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뚫고 나갈 거야. 여기서 저기로”
박해영 작가는 SBS <LA 아리랑> 보조 작가로 시작해 청춘 시트콤 <행진> <골뱅이> <달려라, 울엄마> <올드미스 다이어리> <청담동 살아요>까지 오랫동안 시트콤을 썼다. 시작할 때 애를 먹었다. “남이 재미있을 만한 걸 가늠하고 웃을 만한 걸 찾아 써야 하는데” 그게 재미가 없었다. “메인 작가님을 찾아가 말씀드렸어요. 사람들이 웃어도 나는 재미가 없다고요. 그때 작가님이 해주신 말씀이 ‘글은 억지로 쓰지 못한다. 그러니까 네가 재미있는 걸 끝까지 파라. 그러다 보면 네 것을 재미있어 하는 감독이 나타날 수 있다. 그 감독 만나면 그때부터 작가 인생 풀리는 거다.’ 그렇게 계속할 수 있게 판을 만들어주셨어요. 감사한 조언이었지요. 만약 ‘극은 이런 거야. 이렇게 써야 하는 거야, 저렇게 하면 재미있대’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오래 못 갔을 것 같아요.”
- 그렇게 10년을 파셨어요. 시트콤을 썼던 10년은 무엇을 훈련한 시간이었나요.
=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만약 시트콤을 했던 시간이 없었다면 글이 부드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인간이 이럴 때 웃기지’라는 걸 배울 기회였어요. 10년 동안 내가 매일 쓴 걸 배우들의 연기로 다시 보면서 ‘이거 안 사는구나. 이렇게 쓰면 안되는구나’ 훈련했고요. 10년 동안 내가 쓴 걸 누군가 연기하는 걸 본 경험은 10년 동안 내리 자기 글만 쓴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일 거예요.
- “무조건 행복할 것”이라고 외쳤던 <또 오해영>부터 “어디에 갇힌 건진 모르겠지만 뚫고 나가고 싶어요. 진짜로 행복해서 진짜로 좋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나의 해방일지>까지. 일종의 행복에 관한 탐구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작가님 개인의 화두도 행복인가요.
= 행복까지도 안 가요. 평안. 평화. 안온. 내가 지금 뭘 몰라서, 혹은 내가 지금 뭘 못 놔서 불행한 걸 거야. 그러니까 깨우쳐야 하는 거야, 득도해야 된다. 글 쓰는 게 일종의 개인적인 구도 작업 같아요. <또 오해영>을 쓸 때는 제가 40대 중반이었을 거예요. 인생이 되게 재미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태어나면 엄청 쉬운 여자로 살고 싶다. 막 주고 다 하고 오늘 또 사랑하자. 그런 생각으로 빙의해서 쓴 게 <또 오해영>이죠.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이지은)과 박동훈의 경우 나와 거리가 있는 처지라 약간은 떨어져서 봤고 <나의 해방일지>는 아, 여전히 행복하지 않네? (웃음) 가끔 깜짝 놀랄 때가 있는데 옛날에 썼던 대사가 또 나와요!(‘사랑으로 폭발해버려’, ‘해갈’ 같은 표현일까요.) 그게 해결이 안된 거예요. 해갈도 안됐고 폭발도 못 해봤고 그러니까 계속 나오는 거죠. 이게 제 로망인 것 같아요.
- 이야기를 짓는 일은 작가님 개인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 예전에 <청담동 살아요> 끝나고 나서 쫑파티 자리에서 후배 작가가 ‘어떤 동력으로 글을 쓰냐’고 비슷한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나요. 쓰다보면 나도 몰랐던 것이 내 인생의 문제였구나 훅 알게 되고 ‘이건 왜 이렇지?’ 의문이 생기는 아이템을 가지고 풀다 보면 ‘아 이래서 그랬구나’ 알게 되더라고요. 게다가 주 1회였기 때문에 매주 쓰면서 정리되는 그런 것들이 있었어요. 글쓰기가 생계는 물론이고 저에게도 도움이 되어야 하잖아요. 계속 나 언제 해갈되지. 언제 사랑으로 폭발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풀어가는 일이 쓰는 일 아닐까 싶어요.
에필로그
일과 중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컴퓨터 게임이요. 윈도 컴퓨터에 내장된 카드 게임. 요즘 컴퓨터엔 없어서 다운받아서 해요. 글 쓰려면 힘드니까 회피하나보다 생각했는데 어느 날은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가서도 하고 있을 때가 있어요. 정말 숨도 안 쉬고 해요. 왜 그러는 걸까요? 한번 생각해볼게요.”
마음을 뒤흔든 그 장면은 어떻게 떠올렸는지, 그 대사는 어떻게 나왔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어 물을 수밖에 없었다. 딱히 답이 마땅치 않을 질문일 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박해영 작가는 말을 멈추고 “한번 생각해볼게요. 왜 그러는지” “그것도 한번 생각해볼게요”라고 답했다. 그가 그려낸 감정과 대사들이 어쩌면 저 말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을 건드린 것, 마음에서 놓지 못하는 것을 한번, 그리고 다시 한번 되짚어보는 일. 그래서 피곤하다고, 지겹다고 매일 똑같이 불만을 털어놓는 내 마음에 실은 “우리 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쨍하고 햇볕 난 것처럼 구겨진 것 하나 없이” 이런 바람이 있다는 걸 간파해내는 게 아닐까. 그는 글쓰기가 일종의 구도 작업 같다고 말했다. ‘나 어디로 가고 싶은가. 뭐가 보고 싶은가.’ 이야기도 거기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그가 이번에는 어디로 향할지 벌써 궁금해진다. ‘아직도 해갈되지 않았다’는 그처럼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나, 좀 좋아지고 싶다’는 마음이 여전하니까.