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다르게, 비틀면서 보여주기
- <절정> 이후 차기작으로 이어진 <제왕의 딸, 수백향>에서도 대사에 고어나 시적 표현을 많이 활용했어요. 전투와 계략이 이어지는 강렬한 스토리 안에서 이러한 서정적 장치가 어떤 기능을 할 거라 생각하셨나요.
= 저는 비장한 순간과 공존하는 서정적인 찰나가 무척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제 대본에도 그런 아름다움을 구현해보려 자주 시도해요. 또 드라마를 구성할 때도 상반된 감정이 교차되는 것에 재미를 느껴요. 냉혹한 장면 뒤에 서정성을 넣거나, 비장한 장면 뒤에 웃음을 넣는 방식으로요. 전투나 계략이 강렬해 보이기 위해서는 서정미가 있어야 더 부각돼요. 두 극단이 조화를 이룰 때 이야기가 더 풍성해 보이기도 하고요.
- 많은 스탭이 협업하는 현장이 효율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극본의 힘이 중요할 것 같아요.
= 극본이 정확한 정보를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결국 콘텐츠의 알맹이는 이야기니까요. 작가님마다 성향이 다 다르지만 저는 제 머릿속에 그려둔 분위기와 연기 톤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극본에 설명해두는 편이에요. 극본을 보며 각 팀이 공통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그래서 촬영이 더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작가가 보다 구체적인 대본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은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을 모티브로 해서 재해석했어요. 홍길동은 아기 장수로서 힘을 잃었다가 찾기도 하고, 봇짐 장수로서 자유를 추구하기도 해요. 활빈당은 활빈정이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재현되고요. 재해석의 과정은 어땠나요.
= 홍길동이 연산군과 대립하여 무장반란을 일으킨 존재라 상상했을 때, 홍길동의 시작은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어쩐지 조선 버전의 조폭이었을 것 같았어요. 어느 정도 조직력과 군사력을 갖춘 조폭이죠. 그런데 이 전국구 조폭이 탄생하기 전, 그를 키워주고 알아봐준 아버지의 이야기를 함께해보고 싶었어요. <연인>이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생각하며 만들었다면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은 영화 <대부>를 떠올렸어요.
특히 마이클 코를레오네(알 파치노)와 돈 코를레오네(말론 브란도)의 관계를요. 또 소설에는 홍길동이 서자로서의 울분이 강했지만 제가 생각한 홍길동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을 것 같았어요. 오히려 서자로서의 울분을 넣은 건 많은 백성이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연산군의 폭압에 힘겨워하던 백성들이 홍길동의 정의감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홍길동은 천민이 아니고 사실은 로열 패밀리였어. 다만 서자인 거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 거죠. 이게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이 나온 과정이에요. 조선 연산군 시대의 상황을 바탕으로 한 상상이자 재해석이에요.
- 역사적 소재를 세공해 새로운 이야기를 빚고 있어요. 이렇게 이야기를 만드는 행위가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를 갖나요.
= 저는 굉장히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요.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거든요. 그런데도 지루하지 않아요. 앞으로도 20년은 거뜬히 반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본을 쓰는 동안 저는 혼자 있지만 혼자가 아니거든요.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다양한 의견을 경청한 느낌이 들어요. 이야기만이 가진 힘인 거죠.
- 차기작 <연인>이 올해 방영을 앞두고 있어요. 남녀주인공으로 남궁민, 안은진 배우가 촬영을 한창 진행 중이라고요. 이번 작품에선 어떤 점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 병자호란으로 시작해서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될 거예요. <연인>에선 장현과 길채의 사랑 외에도 특히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이야기를 조명하려 해요. 포로로 잡혀간 사람 수는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정작 사료는 별로 없거든요. 사극의 보는 즐거움을 더하기 위해 김성용 감독님도 세트, 소품, 의상 등 작은 디테일까지 하나하나까지 신경 쓰고 있어요. 열정의 본색을 보여준 남궁민 배우와 반짝이는 안은진 배우의 연기를 만날 수 있고요. 고아한 그림 속에서 절절하게 표현될 장면들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탄탄한 개연성을 위한 자료 조사
이야기의 논리적 개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꼼꼼한 자료수집이 필수적이다. 이 과정에 황진영 작가는 무조건적인 다독가가 되어 특정 주제에 관한 논문과 기사, 연구 자료를 모두 섭렵한다. 그는 총 3단계의 방식을 거쳐 정보를 자기 것으로 체화한다. “한번 보면 무슨 말이지 단번에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두번 정독하고 세 번째부터는 밑줄을 그으며 제게 필요한 정보를 표시해요. 그리고 저만의 창고 같은 폴더에 자료를 모두 옮겨 적어요.” 이 스텝을 다 밟고나면 막상 극본을 쓸 때에는 자료를 하나하나 참고하지 않고도 자기만의 생각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역사의 기틀을 토양 삼아 새로운 이야기를 구상할 수 있던 황진영 작가만의 방식이다.
에필로그“사람들이 저를 ‘황진영 작가’라 불러주지만 제가 스스로 느끼는 저의 정체성은 이야기꾼에 가까워요.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는 이야기의 씨앗이 완성도 있게, 매력적으로 다듬어질 때, 쾌감을 느끼거든요.” 그는 이야기꾼의 탁월한 자질을 지녔다. 한 가지 주제를 심도 있게 파고드는 집요함과 자신이 수집한 자료 사이에서 정보 위계를 파악하는 힘은 그가 가진 독보적인 무기다. 누군가가 고정시킨 정의를 무작정 믿지 않고 자기만의 분석을 더하는 재해석이나 자신의 아이디어 곳간을 부지런히 채우는 성실함은 언제나 빛을 발한다. 많은 것이 그가 뛰어난 이야기꾼이란 걸 증명해주지만 오랜 인터뷰 끝에 가장 눈에 띈 것은 자신이 선택한 인물을 온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점이다. 왜 ‘창조한’ 인물이 아니라 ‘선택한’ 인물이냐면 역사적 모티브를 통해 발아한 인물을 그려내는 황진영 작가 특유의 기법이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는 그의 말마따나 어떤 인물이든 황진영 작가를 만나면 시청자로부터 공감과 연민, 이해와 납득을 얻는다. 3월의 밝은 햇살이 반듯하게 들어오는 그의 작업실을 보며, 얼마나 많은 역사 속 인물들이 그를 만나고 싶어 할까 상상했다. 어떤 역사는 이야기를 통해 다시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