게 너무 많았다. 오랜 기간 한 캐릭터로 살아본 것도 처음이었고, 마음껏 도전해볼 수 있는 시기였다. 나에게 정말 다양한 무표정이 있다는 것을, 이런 얼굴과 목소리도 있다는 것을 감독님을 통해 알게 됐다. 감독님과 꼭 다시 작업하고 싶다는 마음은 늘 갖고 있었다. <독전> 개봉 이후 감독님이 연극 공연을 보러 왔을 때 농담으로 “왜 나는 안 불렀냐”고 했더니, 언젠가 꼭 연락할 테니 그때 응해줄 수 있겠냐고 하셨다. 시간이 흘러 감독님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그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감사했던 기억이 난다. 유리코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해나갈지 점점 더 기대되는 캐릭터라 배우로서도 욕심이 났다.

이하늬 배우가 작품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작품이 배우를 선택하기도 한다. 캐릭터와 내 나이대가 일치하는, 시공과 종횡이 잘 맞아야 만날 수 있는 작품이 있는데 <유령>이 그랬다. 특히 감독님이 박차경 캐릭터는 나를 놓고 썼다는 말도 해주셨는데 그게 배우에게는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 작품을 위해 내가 지금까지 연기를 해왔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꼭 이 영화의 구성원이 되고 싶었다.

- 영화 중반까지 주인공들은 유령으로 지목받지 않기 위해 각자 비밀을 숨기면서 서로를 경계한다. 박차경은 약간 지친 듯 보이지만 단단한 결기가 느껴지고, 화려하게 치장한 유리코는 다른 이들에게 공격적이지만 기본적으로 당당한 애티튜드가 있다.

박소담 극 초반 유리코는 천 계장(서현우)이 “유리코, 어쩌려고 그래”라고 했던 것처럼 겁 없이 여기저기 마구 휘젓고 다니지만 잘 잡히지 않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런데 유리코가 치장한 옷과 장신구는 자신을 감추기 위한 그만의 갑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을 테스트하며 유리코를 보다 잘 담아내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내적으로는 원래 갖고 있는 기질과 에너지 자체가 단단한 인물이라 그 중심을 잘 잡고 가려고 했다.

이하늬 표면적인 직업은 암호 전문 기록 담당이라 기본적으로 타이핑 연습 등이 필요했고, 나른하고 무미건조한 쿨톤의 이미지로 보였으면 했다. 그래서 오히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모노톤으로 연기를 잡았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가보면 단단한 아이덴티티가 있다. 죽어야 할 때 죽어야 하기 때문에 죽지 못하는, 살아 있지만 죽은 것처럼 산다는 게 내겐 다소 낯선 패러다임이었다. 현실의 이하늬는 찬란한 삶을 노래하며 사는데 그와 반대되는 삶을 생각하고 담아내려다 보니 감정의 레이어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신념을 지키는 것은 정신병에 가까운 애착 수준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극이 진행되면서 박차경과 유리코의 관계도 계속 변한다. 그들이 서로에게 갖는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연기했나.

이하늬 차경은 유리코에게 “하던 대로 해. 너 아무 데서나 잘 벗기로 유명하잖아”라고 비아냥댄다. 그 대사 안에 차경이 유리코에게 갖는 감정이 다 들어가 있다. 조선 최고의 재력가 집안에서 자란 차경은 자신의 배경이 수치스럽다고 생각한다. 친일을 해야 부를 쌓을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런 시각이 거의 몸을 팔 듯 친일에 가담한 유리코에게도 적용된다. 유리코를 치 떨리게 싫어한 이유다. 그러다 유리코의 과거 사연을 알게 되면서 그에 대한 감정도 달라진다.

박소담 조선인이 정무총감 직속 비서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러니 정말 이상한 여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다 차경을 만나면서 그가 살아온 인생이 어땠는지, 내면에 얼마나 큰 아픔이 있는지 처음으로 드러낸다. 유리코가 보여주는 결의도 차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박차경은 재력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신념’ 때문에 목숨 바쳐서 항일독립운동을 한다. 극중 여성들의 관계를 단순한 동료 의식이라고 설명하지 않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하늬 그때 말한 사랑은, 마치 내가 소담이를 사랑하는 것처럼(웃음) 포괄적인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도적으로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고 연기했고, 이를 어떤 색으로 받아들이는가는 관객의 몫이다. 항일영화는 대체로 슬프고 비극적으로 끝나는데, <유령>은 일종의 판타지적 요소가 있다. 그리고 이는 여성들이 히어로처럼 멋지게 나타나는 장면으로 전달된다. 근래 보기 어려운 통쾌함이 담겨 있어서 더 좋았다.

