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해 못할 사람은 없다는 믿음으로
- 작가님 작품의 공통점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입니다. 민중의 갈증과 염원, 민중에서 시작된 평등에의 실현 등을 담고 있어요.
=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전 확실히 당연하게 누리려는 자들에게 반항하는 기질은 있지만, 드라마를 쓸 때는 재미있는 이야기와 교감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 같아요.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개연성 있는 연결고리가 필요하고, 그 고리는 구체적이어야 설득력이 있죠. 자료 조사를 해보니 연산군 시대에 실존한 홍길동이 전국적 파장을 일으킬만한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는 가설이 충분히 가능하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그 정도의 담대함과 파격을 보여준 인물이었기에 백성들이 홍길동을 사랑하고 구전으로 오래토록 전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혁명을 말하기 위해 인물을 끌어 왔다기 보단, 인물에 대한 연구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혁명적 사건에 도달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아요. 저는 모든 이에게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고 보는 편이에요. 그게 악한 사람이더라도요. 굳이 미화하거나 동정하는 방식이 아니어도, 인물이 처한 상황의 인과관계만 구체적으로 밝히면 많은 부분, 이해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 극적인 인물을 오히려 보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네요.
= 그래서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의 연산군(김지석)도 사실에 기반해 쓰려 노력했어요. 저만의 특정한 기조를 정해두고 인물을 보여주려 하지는 않는 거죠. 올해 공개 예정인 MBC <연인>에도 인조가 등장해요. 막강해지고 있는 청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인조도 나름의 준비를 하지만 그럼에도 패전국의 임금이 되죠.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비범하게 상황을 헤쳐나가지 못한다고 해서 ‘비범하지 못함’을 비난할 수 있을까, 하고요. 물론 인조를 동정하거나 연민할 생각은 없지만, 시청자들이 인조의 파괴된 마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기를 바랬어요. 그래서 악인조차도 얼마나 ‘나’, 그리고 ‘우리’와 닮아있는지를요. 그게 저의 평소 가치관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최근에는 이런 재평가의 관점을 담은 연구도 많이 이뤄졌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작품 속 악역의 감정과 사정을 보여주는 편이에요. 누군가가 온전히 악하기만 한 것도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나요? 진짜같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 이야기의 몰입도가 떨어지거든요. 모든 사람은 입체적이에요.
- 저도 작가님이 빌런을 그려내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어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물이 변모하는 과정을 드러내주거든요. 그런데 시청자가 주인공을 지지하고 안타고니스트를 견제하려면 빌런을 공동의 악으로 구체화해야 하잖아요. 그 사이에서 고민의 지점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 이런 게 제 작품의 시청률이 높지 않은 이유인 것 같기도 해요. (웃음) 악인이 막강하면, 거기서 에너지가 나와 좀 더 폭발적인 반응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텐데, 더 많은 시청자와 교감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는 것에만 끌려가지 않으려 경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한 인물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며, 인간을 통찰해가는 이야기가 많이 재미있습니다.
- 작가님 전작에 대해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볼게요. <절정>은 이육사의 삶에서 광복을 향한 열망의 절정을 그려요. 이 스토리를 구성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은 무엇이었나요.
= 다양한 방식으로 이육사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거예요. 이육사에게는 본부인과 또 다른 연인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생애를 풀어나갈 수 있을 테고요, 또 가족사가 워낙 파란만장해서 가족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할 수도 있어요. 이렇게 다양한 갈래 중 저는 이육사의 시를 부각하고 싶었어요. 그가 인생의 매 구비마다 어떤 감정으로 그 시를 지었는지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벽에 이육사의 생애 연대표를 붙이고, 그 아래 매 시기마다 쓴 시를 적어서, 이육사의 인생 경험과 시가 어떤 접점이 있는지, 그의 절정에 대해 고민했어요. 삶과 작품을 접목해보려 노력했죠.
- 여러 키워드 중에서 구체적인 중심 키워드를 잡는 거네요.
= 정확해요. 스케치 과정에서 범위를 좁히고 구체적인 테두리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거기서 진짜 이기를 끄집어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 한쪽에 편중되지 않은 균형 잡힌 관점을 담고 싶어서일까요? 역사물이라 더더욱 그런 부분을 신경 쓰게 될 것 같은데요.
= 불가능하더라도 진실에 근접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수백년 전에 벌어진 일의 진상은 무슨 수를 써도 알 수 없겠지만 최대한 진실에 가까워지고 싶어요. <연인>에도 이러한 고민이 담겨 있어요. 기존 역사적 관점에서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립은 명분과 실리, 혹은 의리와 생존이라는 ‘가치의 대립’에 더 방점이 찍혔었어요. 그런데 연구 자료와 실록을 계속 보다보니 화친파와 척화파 모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왕을 지키는 것이었단 사실을 알게 됐어요. 물론 왕은 사직의 상징이죠. 그 수호의 방식이 달라서 성문을 여네 마네 격렬하게 토론한 거죠.
또 ‘정강의 변’이라고 과거 중국 북송에서 여진족에게 성문을 열었다가 임금이 끌려가 사직을 지키지 못한 일이 있어서, 이 일이 반복될 것을 두려워한 조선 대신들이 첨예하게 대립한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