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의 달> 이상일 감독과 송강호 배우의 대담은 <씨네21> 유튜브 채널에서 영상으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_zW6EduGSM)
말하기 힘든 감정, 보이지 않는 관계… 우리의 갈증
송강호 지지난해 <브로커>를 한창 찍던 어느 날, 홍경표 촬영감독과 촬영팀 스탭들이 어디론가 부리나케 가더라고요? 어디 가냐고 했더니 백신을 맞아야 한대요. 알고 보니 이상일 감독님 작품을 찍기 위해 <브로커> 촬영 끝나고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야 하는 거였어요. 그렇게 <유랑의 달>이라는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됐죠. 홍경표 촬영감독님이 워낙 열정이 대단한 분이시잖아요? 감독님하고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 촬영감독과 함께한 건 이번이 처음이신가요?
이상일 네, 처음입니다.
송강호 어떠셨습니까?
이상일 홍 촬영감독님은 한국의 촬영감독이라고 말하기보다 그저 홍경표 자체라는 느낌이 있어요. 그만큼 특별하셨죠. 홍 촬영감독님이 일본에 들어오신 후 2주간 격리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크랭크인 직전에야 함께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로케이션 헌팅도 같이 못했지만 줌으로 대화를 많이 했어요. 현장의 빛, 바람과 같은 자연 요소, 배우의 움직임을 보며 홍 감독님만의 첫컷을 찾아가는 작업이 너무 재밌었어요. 많은 공부가 됐습니다.
송강호 모든 감독들이 그러하겠지만. 이상일 감독님 작품을 보면 감독님만의 어떤 집요함이 보여요. 배우로서 참 존경스러운 지점입니다. 그런 집요함이 요구되는 것이 촬영 당시에는 좀 고통스러울 수 있겠지만, 집요하기 때문에 배우의 보이지 않는 색깔과 에너지를 충분히 끄집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국 감독 중에서도 그렇게 집요한 감독님들을 좋아하는 편이고요. ‘배우들이 참 힘들었겠구나. 하지만 그렇게 명장면이 나오고 명작이 됐구나.’ 생각하곤 했습니다. 혹시 감독님은 어떤 한국 배우와 작업해보고 싶은지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지금 눈앞에 있는 저를 제외하고요. (웃음)
이상일 젊은 배우 중에서는 유아인 배우와 함께해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송강호 배우와 <밀양>에서 함께했던 전도연 배우도 정말 멋지다고 생각하고요.
송강호 저는 당연히 이상일 감독님이 한국 배우들과 작품을 하시고, 제게 기회가 생긴다면, 정말 출연하고 싶은 마음이고요. 사실 일본 감독들에 대한 선입견도 있었어요. 치밀한 텍스트를 정교하게 한 장면 한 장면 찍어나갈 줄 알았죠. 그런데 <브로커>를 통해 만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은 그 정반대 지점에서 시작하시는 거예요. 현장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다음날 찍을 장면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 식의, 예상치 못한 진행 방식을 보여주셔서 고레에다 감독님만의 방식도 알게 됐습니다. 작품의 성격에 맞게끔 감독님이 다양한 접근법을 보여주셔서 저도 많이 배운 기억이 납니다. 이상일 감독님 작품 이야기로 돌아와서, 궁금했던 점을 여쭤볼게요. 항상 감독님 작품을 보면서 그 주제와 캐릭터, 감독님이 전하고픈 느낌이 한마디로 ‘세다!’ , ‘세구나!’ 생각하곤 했어요. 그런 스타일을 특별히 좋아하시는 건지, 아니면 그런 인물들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감독님 스스로에게 잘 맞는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궁금했습니다.
이상일 말씀해주신 것처럼 제 영화가 한국영화처럼 세다는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듣는 편이에요. 제가 단순히 그런 걸 좋아한다기보다 어떻게 보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 평소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잡아내고 파헤치려는 힘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다보니 배우들도 본인들이 확실히 알지 못하는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죠. 송강호 배우님도 아까 ‘배우로서 해답을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배우들이 그런 점에서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송강호 저도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배우가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표현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 들어가면서, 경험이 많아지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점이 해석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품과 인물에 대한 정확한 해석, 자기만의 해석이 중요하다는 거죠. 아까도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듯 감독과 배우의 해석이 같을 수는 없어요. 오히려 그래서 흥미롭지 않나요? 배우의 연기가 감독의 해석과 상이하게 표현되더라도, 배우가 절실하게 느낀 바로부터 나온 표현이라면 또 다른 정답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요. 감독님은 이번에 <유랑의 달>을 찍으며 히로세 스즈, 마쓰자카 도리 배우와 어떤 대화를 하셨나요?
