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명예를 중요시 여기는 경호대장 카이토(박해수)에게 항일 조직 ‘흑색단’의 스파이 ‘유령’을 색출해내지 못한다는 건 상당히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혈안이 된 카이토의 용의자 리스트엔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 무라야마 쥰지(설경구)와 암호 해독 담당 천은호 계장(서현우)이 올랐다. 마침 명예 회복이 필요했던 쥰지는 용의자로 몰린 것엔 아랑곳하지 않고 카이토보다 먼저 유령을 잡아내려 한다. 천 계장은 혼자 남겨진 반려 고양이를 걱정하며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길 원한다. 카이토가 놓은 덫 속에서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하는 용의자들. 맡은 캐릭터의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 2주 만에 일본어 대사를 전부 외운 박해수, 의상과 액션까지 철저히 준비한 설경구, 10kg가량 체중을 증량한 서현우와 <유령>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 다들 시나리오를 재밌게 읽었다고. 시나리오의 어떤 점이 흥미로웠나.
설경구 책이 잘 읽혔다. 이해영 감독님이 항일영화지만 좀 달리 가고 싶다고, 항일에 관한 의미가 퇴색되지 않으면서 액션 스파이물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독전>도 그랬지만 이해영 감독님의 컬러가 워낙 강렬하지 않나. 그래서 감독님이 말씀하신 <유령>에 대한 접근법도 재밌을 것 같았다.
박해수 시나리오를 볼 때부터 카이토 역이 엄청 욕심났다. 그런데 내가 가장 마지막에 캐스팅됐고,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카이토의 일본어 대사를 전부 숙지하는 게 가능할까 우려되었다. 그럼에도 하고 싶었다. 외면적인 모습보다 그 안에 담긴 시기심, 스스로에 대한 분노 같은 것들을 보며 카이토란 사람이 궁금해졌다. 마지막까지 고민했는데 감독님이 자신을 믿고 한번 가보자고 하셔서 결심하고 달려들었다.
서현우 다른 작품 때문에 체중을 엄청 감량했을 때 감독님의 전화를 받았다. “혹시 체중을 증량할 생각은 없냐”고 하셨는데, 마침 <헤어질 결심> 때문에 다시 증량 중인 상황이었다. 시기적으로 잘 맞아서 이건 내 역할이라고 직감했다. <유령>은 비장함이 있는 장르영화라 그걸 훼손하지 않으면서 천 계장을 어떻게 소화하면 좋을지 걱정과 설렘이 공존했다. 감독님은 천 계장이 극에 숨통을 틔우는 인물이면서도, 결이 다른 비장함이 있다고 설명하셨다.
- 천 계장의 비장함은 다른 이들과 어떻게 다르다고 봤나.
서현우 항일 조직원들이 시대적 사명감이 강한 반면 천 계장은 시대에 순응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이기적이면서도 평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같이 사는 고양이를 정말 사랑하는, 자신만의 세계관이 뚜렷한 인물이다. 천 계장의 생각을 내가 타당하다고 여기지 못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될 것 같아서 나름의 비장함을 갖고 진지하게 임했다.
- 기자 간담회에서 설경구 배우는 “쥰지에게 측은한 마음이 든다”고 말한 바 있다. 어떤 점 때문에 그랬나.
설경구 쥰지는 일본인, 조선인의 혼혈이다. 쥰지 같은 혼혈인들이 조선이 해방된 후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차별을 많이 받았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명문가의 7대손임에도 어머니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콤플렉스로 여기고 그런 태생적 배경을 지우고 싶어 성공과 권력에 더 집착하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맡은 캐릭터여서 그런지 그런 쥰지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더라. 한편으론 자신도 용의자면서 어떻게든 유령을 색출해내고 싶어 하는 점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 카이토는 그런 쥰지와 대결 구도에 놓여 있다.
박해수 카이토는 옷과 구두에 가문의 사슴 문장을 새긴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의 혈통을 매우 중시한다. 이를 지키기 위해 치밀하게 움직이는데 쥰지에 대한 자격지심도 지녔다. 아무리 노력해도 순수 혈통이 아닌 쥰지를 넘을 수 없다는 걸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악역이면서도 그런 질투와 같은 감정을 드러내는 게 매력적이었다.
