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콜린 패럴 배우론: 통제 불가능한, 예측 불가능한
2023-02-23
글 : 김성찬 (영화평론가)
<이니셰린의 밴시>와 콜린 패럴의 마력

콜린 패럴이 제95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로 호명된 사실을 접하는 심경은 복잡하다. 그의 연기력이 아직 수상할 만하지 않다거나 반대로 후보 지명이 늦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이미 2022년 베니스국제영화제와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 등에서 <이니셰린의 밴시>로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이전에도 크고 작은 자리에서 주연상을 거머쥔 바 있다. 그럼에도 오스카가 지닌 상징성을 고려하면 감개무량하다. 또 지금이야말로 그의 눈썹 두께만큼이나 선 굵은 행보를 보여준 배우로서의 역량을 말해야 할 적기라고 믿는다. 물론 그의 배우 이력 중간쯤 오스카 후보 지명이 있었다면 의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언젠가부터 그의 발자취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던 터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그 정점이다. 그가 연기한 파드릭의 유일무이할 만큼 고집스러운 면모를 보자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뾰족한 성정의 사내

파드릭은 아일랜드에 위치한 이니셰린이라는 가상의 섬에 여동생과 반려견에 준하는 당나귀 제니를 데리고 산다. 그의 유일한 낙이라면 친구 콜름(브렌던 글리슨)과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콜름이 어느 날부터 그에게 반응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가 싶더니 이유를 캐묻는 그에게 급기야 말을 걸면 자해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상심한 파드릭은 영문을 몰라 답답해하다 못해 우울증에 빠질 지경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친구를 위해 천천히 기다려주거나 친구가 원하는 대로 해줄 법한데도 파드릭은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실망감을 뒤로하고 콜름에게 다가간 그는 험악한 상황과 맞닥뜨린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또 한번 콜름을 찾아가고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욱 심각한 사태와 마주한다. 여기서 멈춘다면 고집이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망은 분노로 바뀌고 그는 재차 콜름에게 향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파드릭의 겉모습은 초라하다. 얼굴은 주름지고 몹시 수척하며, 머리카락은 듬성듬성하다. 친구에게 바람맞아 풀이 죽어 집 한구석에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왕년의 콜린 패럴을 떠올리며 세월의 무상함에 공감할지 모른다. 단호한 친구의 태도에 눌려 맞대응하지 못한 채 뒷걸음치거나 여동생이 부린 성화에 기가 죽은 파드릭은 관객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위협적 존재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거듭된 고집과 결국 후반부에 드러나는 파드릭의 광폭한 성미로 극은 반전하고, 파드릭은 콜린 패럴이 그간 작품에서 보여줬던 진면목, 그러니까 저 인물을 통제 안에 뒀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체념에서 비롯한 이상한 이끌림, 어느 시구를 빌린다면 “사라졌는데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사람”으로서 통제가 불가능한 데서 빚어진 마력을 뽐내는 그로 되돌아와 있다. 그러면서 마초 기질을 어리석게 동경하거나 보호본능으로 가장한 소유욕을 채우려는 관객의 은밀한 욕망에 부응한다.

그렇게 볼 때 영화 <더 랍스터>와 <킬링 디어>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도 유사하다는 걸 깨닫는다. 독보적 연출력이라는 상찬 뒤로 작품 속 인물을 꼭두각시로 대우해 학대한다는 비판이 있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세계에서 콜린 패럴이 연기한 인물 데이비드와 스티븐은 때때로 감독의 완벽한 통제에도 기어코 틈새를 찾아내 달아나거나 여의치 않아도 어떻게든 반발하려 든다. 반드시 사랑을 해야 하거나 결코 사랑해서는 안되는 양극단의 세계인 <더 랍스터>에서 내부의 규칙을 따르다가 끝내 순응하지 않고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쪽으로 내달린 후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는 데이비드와, <킬링 디어>에서 의료 사고 희생자의 아들이 펼쳐놓은 게임판 위에서 무기력하게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다가 언제든 판을 뒤집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눈빛의 스티븐은, 감독이 구상한 캐릭터인 건 분명하지만 다른 인물과 비교할 때 유독 자유의지를 지닌 것처럼 비친다. 상상이지만 두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인물은 감독과 지난한 의견 대립 끝에 나온 절충안 같다. 다른 작품은 어떠한가. 그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대니 검찰관부터 <더 배트맨>의 펭귄에 이르기까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에도 심심치 않게 출연했다. 그가 맡은 배역은 그저 주연급의 악동이나 악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좀처럼 반성이나 회한을 하지 않는 성정의 인물이었다.

통제를 거부하는 몸짓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경로를 이탈한 듯한 작품은 <애프터 양>이다. 근미래 기억이 가능한 안드로이드를 둘러싼, 사진과 영화에 관한 근사한 SF인 이 작품에서 콜린 패럴은 뾰족한 심성을 지닌 사내가 아니다. 다만 이 작품을 택한 그의 취향이 영화 밖에서 그에게 가하는 예측 가능함이라는 통제를 걷어 치운 사례라고 말하고 싶다. 배우의 활동이 길어지다 보면 출연작 수가 증가하면서 장르도 다변화해 특정 범주에 배우를 자리매김하기 어려운 건 자연스럽다. 또 이목을 끄는 이미지 변신을 꾀하려고 과도한 분장과 급격한 체형 변화를 통해 극단적 성격의 인물을 연기하는 경우도 많이 목격한다. 이에 비해 콜린 패럴의 선택은 영화 안팎으로 체감하는 무형의 통제를 거부하는 몸짓 같다. 다른 배우들이 그랬던 것처럼 외모를 무기로 스타로 군림하다 나이 들어 발생한 위기감에서 배우 생명을 연장할 요량으로 작가영화 세계를 기웃거리거나, 철없던 시절 벌인 객기를 반성한 뒤 인생을 달관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부러 허를 찌르는 걸음을 걸었던 것과는 궤적이 다르다.

그는 청춘 아이콘으로서 스타도, 예술영화로 영역을 넓히려는 과잉된 자의식을 지닌 허위 예술가도 아니다. 완벽한 계산과 힘든 탈출이 빈번한, 천부적 소질에 근거한 메소드 연기는 그의 목표가 아니다. 매 차례 감정을 다한 뒤 다음 작품에 임할 뿐 배우는 직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말하는 그는 소명 의식이 투철한 직업 배우이며 바로 이 점이 통제 불가능한 마력의 원천이다.

“사라졌는데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소피아 코폴라가 돈 시겔의 작품을 다시 만든 <매혹당한 사람들>에서 부상병 존으로 나온 콜린 패럴은 단순한 맥락에서든 복잡한 경로에서든 여성 대 남성 구도에서 선명한 남성성에 기대면서 통제의 여지를 주지 않아 매력적인 인물이다. 부상당한 처지의 그를 영화 속 소녀들은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매너 있고 다정한 그의 언행에 그만 통제당하는 입장으로 바뀐다. 애초 그는 부재했지만 두 번째 부재가 있은 후 소녀들의 세계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다.

사진제공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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