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더 웨일’로 보는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세계, 그리고 배우 브렌던 프레이저 스토리
2023-03-03
글 : 김소미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이 10년 전 관람한 새뮤얼 D. 헌터의 연극에 기반한 <더 웨일>은 감독이 오랫도록 천착한 인간 구원의 가능성이라는 주제를 한정된 공간과 시간의 굴레 안에서 다룬다. 관객은 온라인으로 에세이를 가르치는 대학 강사인 주인공 찰리(브렌던 프레이저)가 간신히 거동할 뿐인 그의 집 안에 붙잡힌 채로, 간호사 리즈(홍 차우)에 따르면 “이대로라면 주말쯤엔 죽을 것이 뻔한” 남자의 일주일을 지켜본다. 주제와 형식의 조우 면에서 <더 웨일>에 대한 첫인상은, 과잉의 벌레스크로 치닫곤 했던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영화가 돌연 고전의 창연한 기색을 풍긴다는 사실에 흥미를 품게 한다.

반종교적 구원 서사의 재료들

찰리는 죽어간다. 혈압 234, 몸무게 272kg의 울혈성 심부전 환자인 그는 지난날의 사연 대신 우선 화면을 압도하는 온갖 증상들로 존재를 호소한다. 친구인 간호사 리즈가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 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집에서 그는 병원행을 거부하고 생을 마감할 날까지 일상을 유지하려 애쓴다. 그 일상이란 말기 질환으로 투병 중인 환자가 찾을 만한 호스피스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찰리는 심장 발작 직후에도 폭식을 멈추지 않고, 정기적으로 대학의 온라인 강의를 이어가며, 내키면 자위를 하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는 매일 에세이를 읽는다. 그리고 <더 웨일>은 악화만이 남은 여생의 문을 두드린 두명의 새로운 인물로부터 이야기를 확장한다. 치료를 거부한 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영성의 인도뿐이라고 믿는 젊은 선교사 토마스(타이 심프킨스), 함께 에세이를 쓰면 전 재산을 주겠다는 아버지의 회유에 마지못해 찾아오는 딸 엘리(세이디 싱크)가 그들이다. 손님들에 의해 밝혀지는 바, 찰리는 오래전 강단에서 제자로 만난 동성 연인과의 관계를 위해 아내와 딸을 버린 남자로, 그의 삶은 파트너까지 죽음을 맞이하면서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표면을 거칠게 추출하자면 가족을 떠났던 게이 아버지가 죽음 앞에서 딸을 불러 화해를 시도하는 눈물 겨운 가족 드라마적 접근일 수 있겠으나 <더 웨일>은 엘리를 향한 찰리의 집착에서 부성보다는 에세이스트의 신념을 읽어낸다. 솔직하게 쓴다는 것, 그리하여 진실된 작품을 남기고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찰리 자신이 실현하지 못한 이상이자 남은 엘리에게 투영된 무거운 환상이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 속 에이해브와 고래의 싸움이 노골적으로 거듭 인용되는 동안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은 단 하나의 강고한 믿음과 실천만이 신이 주지 않는 인간 구원의 열쇠라고 믿는다. 심장 발작 이후에도 링 위에서 몸을 던지는 <더 레슬러>의 가난하고 외로운 레슬러, 쾌락의 순간에만 실존하는 <레퀴엠>(2013)의 약물중독자들, 자기 몸을 부수고 찢어버릴 때 달성되는 경지를 믿는 <블랙 스완>(2011)의 발레리나…. 극한의 집념과 중독, 그로 인한 육체적 수난을 인간 조건으로 실험한 애러노프스키는 <노아>(2014)와 <마더!>(2017)에 이르러 종교적 텍스트를 더욱 직접적으로 빌려오면서 자신의 반종교적 구원 서사를 완성해나가고 있다.

한편 그 연장선에 있는 <더 웨일>은 전작들과 달리 장르적 장치나 우화적 만듦새부터 보호받을 여지가 적은 서사다. 그러므로 <더 웨일>이 비만 혐오의 시선에 일조한다는 인상, 퀴어 주인공의 고난을 개인의 순교적 행위로 귀결짓거나 다시금 전통적인 가족 신화로 환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작가 록산 게이는 <뉴욕타임스>에 영화의 도입부부터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고 있는 거구의 남성을 묘사하는 방식 등을 언급하며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이 비만을 인간의 궁극적인 실패로 여긴다는 것이 분명했다. (…)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할 비열한 자세”라고 비난했고 <CNN>은 지난해 오피니언 섹션에 ‘<더 웨일>을 향한 백래시가 말하는 바는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라는 칼럼을 싣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은 창작자들이 재현의 영향력과 권력에 대해 숙고하게 만들며 <더 웨일> 이후의 더 나은 시도들을 견인하는 생산적인 관점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자기 모욕을 전제로 성립되는 대런 애러노프스키 영화의 저변을 탐구하는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논리로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찰리의 폭식, 몸에 얽힌 자기 혐오, 그를 향한 외부의 배타적 시선은 신실한 종교인이었던 찰리의 연인이 교단에서 쫓겨난 후 식음을 전폐한 채 산송장이 되어 죽음에 이른 사건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완전히 비워버린 죽음 앞에 바치는 완전한 과잉의 죽음. 그것은 <더 웨일>에서 주인공 찰리가 너무 담담하게 반응하는 나머지 잘 부각되지 않지만, 자신을 찾은 젊은 선교사 토마스의 ‘가해’에 대한 그만의 분노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이를 죽게 한 교회가 자신을 구원해주겠다고 말할 때 찰리는 상대를 때리는 대신 피자 두판을 몸속에 밀어넣는다. 이 영화의 폭식과 비만은, 폭넓은 사회적 함의보다는 ‘새 생명 교회’를 향한 반달리즘(의도적으로 상징적인 예술품, 문화 등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행위)으로 풀이될 필요가 있다.