- 의상도 강렬하다. 특히 쥰지는 초록색 가죽 코트를 입고 나올 때부터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준다.
설경구 일제강점기의 사진들을 보면 멋쟁이들이 상당히 많다. 모자 하나, 안경 하나도 남다르다. 그 흑백사진 속 사람들의 멋을 구현해보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해봤는데 감독님은 한층 더 과감하게 시도하셨다. 쥰지는 초록색 가죽 코트를 입고 그 안엔 진한 자주색 조끼를 착용한다. 색감이 강렬해 부담스러웠고 가죽 코트를 입고 액션 연기를 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다른 캐릭터들과 대비가 확실해 보는 맛이 있었다. 카이토도 군복 말고 흰색 정장을 갖춰 입은 적이 한번 있는데 아주 멋스럽다.
박해수 장갑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처음엔 색깔별로 장갑을 준비하셨는데, 최종적으로 선택된 건 오렌지색 장갑이었다. 군복에 이 장갑이 어울릴까 싶었는데 현장에서 보니 느낌이 좋았다. 장갑도 내 손에 딱 들어맞길 원하셨고, 감독님이 원하는 룩이 분명하게 있었던 것 같다. 상대를 때리기 전에 장갑을 엉덩이에 쓱 닦는 신이 있는데 엉덩이에 장갑을 어떤 각도로 어떻게 문지를지 여러 번 상의를 거쳤던 기억이 난다. (웃음)
서현우 천 계장의 트레이드마크인 수염과 안경은 후보가 정말 많았다. 말려올라간 수염, 일자로 떨어지는 짧은 수염…. 그중 최대한 자연스러운 걸 택했다. 암호 해독이 일이다보니 천 계장에겐 각도기, 자, 수첩 등 주어진 소품도 여러 가지였다. 개인적으론 쥐 모양의 고양이 장난감이 가장 마음에 들긴 했는데. (웃음) 총도 아주 작은 권총을 들고 다녀서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소품들을 쫙 진열해놓는 신이 있는데, 아주 섬세하고 맹신하는 게 많은 성격답게 나름의 의식을 치르는 거다. 그걸 진지하게 행하기 때문에 생기는 재미가 있었다. 하나짱은 미슈카라는 이름을 가진 이경미 감독님의 반려 고양이다. 소품용 사진을 함께 찍기 위해 처음 미슈카를 만났을 때부터 나의 천 계장 캐릭터가 시작됐던 것 같다. (웃음)
- 일본어 대사가 많아서 그에 대한 부침도 있었겠다.
서현우 선배들에 비하면 맛만 본 셈이다. 다만 천 계장은 한국 사람임에도 총독부에 근무할 만큼 일본어가 유창해야 했기에 열심히 연습했다.
설경구 처음엔 쥰지에게 주어진 일본어 대사가 훨씬 많았다. 그런데 자막으로 소화하면 답답함이 있을 것 같고, 연기할 때의 말맛도 더 살리고 싶어서 좀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카이토가 고생이 많았지. 한국어 대사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서현우 잠꼬대도 일본어로 하셨다고 들었다.
박해수 그러니까. (웃음) 시간은 부족한데 카이토가 너무 하고 싶어서 초인적인 힘이 나왔던 것 같다. 카이토가 언변이 좋아서 말로 공포심을 유발하고 긴장감을 만드는 캐릭터라 그냥 외워서는 안됐다. 정말 대사를 내 것으로 씹어 삼켜야 했다. 그래서 처음엔 한국어 대사를 먼저 외웠고, 일본어 선생님이 내가 연기한 대사의 뉘앙스를 살려서 일본어를 가르쳐주셨다. 선생님과 숙소에 틀어박혀 수없이 많은 밤을 샜다.
설경구 카이토가 초반 판을 짠 인물이라서 그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전부 흔들리는데, 박해수 배우가 아주 잘해줬다. 호텔에 처음으로 5명이 전부 모였을 때 이들이 모인 이유를 카이토가 설명해주는 신이 있다. 긴 대사를 실수 없이 한번에 이어가는 걸 보고 박수를 쳤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렇게 해왔는지, 나라면 못했을 거다.