이상일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에 동감합니다. 저도 배우들에게 정확한 디렉션을 주는 편은 아니에요. 그냥 리허설을 해봅니다. 그것도 대본에 있는 장면이 아닌 대본에 없는, 신과 신 사이의 신을 떠올려 리허설을 해봐요. 배우에게 필요한 것을 같이 찾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싶어요.
송강호 리허설을 좋아하는 배우가 있고, 좋아하지 않는 배우도 있을 것 같은데….
이상일 강호 형은 어떻습니까?
송강호 저는 리허설을 많이 안 하는 쪽을 좋아하죠. 왜냐하면 리허설을 계속 하다보면 슛 들어갔을 때의 생동감이 없어지는 것 같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장면을 찍을 때는 리허설을 많이 하는 게 도움이 되기도 해서 정답은 없는데, 일본 배우들은 대체적으로 리허설을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는지요?
이상일 좋아하지 않죠. (웃음)
송강호 육체적으로 힘이 드니까요. (웃음) 옛날 필름 시대에는 필름을 아끼기 위해 리허설을 참 많이 한 기억이 나요. 막상 필름을 끼우고 진짜 촬영을 하면 기운이 다 빠졌던 경험도 있습니다.
이상일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강호 형에게 많은 대본이 갈 텐데,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작품을 선택하시나요?
송강호 글쎄요, 작품도 운명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세월이 지나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배우 스스로 갈증을 느끼는 지점이 있기 마련이에요. ‘이런 작품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느끼고 있을 때, 그런 작품을 찾게 되는 거죠. 너무나 훌륭한 바탕을 가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제 갈증을 자극하지 않을 때는 거절하게 되고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품과 배우가 만나는 것은 숙명이지 싶습니다. 늘 제가 가진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해왔어요.
이상일 최근 젊은 배우들은 본인이 하고자 하는 작품을 직접 연출하고 기획하기도 하잖아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고려를 안 하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송강호 그런 질문을 간혹 받습니다만 저는 그런 능력을 가진 배우가 아니에요. 애초에 감독으로서의 야심도 없어서 연기에만 집중하는 것 같아요. 요즘 능력 많은 예술가들이 많아 참 부럽죠.
이상일 그럼 배우님의 다음 작품은 무엇인가요?
송강호 지난해 김지운 감독님과 <거미집>이라는 영화를 찍어서 올해 개봉할 겁니다. 그리고 <거미집> 각본을 쓴 신연식 감독과도 <일승>이라는 스포츠영화를 하나 찍었어요. 그 두편이 올해 개봉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올봄 OTT 드라마(<삼식이 삼촌>) 한편을 찍을 겁니다.
이상일 처음 OTT 작품에 나서는 건데, 특별히 생각 중인 지점이나 소감이 있으신가요?
송강호 전혀요. (웃음) 뭐랄까, 이제 환경 자체가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어요. 처음 해보는 드라마 촬영이라 두렵기는 한데, 좋은 후배들 옆에서 잘 묻어가야 하는 작업이 될 것 같네요. 기대해주세요! 저도 감독님 작품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앞으로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만남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오늘 화상으로나마 만나뵙고 말씀 나눌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이상일 네, 감사합니다. 귀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죽기 전까지 꼭 한번은 같이 작업합시다!
송강호 아리가토 고자이마스!(감사합니다!)
이상일 요로시쿠 오네가이시마스!(잘 부탁드립니다!)
송강호 배우와 이상일 감독이 최근 인상적으로 본 작품
송강호 <멋진 세계>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작품을 오래 봐왔는데, 그분이 감독으로서 축적한 성숙된 세계관이 드러난 신작 <멋진 세계>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야쿠쇼 고지라는 대배우의 연기를 보며 전율을 느꼈습니다. 젊은 나이가 아님에도 그 육체와 정신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그분의 작품을 쭉 봐온 관객이자 후배 배우로서 정말 존경스러웠습니다.”
이상일 <나의 아저씨>
“<나의 아저씨>는 <브로커>의 이지은 배우와 <기생충>의 이선균 배우가 출연해 일본에서도 화제가 됐습니다. 저는 이제야 뒤늦게 봤는데 참 잘 만든 드라마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배우의 연기에 놀라며 봤는데, 이지은 배우는 당시에 배우로서 경험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도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줬어요. 두 배우의 호흡이 상당히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