박소담 그런 그림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선배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이하늬 선배님이 평소 말하는 목소리를 듣다 보면 ASMR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웃음) 현장에서 너무 감사한 일이 많았다. <유령>을 하면서 선배님을 알게 되고, 함께 호흡을 맞추고, 앞으로 살아가는 데 에너지를 많이 주셨다.

- 두 배우 모두 액션 연기 경험이 풍부하지만 <유령>에선 총기 액션 등 전작과는 또 다른 도전을 했다.

박소담 장총이 정말 무겁다. 그 무게를 견뎌내는 게 과제였다. 장전도 어렵지만 총을 들고 걷고 뛰는 자세가 능숙해 보이는 게 중요해서 연습을 굉장히 많이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희열을 느꼈기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재미있다, 더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유미진 무술감독이 같은 여성이라 받은 도움도 많다. 옆에서 액션의 디테일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잡아주셨다.

이하늬 합이 정확하게 떨어지는 액션은 예상 가능하고 스스로 힘도 조절할 수 있지만 <유령>을 찍을 땐 내가 가한 힘이 어느 정도로 되돌아올지 모르니까 체력적으로 몇 곱절은 더 힘들었다. 총격 신도 원 없이 트레이닝을 받았다. 하루 종일 무거운 장총을 들고 다니다가 피멍도 들었고, 쇠가 가진 물질성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차경과 쥰지(설경구)가 싸우는 신에서 “남자와 여자가 싸우다니 어떡해?”가 아니라 두 덩어리의 존재가 진짜 사투를 벌이는 것처럼 보였으면 했다. 사실 일방적으로 차경이 맞는 상황에서도 차경은 가능한 모든 에너지를 채워서 계속 다시 일어난다. 그렇게 두 사람의 파워가 비등하게 보이게 하고 싶었다.

- 두 사람에게서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했다. 영화와 드라마 업계에서 자리 잡은 이후에도 무대에 꼭 섰다는 점이다. 박소담 배우는 지지난해 연극 <앙리할아버지와 나>를 했고, 이하늬 배우는 뮤지컬 무대는 물론 가야금 산조 독주회를 가져 화제가 됐다. 무대 경험의 감각을 이어가는 것은 배우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나.

이하늬 4살 때부터 가야금을 연주했기 때문에 무대가 훨씬 편하긴 하다. 그런데 무대에서 연기했을 때 느꼈던 낯섦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30년 넘게 가야금을 했다고, 말을 할 수 있으니 대사도 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는 생각을 오히려 많이 했다. 때문에 무대가 배우로서도 편해질 수 있도록 뮤지컬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처음에 뮤지컬 무대에 서겠다고 했을 때 다른 선배 배우가 “겁도 없이 대단하다”는 말을 했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는다. 영화와 드라마쪽 일을 하면서 무대 연기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것은 신념을 갖고 용기를 가져야 할 수 있는 것 같다. 사실 영화가 관객과 만나는 시점과 실제 촬영 시점은 1년 정도 갭이 있다. 무대는 실시간으로 상대배우와 관객의 눈을 바라보며 함께 호흡하기 때문에 내가 쓰는 에너지 이상을 받을 수 있는 현장성이 있다.

박소담 대학 생활 시작이 연극이었고 무대에 서는 즐거움을 20~21살 때부터 느꼈다. 그래서 “연극을 어떻게 하게 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원래 시작이 연극이었다”고 말씀드린다. 2016년에 영화 두편, 드라마 두편, 연극 두편을 했다. 주변에서 어떻게 그 스케줄을 모두 소화했느냐고들 하는데, 오히려 나는 이렇게 일을 해야 더 에너지를 받고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 무대에 섰을 때 받는 날것의 느낌이 너무 좋다. 2시간가량의 떨림과 설렘이 살아갈 힘을 준다. 매년 혹은 못해도 2~3년에 한번씩 무대에 서겠다는 나만의 목표가 있다. 스스로 준비가 되면 바로 다시 무대에 서고 싶다. 신구 선생님, 이순재 선생님처럼 평생 연극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사진제공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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