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센터에서 촬영을 시작해 저수지에서 끝나기까지, <다음 소희> 현장에서 김시은은 자주 눈물을 참았다. 성희롱을 일삼는 콜센터 고객의 폭언을 들을 때, 엄마에게 회사를 관둘까 넌지시 흘려 말할 때 소희는 참아냈는데도 김시은은 울고 말았다. 2016년 <생방송 톡! 톡! 보니하니>로 데뷔해 영화 <협상>, 드라마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 <십시일반> <런 온> <멘탈코치 제갈길>에서 주로 쾌활한 청춘을 연기했던 그에게 첫 주연작 <다음 소희>는 “처음으로 내가 가진 어두운 면을 꺼내어 다뤄보는” 어렵고도 귀중한 경험이었다. <다음 소희>가 연소시킨 김시은은 그 불꽃을 키워 조현철 감독의 데뷔작 <너와 나>에서도 잊지 못할 인상을 남긴다. 어느새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나 단정하고 힘 있게 내공을 쌓아가는, 스물다섯 김시은을 만났다.
- 콜센터 실습생으로 선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희는 계속해서 궁지에 몰린다. 매일 촬영장 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겠다.
= 후반부로 갈수록 내가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상에서는 감정에 무딘 편인데 <다음 소희> 때 한번은 전주 촬영장으로 내려가다 말고 갑자기 숨이 턱 막혀왔다. 무작정 핸드폰 메모장을 켜서 소희의 감정들을 전부 써내려갔다. 그렇게 털어내고 나니까 좀 괜찮았다. 집에 가서 “회사 그만둘까?” 말하는 장면을 찍을 때쯤이었을 거다. 정주리 감독님이 정말 섬세한 분이라고 느낀 게, 그날 내 상태를 눈치채고 조용히 곁으로 오시더니 “평소에도 늘 소희로 살 필요는 없어. 현장에서만 소희가 되어주면 돼”라고 말해주셨다. 그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그 뒤로는 조금 편안해졌다.
- 그때 쓴 메모장을 여태 간직하고 있나.
= 그럼. 지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쓴 날 이후로 한번도 펼쳐보진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 왜 하필 회사를 관두고 싶다고 처음 말을 꺼낸 그 장면이었을까. 실적 압박, 고객의 폭언, 팀장의 자살 사건이 겹친 그즈음부터 소희는 완전히 고립되어간다.
= 영화 초반에도 잘 드러나듯이 소희는 당차고 웬만해선 잘 울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장면을 찍을 때 나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났다. 참으려고 엄청 노력했는데 코를 살짝 훌쩍이는 소리가 잡히고 말았다. 감독님이 특유의 표정으로 나를 측은하게 살피셨다. (웃음) 콜센터 고객에게 성희롱을 당할 땐 눈물이 갑자기 주륵 흘러서 엔지가 났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여전히 눈가가 촉촉하긴 하더라.
- 실제로는 어떤가. 눈물이 많은 편인가.
= 전혀. 남들 앞에서 울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조현철 감독님의 <너와 나>를 찍을 때도 처음엔 겉으로 크게 우는 것이 힘들었다. 소리내서 우는 법을 잊어버린 모양이네, 스스로 그렇게 느꼈다. 그만큼 감정을 잘 숨겨왔던 것 같다. 장녀여서 그랬을까? 잘해내고 싶은 마음에 휘둘리다보면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는 게 사실이지만, 어쨌든 연기는 나를 해소시켜준다.
- 소희와 시은의 교집합을 발견한 순간이 있나.
= 우리는 완전하지 못해서 닮은 것 같다. 일이라든가 주어진 과제를 대단히 잘해내고 싶고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지만 아직은 마음만큼 해내지 못할 때가 많달까. 노력하는 것과는 별개로 어쩔 수 없이 역부족인 인생의 시기가 있는 게 아닐까. (웃음) 물론 소희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명확한 친구다. 내가 돈을 벌어야 살림에 보탬이 되고 집안 사정도 더 나아질 거라는 바람이 소희에겐 있었다.