- 액션에 관한 이야기도 해보자. 카이토와 쥰지는 총기와 맨몸 액션 모두 준비해야 했다.
설경구 카이토와 쥰지는 말 그대로 주먹다짐이었고, 이하늬 배우와 몸싸움을 하는 신도 있다. 나보고 베테랑이라고들 하지만 사실 하늬씨가 정말 잘했다. 팔다리도 길고 워낙 집중을 잘하더라. 나는 힘 조절이 안돼서 관절이 꺾일 뻔하기도 했다. (웃음)
박해수 <야차>에선 설경구 선배에게 맞기만 했는데, 이번에도 많이 맞긴 하지만. (웃음) 아무튼 쥰지에게 맞는 와중에도 카이토가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모든 힘을 쥐어짜 발버둥치는 모습들이 좋았다.
- 천 계장은 도드라지는 액션은 없지만 손 제스처가 굉장히 돋보인다.
서현우 소품을 다루는 연습을 하면서 손을 어떻게 쓸지 자연스럽게 결정됐다. 또 덩치가 있으니까 손을 주머니에 넣기보단 배 위에 올려놓을 것 같았고, 캐릭터 외형에 따른 제스처 변화를 많이 연구했다. 사실 연극적인 접근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걸 <유령>을 통해 다양하게 시도할 수 있어서 영화에서도 이렇게 갈 수 있구나, 하고 느꼈다.
- 설경구, 박해수 배우는 <야차> 때 만난 바 있지만 서현우 배우와는 처음이다. 이번에 함께 합을 맞춰보니 어땠나.
설경구 현우야 뭐, 한국예술종합학교 때 연기의 신이었다는 얘길 들어서. (일동 웃음) 아무 걱정 없었다. 나중에 얘기해주었는데, 자기가 <소원>에서 앰뷸런스를 운전하는 구급대원 역을 했다더라. 그땐 대사도 없고 워낙 급박한 신을 찍느라 잘 몰랐는데, 이야기해주니까 기억이 났다. 반갑고, 지금까지 착실하게 와준 게 고마웠다.
박해수 현우가 맡은 캐릭터도 그렇지만 현장에서도 숨통을 트이게 해줄 때가 많았다. 주변을 많이 챙기고 분위기도 띄워주고. 맨날 배에 손을 얹고 있어서 우리가 ‘연기 동자’라고 불렀는데 연기 동자가 뭘 할 때마다 박수 쳐줬다. 그때 정말 귀여웠다.
서현우 해수 형은 가장 마지막에 구원투수처럼 등장했는데, 일본어 대사를 할 때마다 기네스 기록을 세우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천 계장이 총독부에서 자기가 오래 있었다고 쥰지에게 반말을 한다. 설경구 선배님께 반말이라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고. (웃음) 사실 리딩 때부터 엄청 긴장했는데 설경구 선배님이 정말 잘 받아주셨다. 천 계장도 쥰지와 잠시 붙는 신이 있다. 워낙 덩치가 커서 밀릴까 싶었는데 선배님 주먹이 이만하다. 멱살이 잡혔는데 그 무거운 몸이 돌아가더라.
- 구정 연휴를 앞두고 개봉한다. 관객이 영화를 어떻게 봐줬으면 하나.
설경구 <유령>은 극장에서 개봉하는 박해수 배우의 두 번째 영화다. 작품은 많이 했는데 OTT 플랫폼으로 많이들 가서, 그래서 감회가 남다를 거다.
박해수 정말 감격스럽다. 캐릭터들의 이면과 내면의 갈등이 담긴 뜨거운 영화고 이해영 감독님만의 감각이 잘 살아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관객이 영화관에서 많이 봐주셨으면 한다. 영화관에선 감각이 열리지 않나.
설경구 원작 소설의 큰 틀만 가져오고 새롭게 창조한 부분이 많은데, 항일이라는 주제를 놓지 않으면서 오락성도, 통쾌함도 있어서 즐기기 좋은 영화다. 설 연휴엔 다들 <유령>을 봐주시기를.
서현우 계속 나아가는 항일 조직의 에너지, 배우들의 열정이 관객에게도 다가갈 거라 믿는다. 가족들이 다 함께 보기 좋은 작품이라 생각하고, 역시 설엔 <유령>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