그들, 그녀들

더이상의 레슬링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레슬러 랜디(미키 루크)가 자신의 시그니처 기술을 선보이기 위해 로프 위에 올라가 몸을 던지는 순간 <더 레슬러>의 마지막 컷은 암전된다. 이 하강의 숏은 <더 웨일>의 마지막 순간에 딸 엘리의 에세이 낭독과 함께 찰리의 두발이 공중에 떠오르며 화이트 아웃되는 장면과 대응된다. 강렬한 파토스의 결정체로 맺어진 엔딩이란 점에서 둘은 비슷해보이지만 여운이 남기는 순도는 다르다. 싸움의 대상 앞에 오직 홀로 존재하는 레슬러의 투신과 달리 <더 웨일>의 엔딩은 그곳에 남은 두 여자의 처리되지 않은 구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아버지를 구원한 자기 에세이로부터 당사자인 엘리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 순간, 그동안 이 글에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던 인물- 찰리의 죽은 연인의 입양된 여동생이자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는 동질감으로 찰리와 완벽히 유대한- 간호사 리즈는 부녀를 위해 집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 자기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고 나서, 그의 연인의 사후까지 처리하게 된 어느 아시아계 간호사의 삶을 <모비딕>과 <더 웨일>은 미처 아우르지 못한다. 해결되지 않는 슬픔으로 폭식하는 사람들, 오만한 가해자들, 타인을 쉽게 두려워하는 더 많은 타인들의 이야기인 <더 웨일>은, 한편으로 그중 누구도 되지 못한 채 지친 얼굴로 자기 할 일을 해나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도 될 수 있어야 했다.

‘파더!’의 집

뉴욕의 한 스튜디오를 대여해 꾸린 찰리의 집에서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과 제작진은 약 4주간의 리허설을 마치고 촬영에 돌입했다. 가능한 최소의 무대장치로 완성된 <더 웨일>의 집은 최대의 가능성을 품는 공간으로 꾸려진 <마더!>의 집과 인상적인 비교를 이룬다. 선악과에 손을 댄 아담과 이브에서부터 폭력으로 점철된 인류 문명사를 압축해낸 <마더!>의 대담한 시도는, 그보다 한참 전에 새뮤얼 D. 헌터의 연극 <더 웨일>을 접한 뒤 ‘집’이라는 은유에 몰두한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상상력 안에서 자연스레 피어난 결과였음을 이제야 추측할 수 있기도 하다. 인류세의 장소이자 생명력의 물상이었던 마더들의 집은 <더 웨일>에서 단 한 사람의 파더를 위한 광활한 바다로 바뀌었다. 아무도 없는 그 망망대해에서 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고된 파도를 건넌다.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과 <레퀴엠> <천년을 흐르는 사랑> <노아> <마더!> 등으로 꾸준히 작업해온 매슈 리버티크 촬영감독은 인상적인 핸드헬드 실력을 내려놓고 카메라를 고정시켜 이 상징적 연극에 동참했다. 이처럼 카메라의 권능과 CG의 지배가 없는 영화이기에 마지막 공중 부양의 엔딩숏이 주는 이미지의 숭고함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효과로 남는다.

브렌던 프레이저 부활하다

부활시킬 배우를 선택하는 안목에 있어 대런 애러노프스키는 확실히 변태적인 구석이 있는 감독이다. 그는 교통사고 후유증에 시달리다 경력이 중단된 미키 루크를 불러 <더 레슬러>에서 면도칼로 자기 이마를 긋는 레슬링 선수로 만들었다. 미키 루크는 2008년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의 영예를 시작으로 그해 신성한 부활로 일약 주목받았다. 이번에 대런 애러노프스키가 호출한 새 부활 서사의 주인공은 배우 브렌던 프레이저다. <조지 오브 정글>과 <미이라> 3부작 시리즈를 연달아 대성공시키며 스타의 입지를 굳혔던 프레이저는 무모한 스턴트를 장기간 소화하면서 재활의 늪에 빠지고 만다. 커리어의 부침과 이혼, 그리고 훗날 고백한 대로 할리우드의 거물 인사에게 성추행을 당하며 우울증에 빠진 프레이저는 2010년대 내내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다. 45kg의 보철 모형을 착용하고 완전한 취약성을 드러내는 연기를 요구받은 <더 웨일>에서 그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단락을 앞두고 타인과 다시 연결되고자 애쓰는 남자의 모순과 측은함에 기어코 어떤 진실함을 입힌다. 처절한 자기 모욕과 혐오의 상태를 연기하면서도 어둡지만은 않은 인간형을 완성시킨 그에게 2022 토론토국제영화제는 공로상을 안겼고, 2023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23개의 비평가협회가 남우주연상을 선사했다.

사진제공 그린나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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