- 그 강인함이 소희를 더 빨리 좌절시킨 것 같아 안타깝다. 당돌해 보이지만 실은 내색하지 않는 것이 더 많은 인물이다.
= 맞다. 그래서 죽은 소희를 회고하는 사람들이 소희가 늘 당차게 자기를 표현해온 사람처럼 말하는 모습에서 유독 마음이 아팠다. 소희도 그런 시선을 알고 있었을 테고, 그러니 힘든 순간에도 여기서 더 말해봤자 무엇하겠냐고 점점 더 마음을 닫아버린 게 아닐까 싶다. 씩씩해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고 있을 때가 많다. 유진 형사님(배두나)은 바로 그 이면을 알아본 것 같다.
- 연기하면서 소희가 생의 의지를 잃어버리는 순간을 직감했나.
= 새 팀장님과도 불같이 싸워봤지만 다시 짓눌려졌을 때. 그걸 기점으로 천천히 자신이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가까운 주변인들이 소희 곁에 있어주려고 했지만 다들 생존해야 하는 상황에 가로막혀 있다. 모두 ‘다음 소희’가 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인물들이니까.
- 마지막 저수지 장면에서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소희의 발이 너무도 시려 보였다.
= 실제 김시은은 추위를 전혀 느끼질 못해서 스탭 분들이 당황할 정도였다. 배두나 선배님이 발 전용 핫팩도 사주셨는데 나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너무 몰입해서 그런 건지, 내가 추위를 잘 견디는지 그건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촬영 시작을 콜센터로 열어서, 마무리를 저수지 장면으로 닫았다. 그 추운 날 하필 왜 저수지로 들어갔을까, 처음엔 나도 궁금했다. 그런데 촬영 후반부쯤 이미 소희가 되어 있는 시점에 저수지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끌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저수지에 서 있는 모습에서 죽음이 암시될 뿐 그 이후는 묘사되지 않는다. 잔물결을 내려다보며 서 있을 때 어떤 생각이 들던가.
= 가슴이 너무 아픈 한편 ‘이제 모든 고통이 끝났다’는 홀가분한 상태도 찾아왔다. 도대체 그 감정이 뭘까? 지금까지도 정리하기 힘들다. 그런 마음이 너무 죄스러워서 한동안 자책도 많이 하면서 속앓이를 했다. 여태 한번도 입 밖에 꺼낸 적 없는데 오늘은 이야기하고 싶다.
- 어렸을 때 드라마 <대장금>에 빠져 TV 앞에서 따라 하는 아이였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대학에 가서 체코슬로바키아어를 전공했다. 대학 입학 후 연고 없이 배우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힘들진 않았나.
= 성인이 된 이후론 부모님도 배우 활동을 응원해주셨다. 어디에든 어떻게든 출연하고 나면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하겠지’란 마음으로 EBS <생방송 톡! 톡! 보니하니> 오디션을 봤는데 덜컥 합류하게 됐다. 이어서 <생방송 판다다>까지 연이어 생방송 MC로 활동했던 경험이 여러모로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지금의 회사 키이스트를 만나 드라마 오디션에 매진하면서 좋은 작품들을 만나게 된 것도 정말 감사한 경험이다.
- 연기 생활 시작과 동시에 여러 작품에 출연했는데 앞으로 어떤 리듬으로 일하고 싶나.
= 얼마 전 25살 생일이었다. 친구들은 이제 대부분 직장 생활을 시작할 나이가 되어 최근 들어 우리의 삶의 패턴이 슬슬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외로울 때도 있고 일을 해야만 해소되는 부분이 있는데 어깨너머로 선배들을 보면서 느낀 건 결국 잘 기다리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지금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도, 유튜브 채널 운영도 공백의 시간을 혼자 잘 보내기 위한 이런저런 시도에 가깝다. 연기를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 외에, 나의 모든 것은 아직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